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27 (목)

  • 맑음동두천 19.0℃
  • 맑음강릉 23.5℃
  • 맑음서울 21.8℃
  • 구름조금대전 21.3℃
  • 구름조금대구 20.0℃
  • 구름많음울산 18.8℃
  • 흐림광주 21.6℃
  • 흐림부산 21.1℃
  • 구름많음고창 18.5℃
  • 흐림제주 21.8℃
  • 맑음강화 17.7℃
  • 구름조금보은 17.2℃
  • 구름조금금산 18.4℃
  • 흐림강진군 17.8℃
  • 구름조금경주시 17.2℃
  • 흐림거제 17.2℃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일본 위키, “제암리교회학살사건”이라고 분명히 해야

[맛있는 일본이야기 293]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사실을 사실로서 처리하면 문제는 간단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학살, 방화를 자인하게 되는 일이므로 제국주의 입장에 불이익을 초래한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간부들과 협의한 결과 (조선인의) 저항에 대한 살육 등을 인정하지 않기로 결의하고 밤 12시에 산회 하였다.”

이는 1919년 4월 15일 화성 제암리교회 학살을 주도한 우츠노미야타로우 (宇都宮太郞,1861-1922)가 그의 일기에서 밝힌 내용이다. 우츠노미야는 당시 일본 육군에서 가장 잘나가는 3인방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선군사령관 육군참의관으로 조선에 건너와 있었다. 그는 15년간 일기를 썼는데 그의 일기는 2007년 《일본육군과 아시아정책(日本陸軍とアジア政策)》이란 3권짜리 책으로 일본에서 펴낸 바 있다.

 

   
▲ 제암리학살사건의 진압사령관 우츠노미야의 일기 《일본육군과 아시아정책(日本陸軍とアジア政策)》책 광고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화성 제암리교회 학살에 대해 사건 이틀 뒤인 4월 17일치 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수원, 진위, 안성 등지에서는 하세가와(長谷川)대위가 지휘하는 제1반(第1班)과 츠무라(津村)특무조장이 지휘하는 제2반으로 편성된 일본병대(日本兵隊)가 출동하여 제1반은 4월 2일 이후, 제2반은 4월 9일 이후 야간에만 촌락을 습격하여 3천수백호를 수색하고 600여명을 잡아갔고 3, 4십호에 불을 질렀으며 더욱 수원 화수리 같은 곳은 일본순사 2명을 죽였다 하여 그들의 행악이 극심하였는데,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는 15일 일병(日兵)과 경찰이 발포하여 20여명이 사상되고 10여 호가 소실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잔인한 일을 지휘하고 직접 관여한 부하 아리타도시오(有田俊夫)에 대한 처리다. 당시 중위였던 아리타(有田俊夫)는 4월 15일 오후,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그리고 발안에서 정미소를 하고 있던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에 도착했다. 마을에 도착한 후 조희창과 사사카를 내세워 마을의 성인 남자들을 교회로 모이게 한 뒤 사격을 가하고 예배당과 민가에 불을 질러 23 명을 사살하고 이웃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6명을 총살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령관 우츠노미야는 부하직원인 아리타 중위에게 30일간의 가벼운 근신처분만 내렸다. 이어 열린 군법회의에서 아리타 중위는 살인, 방화에 관해 무죄판결을 받은 것이다. (1919.8.21) 일제국주의가 한반도에서 저지른 천인공노할 학살의 만행이 어디 한두 건이랴마는 대부분 제암리 사건처럼 ‘무혐의’ 처리되거나 이제는 아예 ‘침략의 역사’마저 부정하는 형국이니 황당할 따름이다.

그나마 일본 위키에서는 제암리 사건을 간단하게나마 다루고 있지만 제목부터 모호하게 달고 있다. 원컨대 일본 위키의 “제암리교회사건”은 “제암리교회학살사건”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무슨 사건이든 '제목'은 사건의 본질을 가장 잘 압축한 것이기에 ‘학살’이란 말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