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얼레빗 = 이규봉 교수] 법 또는 권력의 힘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사형제도는 사람들이 국가를 만든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아주 오래된 제도이다. 거의 모든 종교가 살인을 저지르지 말라는 가르침을 가지고 있음에도 국가는 사형을 집행했다.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집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심지어 살인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기독교 국가에서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까지도 일삼았다. 그 현장을 바라보는 일반 시민대중은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그렇지 않은 시민은 조용히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눈물을 훔쳤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012년 7월에 생명권은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며, 국제인권법의 핵심적인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법적 절차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생명을 앗아가는 일은 인간이 인간에게 하기엔 너무나 절대적인 결코 되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극형은 범죄를 막지 못한다 사형을 당한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사형을 당할만한 범죄자였을까? 자신이 저지른 일이 사형을 당할만하다고 생각하고 죽은 자가 얼마나 될까? 정치적인 이유로, 무고에 의해서, 재판관의 어리석음과 탐욕에 의해서 아무런 잘못도 없이, 또
[그린경제=이규봉 기자] 7월 9일 0시 조금 지난 비행기로 귀국길에 올랐다. 마음이 심히 복잡했다. 장준하와 박정희를 비교해 보았을 때 우리는 누구의 삶을 따라야 하는지. 장준하의 삶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박정희의 삶을 따라야 하는가?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교육을 시킬 것인가? 장준하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가? 아니면 박정희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가? 왜냐하면 그 둘의 삶은 너무도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주언론인이며 반독재민권운동가인 장준하 ▲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장준하기념사업회 광복군 장준하는 1945년 11월 23일 김구 선생과 함께 그렇게 바라던 고국으로 환국했다. 그는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면서부터 해방이 되고 김구 주석의 비서로 활동할 때까지는 조국의 광복을 되찾는 데 헌신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53년 3월 잡지 《사상계》를 창간했다. 1958년 8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글로 필화사건을 맞았다. 탄압에 맞서 다음해 2월호는 권두언을 백지 상태로 발간해 친일파를 등에 업고 독재를 일삼는 이승만 정권을 비
[그린경제=이규봉 기자] 충칭은 중국의 남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의 임시 수도였다. 일본에 쫓긴 중국 국민당 정부는 중국해로부터 이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이곳 내륙의 산악지대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상하이에서 피난 나와 충칭에 자리 잡았다. 육로가 높은 산으로 전부 막혀 진입할 수 없었던 이곳에 일본군은 공중 폭격을 하여 시가지를 거의 초토화 시켰다. 전쟁이 끝난 후 수 십년간 복구하여 현재 인구는 3천만 명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임시정부의 분열에 폭탄선언을 하다 장준하 일행은 기대와 희망을 갖고 목숨을 담보로 그 먼 거리를 걸어서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해 광복군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충칭의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러나 린취안에서 김학규 주임이 그들을 말리며 한 말과 라오허커우에서 광복군 분견대가 그들에게 충칭으로 가지 말라며 한 말들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충칭에 살고 있는 많지도 않은 조선인에 비하면 파당이 너무도 많았다. 각 단체마다 정당마다 그들을 위한 환영회를 경쟁적으로 열었다. 처음에는 반가움에 기꺼이 그들의 환영식에 참석했으나 점차 실망하기 시작했다. 환영회는 형식적으로는 그
[그린경제=이규봉 기자] 7월 5일 금요일이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갈 곳은 바둥역이다. 이곳이 바둥이니까 바둥역이면 근처에 있을거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이곳에서 자그마치 남쪽으로 100여 킬로미터 더 가야한다. 바둥이리고 하는 현이 그만큼 넓은 것이다. 우리가 있는 곳은 우리나라의 읍 소재지로 보면 된다. 읍 소재지에서 군 경계까지 가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이름만 보고 바둥역에 왔다가는 역에서 바둥 시내까지 다시 100여 킬로미터를 더 가야 된다. 장준하 일행이 걸어서 온 곳은 바로 이곳 바둥까지였다. 이곳에서 사흘을 머문 후 5천 톤급 군용선박을 타고 만현(萬縣)을 경유하여 8일 만에 충칭(重庆)에 도착했다. 그래서 우리도 공식적으로는 바둥에서 주행을 끝냈다. 장준하 일행처럼 양쯔강을 타고 충칭으로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배가 더 이상 다니지 않는다. 유람선은 있지만 오래 걸리고 요금도 매우 비싸다. 그래서 바둥에서 바둥역까지는 차를 대절해서 갔고 충칭까지는 기차로 갔다. 대절했는데 말도 없이 사람을 더 태우네! 아침나절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휴식을 하면서 보냈다. 기차가 밤 12시 무렵에 출발하다 보니 일찍 갈
[그린경제=이규봉 기자] 7월 3일 아침 7시에 싱산을 출발했다. 장준하 일행의 행적을 따르면 우리는 여기서 자전거 주행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바둥으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여비가 떨어진 또 다른 일부는 산을 넘어 바둥으로 걸어갔기에 그들을 생각해서 우리는 산을 넘기로 했다. 참, 그들은 왜 돈을 그렇게 낭비해서 우리를 또 고생시키나! 싱산과 바둥 사이는 100여 킬로미터 되겠지만 산이 높고 하루 일정이 남아 원래 계획과 달리 중간에서 하루 더 묵기로 했다. 호텔에서 바둥으로 가는 길은 처음에 강을 따라 간다. 이 강을 따라 장준하 일행은 배를 타고 갔을 것이다. 어제 그렇게도 많이 산을 내려오고도 아직 덜 내려왔는지 길은 계속 내리막이다. 어디까지 내려갈 건지 걱정하게 만든다. 주변의 산은 매우 높은 데 내려간다는 것은 그만큼 올라갈 길이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좋은 날이 너무 오래되면 불행이 올 수도 있는 것처럼. 강을 어느 정도 따라가니 다리를 건너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제 우리는 강이 아닌 산으로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한다. 곧이어 터널이 나왔다. 호텔을 출발한 지 17km 만에 전체 일정을 통해 본 단 하나뿐인 터널이다.
[그린경제=이규봉 교수]7월 1일이다. 갈 길이 멀어 일찍 호텔을 나섰다. 앞을 바라보니 굉장히 높은 산이 앞을 가린다.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다. 저걸 어떻게 넘어? 걱정도 잠시, 길가에 식당이 보이기에 아침을 길에서 먹었다. 쌀국수도 있고 밀가루 덩어리인 꽃빵에 역시 밀가루로 만든 전(일명 부치기)도 있었다. 전은 꼭 우리의 그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 흔한 밥이나 장준하 일행이 그렇게 좋아했던 두부탕은 없었다. 뜨거운 물이 있기에 중국에서는 찾기 힘든 인스턴트커피를 우리는 타 마실 수 있었다. ▲ 우리가 오늘 넘어야 할 산이다. ▲ 쌀국수, 꽃빵, 전으로 아침을 먹다. 그 흔한 밥은 없다.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라오허커우를 떠난 장준하 일행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계곡을 지나고 절벽을 오르면서 파촉령을 올랐다. 엿새째 고원지대를 향해 오르고 있을 때 호랑이가 바로 앞에 나타났다가 가버렸다고 한다. 파촉령은 고원지대라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아 일정 거리마다 주막이 있어 배고픔을 달래 수 있었다. 겨울이라 고원에는 온통 눈으로 쌓여 있었다. 한파 속에 눈 위를 걷다 그 날 묵을 예정이었던 주막이 나오기도 전에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그린경제=이규봉 교수] 지도에서 살펴본바 이제 평지는 거의 끝났다. 이 말은 이제 지루함도 거의 다 끝났다는 뜻이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에게 끝도 없이 긴 평지는 인기가 없다. 너무 지루하기 때문이다. 기어를 조정할 일도 별로 없고 속도도 고만고만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달린 속도는 시간 당 최저 15킬로미터에서 최고 30킬로미터 정도로 도로의 질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장준하 일행이 넘어간 높디높은 파촉령을 넘어가야 한다. 파촉령을 넘는 길은 하도 높아 예전엔 없다가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일본군에 쫓겨 충칭(重慶)으로 수도를 옮겨가면서 군사적 필요에 의해 생겼다고 한다. 이 길은 당시 전방과 후방을 연결하는 유일한 길이였다. 그들은 산을 걸어 올라갔지만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넘을 것이다. 억! 저 변소를 이용하라고? 장준하 일행이 추운 겨울 출발한 것과 달리 우리는 한참 더운 6월 30일 라오허커우를 떠났다. 호텔에서부터 35킬로미터까지는 평지가 계속 이어졌다.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전에 초입에 있는 슈퍼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마실 물을 준비하기 위해 멈추었다. 화장실을 물어보자 슈퍼 주인이 앞을 가르킨다. 슈퍼 바로 건
[그린경제=이규봉 교수] 난양은 매우 큰 도시이다. 시내 곳곳에는 높은 빌딩들이 숲을 이루어 있고 아파트도 참 많다. 쉬저우를 출발해 지금까지 보아온 중국은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지역이 개발되고 있었다. 땅은 파헤쳐졌고 건물은 하늘로 치솟고 결과적으로 모든 화장실은 수세식일 수밖에 없다. 시골에서 간간히 보아온 그들의 화장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했지만 점차 재래식은 사라지고 대부분 수세식으로 바뀔 것이다. 그 많은 사람이 살 집이 모두 수세식으로 바뀐다면 화장실에서만 이용하는 물의 양 조차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그 많은 물을 어디서 공급할까? 화학비료의 공급으로 인분의 재활용은 줄어가는데 그 많은 인분을 다시 정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물과 화학물질을 생각하면, 비록 우리나라가 아니라 하더라도 엄청나게 큰 이웃한 나라임을 생각할 때 참으로 걱정되는 일이다. 이념을 초월한 이종인역사박물관 ▲ 배낭 뒤에 자전거 여행의 목적을 알리는 펼침막을 달았다. 난양에서 라오허커우(老河口)까지는 예상보다 훨씬 그 거리가 짧았다. 내가 받아 본 자료에 따르면 도중에 하루를 묵어야 할 정도로 먼 거리였으나 실제 거리는 120킬로미터 정도였다. 차
[그린경제=이규봉 기자] 1944년 11월 30일 오후 1시 김학규와 함께 남아서 공작대 임무를 수행할 13명의 동지의 전송을 받으며 6명의 여인과 3명의 아이를 포함한 53명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속에 중경을 향해 린취안을 떠났다. 약간의 식량과 용돈을 갖고 겨울옷도 아닌 여름용 중국군복을 입고 그들은 한파를 뚫고 걸어야 했다. 문제는 이들이 가는 길에 베이핑(北平)과 한커우(漢口)를 연결하는 남북으로 가로지른 평한선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군에 식량을 공급하는 작전상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 철도를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도 못 미쳐 있는 한 마을에 당도했을 때 다행히도 이 마을에는 중국 정규군 1개 사단의 군인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 쫓기고 있는 중이었다. 일본군과 중국군의 암묵적인 타협으로 이들은 일본군의 묵인 아래 철도를 건너려 하는 것이었다. 물론 서로 간에 주고받는 것이 있으리라. 적군과의 타협이라! 후퇴하는 중에도 중국군은 사단장의 가족들과 처첩들을 가마에 태우고 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신상태를 갖고 있으니 일본군에게 안 쫓길 수 있나. 이들 중국군에 섞여 장준하 일행은 평한선을 넘었다. 이때의 긴박한
[그린경제=이규봉 기자]호텔에서 묵었건만 닭 울음소리에 일찍 잠을 깼다. 닭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시끄럽다는 생각보다는 뭔가 향수에 젖게 된다. 아침을 먹고 출발하기 위해 호텔 주차장으로 갔다. 어제는 해가 떨어진 다음에 호텔에 도착해서 잘 못 보았지만 자전거가 아주 엉망이었다. 어제 공사 중인 비포장도로를 빗속에서 달렸기 때문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가까이에 수도가 있었다. 출발을 잠시 미루고 세차부터 해야 했다. 호텔 관계자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고맙게도 호스를 갖다 주었다. 내 것 네 것 할 것 없이 함께 여섯 대의 자전거를 깨끗이 청소하고 기름칠도 다시 했다. 그러고 나니 출발이 너무 늦어졌다. 갈 길이 먼데 늦게 도착할 것 같아 걱정이 앞섰다. 중국군 장교로 임관하다 린취안에 도착한 장준하 일행은 중국군 중앙군관학교 린취안분교 간부훈련반에 소속된 한국광복군훈련반(이하 한광반)에 입소한다. 한광반은 일본군에 징병되어 중국으로 오는 조선 청년들의 수가 많아진다는 정보에 따라 이들의 탈출을 염두에 두고 장준하 일행이 도착하기 4개월 전에 설치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의 명을 받은 김학규가 정식으로 린취안분교에 한국 청년들의 군사훈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