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정인지, 박연, 최항, 신숙주, 성삼문, 김종서, 최윤덕, 이순지, 김담, 이천, 장영실 세종시대를 빛낸 인재들, 끝이 없다. 분야를 가릴 것도 없다. 특히 정인지처럼 음악, 언어,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빛을 낸 융합형 인재도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노비 출신 장영실도 있다. 이들이 있었기에 세종은 나라를 다스린 32년간 의료, 음악, 국방, 과학 등 온갖 분야의 업적을 이루었고 당대 최고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세종의 인재 양성은 크게 네 가지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교육, 둘째는 기관과 제도를 통한 인재 양성, 셋째는 인재들의 연구를 장려하고 선진 학문을 배워오게 하는 오늘날의 유학과 같은 해외 파견, 넷째 공동 연구나 협동 작업으로 인한 재능 발휘의 극대화였다. 세종은 인재 양성이야말로 국가 발전의 바탕임을 실제 정책을 통해 실천하고 이룬 셈이다. 인재 양성의 가장 기본이 되는 길은 교육이며 이러한 교육의 바탕은 책이고 책의 바탕은 문자다. 세종 때 이르러 각종 학교(향교, 학당) 제도가 크게 정비 되었고 평민 이상이라면 누구나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더욱이 책을 매우 좋아하고 그 가치와 효용성을 잘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놀라운 청음 사건 1433년 설날, 경복궁에서는 새해맞이 아악(정아한 음악이라는 뜻으로 의식용 음악) 연주회가 열렸다. 편경 연주를 다 들은 세종이 이렇게 말했다. 아홉 번째 소리가 음이 약간 높은 듯하구나. 어찌된 일인가? 이 때 음악 총감독이었던 박연은 깜작 놀라 직접 편경을 살펴보니 아홉 번째 돌에 먹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 ▲ 《세종실록》 오례의에 있는 편경 그림(왼쪽), 1433년 음력 1월1일 세종의 지음도(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 박연이 먹물을 말리니 음이 제대로 나왔다. 멀찍이서 연주를 듣고 반음보다 더 섬세한 음을 잡아냈던 세종. 이처럼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세종은 실제로 음악가이자 작곡가였다. 박연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잘 어울리는 악기를 만들고 표준음을 제정하고 실제 많은 노래를 작곡했다. 세종은 음악 재능이 뛰어나 어린 시절 양녕 형에게 거문고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고 정간보란 악보를 창안하였으며 정간보로 작곡된 세종악보가 세종실록 부록으로 무려 640여 쪽이나 실려 있다. 이렇게 바로잡은 음악을 바탕으로 세종은 음악 정치를 통해 백성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사는 태평성대를 열었다. 15세기에 표준음을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함께하는 세상 만들기 권혜리 김슬옹 ◈ 작품 이해하기 ㄷ, ㅇ, ㅅ, ㄱ, ㅒ, ㅓ, ㅣ를 여러 각도로 휘어지게 함으로써 자음과 모음이 그림처럼 보이도록 디자인 하였습니다. 풍차처럼 보이는 큰 바람개비 모양은 ㄷ, ㅒ, ㅓ로 만들었는데, 이 날개에서 나오는 바람은 우리가 꿈을 향해 나아갈 때 닥쳐오는 시련과 방해를 의미합니다. 그 아래로 ㄱ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타고 ㅇ, ㅅ, ㅣ로 만든 사람들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큰 ㅇ 속에 있는 하늘 풍경은 동그란 구름과 ㅅ을 닮은 종이비행기가 어우러져 꿈을 펼칠 수 있을 것만 같은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요즘처럼 서로 경쟁하는 각박한 생활 속에서 조금은 여유를 갖고 주변을 돌아보아,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이 작품을 디자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세상에 한글이 있습니다. ◈ 작품 속 숨은 이야기 그들이 사는 세상 난쟁이 마을에는 하늘로 가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그 곳 사람들은 모두 저 멀고 먼 푸른 하늘 가까이 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내가 남보다 먼저 하늘에 닿기만을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1434년 가을걷이가 끝나갈 무렵,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혜정교와 종묘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웅성 댔다. 어머, 저게 우리 임금님께서 누구나 시각을 알 수 있게 만든 오목해시계래. 우리 같은 까막눈 백성들이 시각을 알 수 있게 시각 표시를 동물로 표시했대. 말 그림을 바로 가리키면 낮 12시래. ▲ [사진 1] 세종 때 앙부일구를 전시해 놓았던 받침돌, 현재 탑골 공원 한 구석에 있다. ▲ [사진 2]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옆의 혜정교터 표시 비석. 세종은 이곳에 오목해시계를 설치하여 오고가는 백성들이 시간을 알게 하였다. ▲ [사진 3] 종묘에 복원해 놓은 오목해시계와 동물이 표시 된 내부 모습 번다한 길거리에 있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시각을 보고 한 마디씩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엄마아빠 따라 나온 덩치 큰 어린애들은 돌 위에 올라가 시간을 살피기도 했다. 사진 1이 바로 그 당시 오목해시계(앙부일구, 仰釜日晷)가 설치되어 있던 돌이다. 길이가 1미터 남짓인데다가 2단 위에 있어 네다섯 살 아이들까지도 돌 위에 올라가 시간을 알 수 있었다. 혜정교에는 복원이 안 되어 있고 기념 비석만 있고(사진 2
[그린경제/얼레빗=김슬용 교수] 세종 26년, 1444년 여름이었다. 세종은 이렇게 말한다.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 것인데 농사는 입는 것과 먹는 것의 근원으로 임금의 정치에서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_1444년(세종 26년) 윤7월 25일 그 어느 시대건 먹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것은 제대로 먹어야 사람답게 이 세상을 떠받치는 사람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종은 바로 가장 중요한 사람의 문제, 백성의 문제를 정확히 꿰뚫었다. 정치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백성들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터전을 만들고 법을 만들고 더 나은 제도를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 세종 때 정초 등이 꼭 필요한 농사지식만 모아 펴낸 《농사직설(農事直說)》 1. 굶주리는 백성들 세종이 임금이 된 그 다음 해인 1419년(세종 1년)에 흉년이 들고 온갖 자연 재해가 끊이질 않았다. 세종은 굶어 죽는 백성들을 보고 그들을 제대로 구제하지 못하는 현실이 가슴이 아파 신하들에게 2월 12일에 이렇게 말했다. “백성(국민)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보는 것이니라. 요즈음 홍수와 가뭄 등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최근 어떤 아는 젊은 여성을 공적인 일로 만났는데 배가 남산만 했다. 임신 몇 개월인데 아직도 일하고 있냐고 물었다. 임신 8개월이라고 했다. 그럼 출산 휴가는 언제 가려느냐고 했더니 고민 중이라고 했다. 공식(월급이 나오는) 출산 휴가는 아기 낳기 전후 3개월인데 아기 낳기 전에 많이 쉬면 아기 낳고 빨리 나와야 하기 때문에 그 시기를 저울질한다고 했다. 세종대왕은 관노비에게 무려 네 달이 넘은 137일, 그 남편에게도 한 달을 출산 휴가를 주었다고 했더니 그럼 지금이 세종 시대보다 못하다는 거냐고 쓴웃음을 짓는다. 세종 임금 이전에 산모는 아기 낳기 전 한 달, 아기 낳고 나서 7일 모두 37일을 쉬었다. 아기 낳기 한 달 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기 낳고나서 7일 만에 일을 하라는 것은 산모 상태로 보아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세종은 1426년(세종 8년) 4월 17일에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여성의 출산 휴가 제도를 담당하고 있는 형조에 지시하기를 관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휴가를 백일 동안 주게 하고, 이를 일정한 규정으로 삼게 하라.라고 하였다. ▲ 그림 오수민 1430년 10월 25일에도 조선 시대 국가의 법규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아파트 신발장이 무너져 두 어린아이를 덮치는 끔직한 사고가 있었다. 한 아이는 뇌를 다쳐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 국민들의 보금자리를 보급하는 공기업 엘에이취(LH)가 지은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런 사고를 겪고도 제대로 대처하지 않아 또 신발장이 한 아이를 덮쳤고 끝내 아이는 생명을 잃고 말았다. 더욱 비통하고 가슴 아픈 것은 엘에이취 공기업이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대책을 세우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불만제로 보도에 의하면 이와 똑같이 부실시공한 아파트가 아직도 많다고 한다. 신발장이 넘어진 핵심 이유는 신발장을 고정하는 못이나 나사 하나 안 박아서이다. 나사 하나만 제대로 박았어도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거의 모든 대형 사고도 사소한 부주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 한양도성, 세종 때 고쳐 쌓은 부분. 성을 쌓을 때는 저 돌멩이 하나도 소홀이 쌓아서는 안 된다. 세종대왕은 1422년 1월 17일 도성을 쌓는 공사 보고를 받고 이렇게 말한다. 도성을 보수하고 쌓은 뒤에 혹시 돌 한 개라도 무너져 떨어지는 것이 있으면, 즉시 그 방면의 감독관으로 하여금 보수하게 하고 그리고 나서 관련자
[그림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아름다운 우리 한글, 옷으로 다시 태어나다 유기정 김슬옹 ◈ 작품 이해하기 이 옷은 아동복입니다. 그래서 한글을 귀엽게 디자인하여 옷에 접목해 보았습니다. 목둘레와 소매 끝자락에는 한글 자음을 조그만 무늬로 넣어 귀여움을 강조하였습니다. 어깨 소매 둘레에는 ㅅ 무늬를 이용해 어깨선을 강조하였고, 가슴의 주머니는 ㅎ을 이용하여 실용성과 아기자기한 면을 더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티셔츠의 아랫단에는 한글을 자유롭게 배치하여, 아이들이 좀 더 쉽고 친근하게 한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 작품 속 숨은 이야기 한글나라 한글나라에 모음마을과 자음마을이 있었습니다. 이 두 마을은 사이가 좋지 않아 매일 싸우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음마을의 왕자인 ㅏ군은 사냥을 하기 위해 숲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숲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연못에 비춰보고 있는 아름다운 미녀를 발견했습니다. 왕자는 아름다운 미녀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연못 가까이로 다가갔습니다. 연못으로 다가간 왕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연못에 비춰진 미녀는 자음마을의 공주인 ㄱ양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깜짝 놀란 것은 왕자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한글을 세계로 안미현 김슬옹 ◈ 작품 이해하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글이라고 하면, 근엄하고 인자한 모습의 세종대왕님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지도 위에 인자한 눈과 눈썹, 굳건한 코, 근엄한 입술과 수염을 지닌 세종대왕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한글이 주제이지만, 세종대왕님이 계셨기 때문에 한글이 창제될 수 있었던 것이기에, 디자인을 통해서 세종대왕님과 한글 간의 깊은 연관성에 대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님 머리 위에 한글 창제의 이유를 적음으로써, 백성들을 사랑하는 세종대왕님의 아름다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이렇듯 한글창제의 이유를 작품 속에 적는다면, 이 디자인을 보는 사람들이 왜 세종대왕님이 한글이라는 주제의 중심이 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작품의 주제가 한글을 세계로인만큼, 크고 강건하게 그려진 우리나라의 지도를 중심에 배치하고, 그 윗면에 그려 넣은 세계지도에 우리의 한글을 써 넣음으로써, 한글을 세계로 전파하고 싶다는 작품의 취지를 밝히고자 하였습니다. 세계지도에 그려진 한글은 한글을 세계로 라는 문구의 자음과 모음을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우리 겨레는 천 년 이상을 한자를 빌어 문자생활을 해왔다. 15세기, 한문 사용으로 인한 문자 모순이 극에 달했을 때 다행히 고유 문자인 한글을 갖게 되었지만 그 뒤로도 오백 년 이상을 지배층과 지식인들은 한글을 철저히 비주류 문자로 묶어 두었다. 올해는 한글이 창제된 지 572돌, 반포된 지 569돌이나 되었지만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대 대학신문 등은 한글전용을 거부하고 있다. 물론 한글이 주류 문자로 자리 잡은 마당에 몇몇 언론이 한자 섞어 쓴다고 문제 삼고 싶지는 않다. 전 세계의 권위 있는 언어학자나 문자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한글의 우수성과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실정으로 보면 안타까운 현실이다. 실제 한글이 주류 문자로 제대로 인정받은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남한의 경우는 1988년 5월 15일에 이르러서야 한글 반포 542년 만에, 국민모금으로 한글전용 신문인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면서 한글 주류 문자의 꿈을 먼저 이루었지만, 안타깝게도 독재와 세뇌의 도구로 전락하여 세종의 소통 정신을 반영한 한글(조선글이라 부름)이라 보기 어렵다. 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