[한국문화신문 = 정석현 기자]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제1, 2전시실(2, 3층)에서는 오는 2월 28일까지 <움직이는 글자, 조선을 움직이다>전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호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과 문방사우(文房四友)를 중심으로 준비한 기획특별전이다. 우리나라는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평가받는 《직지(直指)》를 비롯하여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제작하여 사용한 나라로 예로부터 인쇄술의 강국이었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활자 제작뿐만 아니라 조판기술, 제지기술, 금속활자에 적합한 먹의 제작 등 인쇄에 필요한 기술이 집약되어야 실현 가능한 것이었다.
이에 호림박물관에서는 국가의 통치 이념을 전파하고, 임진왜란 이후 문화를 부흥시키는데 금속활자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던 조선시대에 초점을 맞추어 조선의 뛰어난 인쇄술과 금속활자본에 깃든 국가 통치 이념에 대해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_책으로 기틀을 세우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의 새로운 이념으로 내세워 건국한 국가였다. 왕조가 교체될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사회적 혼란을 조선 역시 겪을 수밖에 없었으며, 조선은 이러한 문제를 서적의 보급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즉 통치 이념을 담은 서적을 널리 보급함으로써 새로운 국가로 백성을 포용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이다. 특히 조선왕조 개창의 주역이었던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서적포(書籍鋪)를 설치하여 금속활자 인쇄를 제안하였으며, 1403년 태종대 때 실현되었다. 태종은 금속활자를 제작하는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여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다.
▲ 경자자(자치통감강목)
이렇게 시작된 금속활자 인쇄술은 세종대 때 정착되었으며 세종은 인출량과 품질을 대폭 개선한 ‘경자자(庚子字)’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서체의 아름다움 덕분에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6번이나 다시 만들어진 ‘갑인자(甲寅字)’ 역시 세종대에 처음 제작되었고 이는 금속활자 인쇄술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진양대군(훗날 세조)의 서체를 바탕으로 제작한 ‘병진자(丙辰字)’는 세계 최초의 납활자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세종대 때 정착된 금속활자 기술은 세조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세조는 당대 명필가였던 강희안(姜希顔, 1417-1464)과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의 서체를 바탕으로 각각 ‘을해자(乙亥字)’와 ‘을유자(乙酉字)’를 제작하게 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글자를 쓴 ‘정축자(丁丑字)’도 제작하였다. 이후의 여러 왕들도 금속활자 제작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이로 인해 조선 전기는 금속활자 인쇄술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의 금속활자_책으로 문화를 부흥시키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모든 분야에 걸쳐 조선에 큰 손실을 입힌 전란으로 서적의 손실 역시 막대하였다. 화재에 의한 손실 못지않게 일본으로 약탈된 수도 많았으며 금속활자와 활판 등의 인쇄도구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금속활자 인쇄 문화는 임진왜란 이후 한동안 중단될 수 밖에 없었으며 금속활자를 다시 복구한 것은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은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여 금속활자 전성기를 다시 재현하였다. 이 때 제작된 활자는 갑인자 계열의 ‘무오자(戊午字)’이다. 그러나 전란 직후의 정치 ·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크게 번성하지는 못하였다.
▲ 재주정리자(동국역대사략)
▲ 한구자(경림문희록)
광해군 이후 숙종대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元宗, 1580-1693)이 쓴 글자를 바탕으로 ‘원종자(元宗字)’를 제작하였다. 원종자는 활자의 주조가 정교하여 원종의 예리한 서체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안에 포함된 한글 활자도 인서체에서 필서체의 구성으로 바뀌는 특징을 확인할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활자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정조대에는 주자소(鑄字所)를 복원하여 ‘정유자(丁酉字)’ · ‘임인자(壬寅字)’ · ‘정리자(整理字)’ 등을 각각 수십만 개의 활자로 제작하였고 규장각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출판 사업을 시행하였다. 이는 문(文)을 숭상하는 우문정치(右文政治)를 표방한 정조의 의지가 담긴 국가 사업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조선시대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들을 크게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_책으로 기틀을 세우다’와 ‘조선 후기의 금속활자_책으로 문화를 부흥시키다’로 구분하여 선보인다. 더불어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국가의 주축인 사대부들이 책과 함께 애호하였던 문방사우와 학문을 할 때의 자세나 유교적인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사랑방에 펼쳐놓았던 책가도 등의 회화 작품도 함께 전시하였다.
조선왕조 전 시대에 걸쳐 인쇄된 금속활자본을 모두 아우르는 이번 전시는 금속활자본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조선의 역사와 서체의 아름다운 변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자세한 문의는 전화 02-541-3523~5로 하면 된다.
▲ 전시실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