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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도 병으로 죽게 해서는 안 된다

“세종정신”을 되살리자 14, <삼복제도와 《신주무원록》>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세종은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사형 집행에 대한 법 판결문을 이두문자로 쓴다면, 글의 뜻을 알지 못하는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도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으나, 이제 그 말을 언문(훈민정음)으로 직접 써서 읽거나 정확히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다.” 

세종이 이 말을 정확히 언제 얘기했는지 모르지만 1444년 2월 20일에 최만리 등이 올린 갑자 상소문에서 세종의 말이라고 인용되어 있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훈민정음 창제의 핵심 동기가 바로 이러한 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세종은 자신이 직접 쓴 《훈민정음(해례본)》서문에서 그런 점을 밝히기도 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라고 하였는데 바로 재판 과정에서 한자 사용으로 인한 불소통 문제를 정곡으로 찌른 것이다.

 

   
▲ 훈민정음 언해본 어제 서문

통치자가 죄인과 관련된 문서나 판결문에 쓰인 문자까지 고민하고 배려한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없는 일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설령 죄인이라 하더라도 죄인의 인권을 존중을 필요가 있다. 하물며 죄인이 아닌데도 죄인으로 몰리는 억울함을 당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요즘도 이런 일이 많은데 15세기는 더욱 심했을 것이다.  

세종 시대의 위대함은 관청이나 신하들도 세종과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았던데 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425년 세종 7년 3월 24일에 죄인을 가두고 벌주는 일을 담당하는 형조에서 이렇게 세종 임금께 아뢰었다. 

“각 고을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이 수사를 마치기도 전에 죽는 자가 있으니, 이것은 필시 죄 지은 사람이라 하여 병들거나 굶주려도 전혀 구호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이는 죄수에 대하여 신중히 심의하라고 하신 전하의 뜻에 어긋난 것입니다.  

또 수사할 때 부질없는 형을 가하여 죽게 하는 수사관도 더러 있습니다. 비록 정말 죽을죄를 지은 자라 할지라도 재판도 끝나기 전에 옥중에서 죽는 것은 진실로 타당하지 않은 일이오니, 이제부터는 옥에 구류된 죄수로서 병을 얻은 자가 있으면, 사람을 보내어 성의껏 치료하여 죽는 일이 없도록 하며, 또 과도한 형을 가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감사가 적발하여 엄히 문책하소서.” 

형조 고급 관리들조차 이렇게 죄수의 인권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게 된 것은 세종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감옥이란 것은 죄 있는 사람을 징계하자는 것이지 본의가 사람을 죽게 하자는 것이 아니거늘, 옥을 맡은 관원이 마음을 써서 살피지 아니하고 심한 추위와 찌는 더위에 사람을 가두어 두어 질병에 걸리게 하고, 혹은 얼거나 주려서 비명에 죽게 하는 일이 없지 아니하니, 진실로 가련하고 민망한 일이다.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항상 몸소 상고하고 살피며 옥내를 수리하고 쓸어서 늘 정결하게 할 것이요, 병 있는 죄수는 약을 주어 구호하고 치료할 것이며, 옥바라지할 사람이 없는 자에게는 관에서 옷과 먹을 것을 주어 구호하게 하라. 그 중에 마음을 써서 거행하지 않는 자는 서울 안에서는 사헌부에서, 지방에서는 감사가 엄격히 규찰하여 다스리게 하라.“ _《세종실록》1425년 5월 1일

 

   
▲ 《세종실록》1425년 5월 1일

이렇게 감옥의 환경과 내부 관리까지 섬세하게 살피고 옥바라지를 못받는 죄수까지 배려하는 정책을 폈기에 억울한 죄인을 줄일 수 있었다. 일벌백계만이 능사가 아님을 세종은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세종은 법 집행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법을 맡은 관리가 형을 적용할 때에 대개 무거운 법을 적용하니, 내 심히 딱하게 여기노라. 죄가 가벼운 듯도 하고 무거운 듯도 하여 의심스러워서, 실정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는 경우면 가벼운 법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고, 만약 실정이 무거운 편에 가까운 것이면 아무쪼록 법에 알맞도록 하라. 서경(書經)》이란 중국 경전에 ‘조심하고 조심하라. 형을 시행함에 조심하라.’ 한 말은 내 항상 잊지 못하는 바이며, 이대로 해야 나라가 오래 태평할 것이다. 수사나 재판을 맡은 관리들은 깊이 유념할 것이며, 형조에서는 이 점을 널리 알리도록 하라.” 

세종이 서경에서 인용한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는 말이 억울한 죄인을 막고자 하는 세종의 민본주의에 의한 형 집행 정책과 의지를 잘 드러낸다. 오늘날도 억울한 죄인을 막기 위해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으로 설정된 삼심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이런 제도 역시 세종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세종 3년인 1421년 12월 22일에 세종은 “무릇 사형 죄를 세 차례 거듭 조사해서 아뢰게 하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겨, 혹시 착오가 있을까 염려하는 까닭이다. 지금 형조에서 두 차례 거듭 조사하고 세 차례 거듭 조사할 때에, 다시 최초 판결을 상고하지 않으니, 법을 마련한 본뜻에 어긋남이 있다.”라고 하면서 사형수 판결을 신중하게 할 것을 거듭 당부하고 있다.  
 

   
▲ 1438년(세종 20) 최치운(崔致雲) 등이 펴낸 법의학서《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

이것이 바로 그 당시 삼심 제도인 삼복법이다. 이렇게 ‘죄인도 사람이다. 더 중요한 것은 억울한 죄인이 생기지 않게 하라.’는 세종의 의지가 조선의 최고법전인 《경국대전》에도 반영되었다. 세종은 또한 인체의 중요한 부분을 치는 고문을 엄금하였고, 법의학서인 신주무원록(1438년)을 펴내 과학적인 수사를 하게 하였다. 신주무원록 대표 집필한 최만리는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무원록` 이 책이 원래 원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제 조선에서 자세히 해설하여 내용이 명백해졌다. 형옥을 다스리는 자들이 진심을 다해 이에 근거하여 부검하고 검증한다면 거의 적중하고 백성들이 원통함이 없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고 형률을 신중하게 하려는 임금의 뜻에 부합할 수 있는 것이다.”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에는 시체를 검안하는 방식부터 시체를 씻기고 의복 등으로 덮는 방법 등 수십 가지의 사체 검시를 중심으로 한 극악 범죄 관련 내용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섬세한 신체 용어와 정밀한 의학 용어가 빼곡한 책으로 18세기에는 한글로 번역되어 수사와 재판에 더욱 크게 이바지한 책이다.  

재판이나 죄인 다루는 형률 문제에 대한 세종의 섬세한 배려와 정책은 감옥 정비부터 관련 책 출판까지 철저히 이루어졌고 그런 탓에 세종 당대에는 공평한 재판 기강이 바로잡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