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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세상에 이런 일이! 핸들바가 부러지다니

[장준하의 구국장정육천리 자전거순례⑤] 린취안에서 난양까지

[그린경제=이규봉 기자] 호텔에서 묵었건만 닭 울음소리에 일찍 잠을 깼다. 닭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시끄럽다는 생각보다는 뭔가 향수에 젖게 된다. 아침을 먹고 출발하기 위해 호텔 주차장으로 갔다. 어제는 해가 떨어진 다음에 호텔에 도착해서 잘 못 보았지만 자전거가 아주 엉망이었다. 어제 공사 중인 비포장도로를 빗속에서 달렸기 때문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가까이에 수도가 있었다. 출발을 잠시 미루고 세차부터 해야 했다. 호텔 관계자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고맙게도 호스를 갖다 주었다. 내 것 네 것 할 것 없이 함께 여섯 대의 자전거를 깨끗이 청소하고 기름칠도 다시 했다. 그러고 나니 출발이 너무 늦어졌다. 갈 길이 먼데 늦게 도착할 것 같아 걱정이 앞섰다.
 

중국군 장교로 임관하다 

린취안에 도착한 장준하 일행은 중국군 중앙군관학교 린취안분교 간부훈련반에 소속된 한국광복군훈련반(이하 한광반)에 입소한다. 한광반은 일본군에 징병되어 중국으로 오는 조선 청년들의 수가 많아진다는 정보에 따라 이들의 탈출을 염두에 두고 장준하 일행이 도착하기 4개월 전에 설치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의 명을 받은 김학규가 정식으로 린취안분교에 한국 청년들의 군사훈련을 요청하여 특별히 만들어졌다. 

김학규는 1900년 생으로 평안남도 평원 출신이다. 1919년 만주의 유하현에 있던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1928년에는 조선혁명군을 조직했고 1932년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일본 관동군을 무찔렀다. 일제가 만주를 본격적으로 침략하자 중국 안으로 이동하여 난징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가하였고 1935년 민족혁명당으로 통합한 후 중앙간부로 활동했다.  

1939년 쓰촨성 지장에서 한국독립당을 만들었으며 다음 해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부 참모가 되었다. 1940년 한국광복군 참모장으로 임명됐고 1943년 안후이성 푸양(阜陽)에서 활동하면서 1944년 중국군 제10전구 사령관과 교섭하여 린취안에 한광반을 특별히 개설하고 탈출한 학병을 수용하여 광복군 간부훈련을 전개했다. 1945년에는 광복군 제2∙3지대에 대한 한미합작특수훈련을 계획했다. 

말이 훈련반이지 조선인 훈련반 학생들은 제대로 된 군사교육을 받지 못했다. 중국인 학생들은 직접 총을 쏘면서 사격훈련도 하지만 조선인들에게는 목총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정신교육도 오래 가지 못해 많은 시간을 할 일 없이 보내야 했다. 그러자 장준하 일행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훈련반 학생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열었고 잡지 <등불>을 발간했다.  

제공되는 급식이 충분하지도 않음에도 취사를 맡은 사람들이 성실하지 않은 자세로 음식을 주자 불만이 생기게 되고 장준하는 새로운 취사 책임자로 뽑혔다. 그가 아무리 성실하게 급식을 준비한다 해도 제공되는 그 양이 충분하지 못해 늘 배를 곯았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양심의 가책은 받았지만 동지들을 위해 20여 일간이나 근처 고구마밭에서 고구마를 서리해 동료들 간식으로 주었다. 

이러한 일화도 있다. 두 명의 동지가 술집을 돌아다니며 일본도로 중국인들을 협박해 술을 강탈해 마시고, 그것도 모자라 술집의 개들까지 죽이고 린취안 시내를 마구 돌아다닌 것이다. 더구나 조용히 들어왔으면 모를까? 영내로 들어와서도 칼을 휘두르며 행패를 부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이 영창에 갇히자 취사 책임자로 장준하는 갇힌 그들에게도 사식을 넣어주었다. 그러다 중국의 육군형무소로 그들을 이감한다는 말을 듣고는 정열을 다해 동지들을 설득한 후 중국 당국에 협조를 구해 두 사람을 풀려나게 했다. 육군형무소에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난 그들은 해방 후 국군 장교로 큰 공적을 남겼다고 한다. 

훈련반 졸업을 앞두고 학교의 요구로 중국인 학생들과는 달리 한광반은 연예행사를 하게 되었다. 이 중 장준하는 일본군을 탈출하는 반일 연극인 <광명지로>을 직접 연출해 큰 호응을 얻었다. 훈련반 과정은 원래 4개월이었으나 장준하 일행은 한 달 모자란 3개월간 교육을 받고 11월에 한광반을 졸업하여 공식적으로 중국군 육군 소위로 임명됐다.  

중국군 장교가 된 덕에 그들은 충칭까지 가는 길에 중국 인민과 군의 많은 도움을 받는다. 졸업을 하자 그들은 가던 길인 충칭 임시정부를 향해 다시 떠나려 했으나 김학규가 충칭의 임시정부 사정을 설명하며 적극 말렸다. 결국 13명만 남고 나머지 50여 명은 충칭을 향해 길을 떠나게 된다.
 

핸들바가 부러지다 

길은 어제처럼 일직선으로 곧게 나있다. 굽지 않고 곧게 난 그 거리가 10킬로미터나 되었다. 길은 청소한 듯이 말끔했다. 뒤 따라오던 임 교수가 갑자기 나를 뒤에서 강하게 추돌했다. 잠깐 쉬자는 말에 내가 속도를 줄이자 그만 부딪친 것이다. 흔히 있는 사고다. 그는 꽤 아팠는지 배를 움켜진다. 나중에 보니 배가 일자로 심하게 멍이 들었다. 함께 넘어졌지만 다행히 두 자전거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 쉬고 다시 주행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뒤에서 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멈추라고 한다. 뭔 일인가 하며 멈추어 보니 임 교수 자전거의 핸들바가 두 토막이 났다. 평지에서 주행하고 있는 중 갑자기 뚝 부러졌다는 것이다. 사태를 파악해 보니 조금 전 부딪쳤을 때 임 교수가 넘어지면서 배를 핸들바에 강하게 부딪친 것이다. 그래서 시퍼렇게 배에 멍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핸들바가 부러지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부러진 핸들바 사이에 관을 끼워 넣다.

난감했다. 그리고 화가 났다. 아니, 어떻게 그 중요한 핸들바를 이렇게 불량으로 만들 수가 있나? 그만한 충격에 핸들바가 부러지다니!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일반적인 자전거도 핸들바가 부러졌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하물며 전문적인 산악자전거 핸들바가 부러지다니 이것은 산악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뉴스거리가 될 수도 있다.  

이 상태로는 갈 수가 없다. 그나마 평지이니까 한쪽만 잡고 버틸 수는 있었다. 아직도 주마덴(駐馬店)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이다. 할 수 없이 불편한 상태로 가다보니 길가에 철물상 비슷한 것이 보여 거기에서 관을 얻어 끼웠다. 그것도 정확하게 맞지 않아 마침 갖고 있던 붕대로 둘둘 말아 임시처방을 했다.
 

   
▲ 부러진 핸들바를 맞추고 갖고 있던 붕대로 임시 봉합하다.
 

평지에서 부러졌으니 천만다행? 

우리가 갖고 간 자전거 중 네 대는 국내의 같은 회사 제품으로 프레임은 모두 티타늄이다. 세 대는 거의 모든 부품이 다 티타늄제품이나 임 교수 자전거는 한 등급 아래로 핸들바와 스템 그리고 안장대 등이 알루미늄 제품이다. 그래도 그렇지 핸들바가 부러지다니! 

몇 년 전에 일본산 자전거의 프레임 이음새가 부러져 자전거를 타던 사람이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 당시 이 사건은 자전거 타는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큰 반향을 보였다. 그 회사는 그에 대한 책임을 졌지만 결국 시장에 흔했던 그 회사 제품은 더 이상 보기 힘들었다. 핸들바가 부러진 것은 이 사건보다 결코 못 하지 않다. 

핸들바가 부러진 것에 대한 분노도 잠시, 우리는 다시 생각했다. 어차피 이상이 있었던 그 핸들바가 평지를 달리던 이 시점에 부러진 것은 천만다행 아닌가? 만일 내리막에서 부러졌다면? 상상도 하기 싫었다. 앞으로 이삼일 후면 산악지대를 접하게 되고 그러면 내리막을 달리게 된다. 이때 부러졌다면? 위로한 것도 잠시, 우리는 지금 핸들바 부러진 것을 다행이라고 오히려 축하했다. 

길가에는 양쪽으로 집들을 많이 짓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모두 붉은 벽돌집이었다. 그 모양도 직육면체로 너무 멋이 없었다. 처음부터 도착할 때까지 거의 모든 집 모양이 그랬다. 참 멋대가리 없네.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는 하나도 없고 끝도 없이 펼쳐진 평원을 달려 저녁 7시가 되어서야 허난성(河南省)의 주마덴에 마침내 도착했다. 오늘의 주행거리는 약 150킬로미터로 적지 않은 거리였다. 임 교수는 자전거로 인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너무 늦게 도착해 자전거를 수리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다음 날을 기약하며 피곤한 하루의 몸을 뉘였다.

 *** 이규봉

   
 
평소 자전거 타기를 즐겨 기행문을 남긴 자전거 여행만 10,000Km에 이른다. 수학을 실생활과 사회문제에 응용하는 것 외에 한국근현대사와 환경문제 그리고 국제정치와 우리나라 전통음악에 관심이 많다. 역사가 담긴 베트남 자전거 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을 펴냈으며, 역사와 함께하는 쿠바 자전거 기행문인 체 게바라를 따라 무작정 쿠바 횡단과 수학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수학의 창을 통해 보다가 곧 출간된다. 
현재 배재대학교 전산수학과 교수.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대전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피리클라리넷 아마추어연주자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