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권효숙 기자] 마치 쏘아놓은 화살처럼 빠르게 흐르는 시간 위를 달리다 보면 살짝 어지러움증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묵묵히 흐르는 강물 위에 반짝거리는 햇살을 잠시 바라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한강을 끼고 햇살을 바라보며 달리다 보면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빠져나가는 삼도품 자리에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있고 조금 더 가면 파주 헤이리로 들어가는 성동나들목이 나온다. 들어가서 파주시청 방향으로 계속 직진하다 보면 갈현리 고개 위에 주유소가 왼편으로 보이고 그 주유소 뒤편 작은 길로 들어서서 비포장길을 터덜거리며 조금 더 가면 우리나라 최초 활과 화살 박물관인 영집궁시박물관이 나타난다. ▲ 전통 활과 화살의 장인 영집 유영기 중요무형문화재 영집은 우리나라 전통 화살이 장인인 궁시장 유영기(78) 선생의 호이다. 유영기 장인은 파주 장단 출생으로 수대에 걸쳐서 내려오는 가업을 이어받아 전통 화살장인의 길을 걸어 왔으며 1971년 9월13일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으로 지정 되었다. 궁시박물관에는 우리나라의 전통 활과 화살을 비롯해 외국의 활과 화살, 활쏘기에 필요한 도구들, 쇠뇌, 화차 등이 전시되어 있다. ▲ 편전은
[그린경제=권효숙 기자] 2004년 12월 대법원은 분묘기지권에 대한 청주한씨문열공파종중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이 분묘의 피장자는 청주한씨 한상질이 아닌 안동 권씨 권준이며 안동 권씨 창화공파 종손 권혁홍에게 분묘기지권이 있다고 최종판결하여, 300여 년 간 청주 한씨 문열공파에서 관리 수호해오던 무덤의 주인을 하루아침에 바꾸어버린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 1993년 당시 묘역. 앞이 권준의 묘이고 뒤가 외증손 한상질의 묘이다 1991년 1월 민통선 지역인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 산 112번지의 한상질 묘 및 그 부인의 묘가 도굴을 당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한상질(韓尙質)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공양왕 때 형조판서를 거쳐 우부대언, 우상시,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고, 1392년 7월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 예문관학사로서 진문사(秦聞使)를 자청하여 명나라에 가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결정 받아 돌아온 인물이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며 문열공파의 중시조가 되었다. 당시 도굴된 흔적을 발견한 청주 한씨 문열공파 종중은 묘의 지하 내벽부분에 그림으로 보이는 채색(彩色)들이 보이자 국립중앙박물관에 제보를 하게 되었고, 곧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
[그린경제=권효숙 기자] 덕진산성을 찾아가기로 한 그날은 개성공단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7명의 직원들이 들어온다던 날이었다. 통일대교 남단 검문소에는 수많은 취재진들이 카메라와 방송 장비를 펼쳐놓고 북쪽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검문소 한쪽 도로에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접경지역의 현장을 보기 위하여 세계 각국의 관광객을 태운 관광버스가 줄을 서있었다. 파주시 군내면 정자리 산 13번지. 덕진산성에 오르는 길은 자동차가 갈 수 있도록 길이 잘 나있었다. 반은 포장, 반은 비포장이라 덜커덩거리며 낮은 구릉 꼭대기에 이르렀다. 시도기념물로 지정되어서인지 주차장도 안내판도 잘 정비되어 있다. ▲ 덕진산성 안내판 해발 85미터. 높지 않으나 꼭대기에 서니 가슴이 탁 트인다. 눈맛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불어오는 바람도 이를 데 없이 상쾌하여 폐 속을 정화시켜주는 듯 하다. 이렇게 발 아래 펼쳐지는 임진강 하구의 장면은 평화롭기 그지없는데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뺏고 뺏기면서 수많은 전투를 치러낸 곳이라 하니 아이러니 하다. ▲ 초평도로 인해 갈라져 흐르던 임진강이 다시 합쳐서 흐른다. 멀리 통일대교가 보인다. 임진강은 함경남도 마식령 산맥의
[얼레빗=권효숙 기자]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이곳에 흐르는 임진강은 하루 두 번 조류로 인해 물이 거슬러 흐릅니다. 이 물줄기를 따라 날아오는 갈매기를 벗 삼던 정자 반구정(伴鷗亭)이 임진강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곳은 조선시대 명재상 방촌(厖村) 황희(黃喜)선생의 유지가 깃들어 있는 마을입니다. 황희선생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 개성 가조리에서 태어나 조선조 태조. 정종. 태종. 세종까지 네 분의 임금을 모시고 74년간의 관직생활, 18년간 영의정을 지낸 후 87세에 은퇴하여 이곳에서 지내다 90세에 별세하여 파주 탄현면 금승리에 안장된 조선초기 최고의 명재상입니다. 사목리에는 황희선생유적지가 잘 조성되어 있어 황희선생의 영당, 방촌기념관. 반구정, 앙지대, 황희선생의 고손인 월헌 황맹헌의 부조묘 월헌사와 재직사, 재실, 황희선생의 동상 등이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황희선생의 영당에는 황희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어 매년 선생의 탄생일인 음력 2월 10일에 파주 유림들이 모여 제향을 올리고 있지요. ▲ 반촌영당 제향 모습 또한 사목리에는 황희선생의 둘째 아들 보신(保身)의 후손들이 지금도 46호가 누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