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1421년 3월 24일, 세종이 임금으로 나라를 다스린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지금의 충무로 지역에 있던 인쇄 관청인 ‘주자소’가 왁자지껄하였다. 세종 임금이 친히 보낸 술 120병이 도착하였기 때문이다. 임금 심부름으로 온 내시는 주자소 관원들에게 술병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어명이오. 그대들 애쓴 탓에 인쇄 속도가 빨라져 더 많은 책을 빨리 찍어낼 수 있게 되었다고 임금님께서는 더없이 기뻐 하셨소.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오늘은 맘껏 쉬며 술을 마시고 회포를 풀라는 어명이오.”
▲ 서울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 5번 출구 극동빌딩 앞 화단 안 <주자소터> 표지석
세종은 인쇄술을 끊임없이 개량하여 문화의 꽃인 출판문화를 크게 드높이게 하였다. 인쇄 개량 전에는 글자를 구리판에 새겨 놓고 사이사이 납을 끓여 부어, 단단히 굳은 뒤에 찍었기 때문에 납이 많이 들고, 하루에 찍어내는 것이 두어 장에 불과하였다. 이때에 세종이 이천과 남급으로 하여금 구리판을 다시 주조하여 글자의 모양과 꼭 맞게 만들었더니, 납을 녹여 붓지 아니하여도 글자가 이동하지 아니하고 더 정확하여 하루에 수십 장에서 백장까지 찍어낼 수 있었다.
《자치통감강목》 같은 역사책은 주자소에서 인쇄하고 집현전에서 교정하여 1420년 겨울부터 시작하여 1422년 겨울에 이르러 일을 끝냈다. 1422년 10월 29일에는 변계량에게 인쇄용 글자 개량에 관한 발문까지 짓게 하였는데 그 발문에 의하면 주자소를 만든 것은 많은 책을 인쇄하여 길이 후세에 전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광효 대왕(태종)이 앞에서 창작하시고, 우리 주상 전하께서 뒤에서 계승하셨는데, 일을 처리하는 도리가 주도면밀함은 그전 것보다 더 나은 점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글은 인쇄하지 못할 것이 없어, 배우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문화와 교육의 일어남이 마땅히 날로 앞서 나아갈 것이요, 세도의 높아감이 마땅히 더욱 성해질 것이다. 저 한나라, 당나라 임금들이 단지 재물 이익과 군대 개혁에만 정신을 쏟아, 이를 국가의 급선무로 삼은 것에 견준다면, 하늘과 땅의 차이뿐만이 아닐지니, 실로 우리 조선 만세에 한이 없는 복이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세종은 1425년에는 사마천의 《사기》를 찍어 문신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1434년 7월 2일에는 이천이 총감독으로 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참여하여 인쇄판과 글자에 관한 법을 개량하고, 새 활자인 갑인자를 만들었다. 1434년이 갑인년이었기에 활자 이름을 갑인자라 하였다.
▲ 1434년 갑인자로 찍은 《자치통감》
이 갑인자는 크기가 10×11mm인 경자자의 글자를 키워 14×15mm로 만들었기에 더욱 시원시원한 글자체가 되었고 활자와 인쇄판을 더욱 빠르고 완벽하게 짜서 인쇄능률을 향상시켰다. 활자 크기가 갑인자는 고르고 네모나게 만들었으므로 판을 짤 때에 밀납을 녹여 붓는 대신 대나무 조각으로 틈새를 메우는 소위 조립식 판짜기가 가능하였다. 이렇게 글자꼴도 더욱 보기 좋게 되고 인쇄 관련 시설들이 모두 개량되니 인쇄분량은 하루에 40여 장으로 앞서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진양대군 이유(훗날 세조)가 글씨를 써 20여만 자를 만들어 《자치통감》과 같은 역사책을 비롯하여 많은 책을 찍어내게 되었다.
갑인자는 조선시대에 7회나 주조되어 우수성이 입증되었다. 갑인자의 성분은 구리 84%, 아연 3~7%, 납 5%, 무쇠 0.1%, 그 강도가 미국 해군의 대포에 사용되는 금속(Navy Bronze)에 필적한 수준이라고 한다.
이러한 갑인자를 만들게 된 내력 《세종실록》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세종 16년(1434) 7월 2일자의 기록이다.
지중추원사 이천을 불러 의논하기를,
“태종께서 처음으로 주자소를 설치하시고 큰 글자를 주조할 때에, 조정 신하들이 모두 이룩하기 어렵다고 하였으나, 태종께서는 억지로 우겨서 만들게 하여, 모든 책을 인쇄하여 중외에 널리 폈으니 또한 거룩하지 아니하냐. 다만 초창기이므로 제조가 정밀하지 못하여, 매양 인쇄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먼저 밀[蠟]을 판(板) 밑에 펴고 그 위에 글자를 차례로 맞추어 꽂는다. 그러나 밀의 성질이 본디 부드럽고, 식자한 것이 굳지 못하여, 겨우 두어 장만 박으면 글자가 옮겨 쏠리고 많이 비뚤어져서, 곧 따라 고르게 바로잡아야 하므로, 인쇄하는 자가 괴롭게 여겼다.
내가 이 폐단을 생각하여 일찍이 경에게 고쳐 만들기를 명하였더니, 경도 어렵게 여겼으나, 내가 꼭 해야 한다고 하자,, 경이 지혜를 써서 판을 만들고 주자를 부어 만들어서, 모두 바르고 고르며 견고하여, 비록 밀을 쓰지 아니하고 많이 박아 내어도 글자가 비뚤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
이제 대군들이 큰 글자로 고쳐 만들어서 책을 박아 보자고 청하나, 내가 생각하건대, 근래 북쪽 정벌로 말미암아 병기를 많이 잃어서 구리쇠의 소용도 많으며, 더구나, 이제 공장들이 각처에 나뉘어서 일을 하고 있는데, 일이 매우 번거롭고 많지마는, 이 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셨다.
이에 이천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고, 집현전 직제학 김돈, 직전 김빈, 호군 장영실, 이세형, 사인(舍人) 정척, 주부 이순지 등에게 일을 맡기고, 경연에 간직한 《효순사실》ㆍ《위선음즐》ㆍ《논어》 등 책의 글자꼴을 글자 바탕으로 삼아, 주자 20여 만 자를 만들어, 이것으로 하루의 박은 바가 40여 장에 이르니, 글자체가 깨끗하고 바르며, 일하기의 쉬움이 예전에 비하여 갑절이나 되었다.
7월 16일에 세종은 “이제 큰 글자의 주자를 주조하였으니 귀중한 보배가 되었다. 나는 《자치통감강목》을 박아서 온 백성에게 반포하여 노인들이 보기 쉽도록 하고자 하는데, 만약 종이 30만 권만 준비하면 5, 6백 질을 인쇄할 수 있다. 그 종이와 먹을 준비하는 계책은 승정원에서 마련하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 다음 날 “《자치통감강목》을 인쇄할 종이를 각처에 나누어 만들게 하되, 5만 권은 조지소(인쇄 관련 관청>에서 만들고, 10만5천 권은 경상도에서, 7만8천 권은 전라도에서, 3만3천5백 권은 충청도에서, 3만3천5백 권은 강원도에서, 합하여 30만 권을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노인들의 가독력까지 고려한 인쇄 정책이었다.
세종은 아예 여러 절차와 방법까지도 지시하였다. “종이를 만드는 닥나무는 국고의 쌀로써 바꾸고, 성 안의 중들을 시켜 종이 뜨는 일을 하게 하되, 의복과 음식을 주고, 쑥대와 밀ㆍ보릿짚, 대껍질ㆍ삼대 등은 준비하기가 쉬운 물건이므로, 이를 5분(分)마다에 닥 1분을 섞어서 만들면, 종이의 힘이 조금 강할 뿐만 아니라 책을 박기에 적합하고, 닥을 쓰는 것도 많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백성들 입장에서 여러 가지 효율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이러한 인쇄술 개량에 자신감을 얻은 세종은 그 다음 해인 1435년 9월 12일에 주자소를 아예 경복궁 안으로 옮겼다. 주자소는 원래 임금님 직속 출판사인 셈인데 더욱 가까이 장려하기 위해 궁 안으로 옮기게 한 것이다.
원래 우리나라는 인쇄 강국이었다. 751년에 간행한 <다라니경>이 현재 남아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1236년에는 <팔만대장경> 5,200만 자의 목판 인쇄물을 만들었다. 이런 목판 인쇄물에 이어 1232년에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라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을 펴냈다. 1234년에는 《상정고금예문》이라는 세계 두 번째 금속활자로 된 책을 펴냈다. 이 두 책은 전하지는 않다. 책까지 전하는 최초의 금속활자본은 바로 프랑스가 훔쳐가 보존하고 있는 1377년에 간행한 《직지심체요절》이다. 현존하는 세계 첫 번째 금속활자본인 셈이다.
▲ 팔만대장경 목판
▲ 보협인다라니경-목판인쇄본
▲ 직지심체요절_금속활자(왼쪽), 직지 표지
이런 금속활자 전통에 힘입어 조선은 금속활자를 계속 개량해 나갔다. 그래서 태종 3년인 1403년에는 계미자, 1434년에는 섬세한 아름다움이 빛나는 갑인자를 개발하게 된 것이다. 세종은 출판 인쇄의 근본을 확 바꾸는 효율적이고 실용적인을 정책 폈다. 활자 인쇄를 개선하여 대량 인쇄의 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