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1441년 4월 어느 날이었다. 충청도 어느 시골 장터 옆 큰길가에서는 사람들이 길 위로 지나가는 뭔가를 보기 위해 서로 밀치며 난리굿이었다. 뒤쪽에서 볼 수 없는 사람들은 한 마디씩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뭐가 지나가기에 이리 난리여.”
"나라님이라도 지나가는 거유”
“나라님보다 더 인기가 있는 걸.”
▲ 세종 때 발명한 반자동 거리 측정 장치 <기리고차(記里鼓車)>, 장영실이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 (그림 오수민)
자세히 보니 ‘기리고차’라는 괴상한 마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마차 위에는 북이 징이 있었고 일정한 거리마다 징과 북을 치고 있었다. 징과 북을 사람이 치나 했더니 그것이 아니라 마치 로봇 같은 나무 인형이 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신기해하다가도 놀랍고 재미있어서인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는 연신 비명이었다.
이 사업 역시 세종 임금이 직접 관여하는 국책 사업이었다. 온나라 땅을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기계인 기리고차를 만들어 전국의 지리를 체계 있게 정리하여 과학적인 지리서를 만들기 위해 나무인형이 북 또는 징을 쳐서 거리를 알려주는 반자동 거리 측정 장치를 개발하여 측량하던 참이었다. 마치 택시 요금 측정기나 마라톤 경기의 거리를 측정할 때 사용되는 기계와 같은 것을 1441년에 개발하여 3월 17일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기리고차는 실제 세종 임금이 온양에 행차하며 썼다. 1441년 3월 17일에 임금과 왕비가 세종의 눈병 치료차 온양으로 갈 때 이 행차에 처음 기리고차를 사용하니, 수레가 1리를 가게 되면 나무 인형이 스스로 북을 쳤다고 한다. 장영실이 중국 유학을 통해 직접 배운 기술을 적용하여 우리식 기리고차를 만든 것이다.
▲ 변계량(卞季良), 맹사성(孟思誠), 권진(權軫), 윤회(尹淮), 신장(申檣) 등이 지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왼쪽, 《경상도지리지》- 오른쪽
이렇게 편리한 기계로 나라땅을 과학적으로 측정하여 1432년 1월 19일에는 맹사성, 권진, 윤회, 신장 등이 《신찬팔도지리지》를 편찬하여 세종께 올렸다. 각 도 지리지를 만든 다음 종합하여 만든 조선 최초의 인문지리서다. 이 책은 오늘날 전하지는 않지만 1425년 작성된 《경상도지리지》가 남아 있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 제작을 위해 세종은 1424년에 대제학 변계량에게 조선 전역에 걸친 지리 및 주·부·군·현의 역사를 편찬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 때 각 도별로 지리지가 편찬되었고 1425년에 경사도지리지가 나온 것이다.
지리서 제작의 최초 책임자는 변계량이었는데 그 뒤 바뀌어 1432년 최종 완성 때는 맹사성·권진·윤회·신장 등이 《신찬팔도지리지》를 완성하여 세종에게 바친 것이다. 이를 보완한 지리서가 《세종실록지리지》로 세종실록 부록처럼 실려 있다. 지리라는 것이 많이 바뀌기도 하므로 1454년(단종 2) 《세종실록》을 편찬할 때 일종의 증보 수정판으로 만든 것이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세종실록지리지 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공주성 남쪽 5리쯤 되는 평야 가운데에 두 개의 둥근 봉우리가 있는데, 남쪽에 덕릉을 모셨고, 북쪽에 안릉을 모셨다.
이렇게 과학적인 지리서가 편찬되었기에 효율적인 나라땅 관리가 가능했고 토지 관련 행정 질서를 바로 잡을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지리서는 군현별로 약재도 수록해 놓아 질병 치료와 의학 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384종의 약재가 실려 있다. 다목적용 지리서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