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이규봉 기자] 길은 어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는 평지다. 길 주변은 모두 밭이고 거의 논을 볼 수 없다. 장준하 일행이 몸을 숨기는 데 좋았던 옥수수가 무척 많이 심어져 있다. 도로 양쪽으로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빼곡히 서있다. 나무 사이사이로 가는 곳마다 군데군데 화학비료를 선전하는 화비(化肥)라는 입간판이 밭에 서 있다. 이 넓은 들판에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것이다. 다른 선진국들은 유기농으로 전환하고 있는데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중국에서는 화학비료를 장려하고 있다. 그 넓고 넓은 땅에 모두 화학비료를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장 생산은 늘어나겠지만 훗날 토질이 나빠지고 주변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은 생각 못하는지. 나로서 걱정되는 것은 그 많은 화학성분이 결국은 황해로 배출되어 중국의 연안 어업은 몰락이 가속화되고 이웃한 우리나라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선진 나라의 사례를 이미 모두 파악 했을 텐데 중국 정부는 화학비료를 권장하고 있는 것이다. ▲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에는 이와 같은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갑자기 자전거 두 대가 이어서 펑크를 낸다. 정비를 맡은 임 선생이 바퀴
[그린경제=이규봉 기자] 쉬저우 공정병학원을 출발해서 한 70여 km 쯤 갔을 때 화이베이 입구에 도달했다. 점심을 먹고 출발하려 하니 식당주인이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한다. 그도 우리와 같이 자전거 복장을 한 외국인을, 그것도 한국인을 다시 만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 같다. 원래는 화이베이에서 하루 묵을 계획이었으나 너무 일찍 도착했고 다음 목적지인 궈양(渦陽)이 한 60여 km 남았다는 이정표를 보고 궈양까지 가기로 했다. 202번 도로를 타고 가다보니 길을 포장하는 공사를 한참 하고 있다. 대형트럭들이 괴성을 울리고 지나가며 먼지를 일으킨다. 곧 나타날 것 같았던 궈양은 5시가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달린 거리는 벌써 110km 임을 알린다. 먼 거리는 아니지만 비포장도로를 오래 달려 모두들 심신이 지쳐있었다. 이정표는 다시 나타나지 않고 궈양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신도 서지 않았다. 더 가다가는 숙소도 구하지 못하고 화를 자초할 것 같았다. 결국 궈양까지 가지 못하고 우리가 가진 지도에도 없는 작은 마을인 임환(臨涣)에서 묵어야 했다. 이 작은 마을에 제대로 된 숙소가 있을까 하며 찾아 다녔더니 아래층에는 슈퍼가 있고 이
[그린경제=이규봉 기자] 6월 24일 날씨는 화창했다. 이른 아침에 갑자가 이봉원 회장이 한 말이 생각이 났다. 츠카다 부대는 지금도 그대로 있는데 무슨 공병부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던데. 그 순간 그렇지. 쉬저우까지 왔는데 시간이 더 소요될지라도 장준하 선생이 탈출한 츠카다 부대가 있던 곳에는 가봐야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원래 계획은 호텔에서 바로 출발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하루나 반나절이 더 걸릴 수도 있어 일정에 차질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나의 의견에 동의하여 이봉원 회장에게 츠카다 부대의 현 주소를 한자로 알려달라고 바로 문자를 보냈다. 혹시 몰라 전 선생의 스마트폰 전화번호도 함께 알려줬다. 혹시 문자를 늦게 보면 어쩌나 하고 기다렸으나 다행히도 바로 회신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내 휴대전화로는 한자가 모두 깨져 들어와 알 수가 없었다. 전 선생에게 문자 확인해 보라고 하니 공정병학원(工程兵學院)이라는 문자가 제대로 들어왔다고 한다. 역시 스마트폰은 정~말 스마트(smart)해. 괜히 스마트란 이름을 붙였겠어!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전 선생이 프론트에 가서 물어보니 다행히도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다. 오전 7시 호텔에서
[그린경제=이규봉 기자] 2013년 6월 23일. 인천공항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대전에서 승합차를 대절했다. 자전거 5대가 모두 잘 들어갈까 염려했으나 뒷좌석을 앞으로 밀어 생긴 공간에 가까스로 들어갔다. 앞뒤 간격이 좁아지긴 했지만 5명이 타기에는 좌석도 충분히 마련됐다. 아주 우연한 만남 ▲ 장준하의 구국장정육천리를 함께 한 임수현, 임동순, 이규봉, 고병연, 윤일선, 전태일(왼쪽부터) 인천공항으로 가는 도중 독립군가 음원을 듣고 있으니 마치 독립군이 된 느낌이다. 하지만 독립군이 되는 것이 좋은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는 기분이 씁쓸했다. 요즘 어느 누가 아무리 사회가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자식들을 또는 남편들을 독립군으로 보내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긍지를 느낄까?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보면 절대로 독립군으로 나서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민족을 위하는 또는 정의를 위하는 일에 나서는 것을 절대적으로 금하는 사회가 되었다. 나라의 안위나 공동체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안위가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 남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봉사하거나 희생하기는커녕 남의 희생을 자신의 이익으로 삼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사회가 되었다. 비록 후에 큰 손실을
[그린경제=이규봉 기자] 2013년 3월 26일.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공동위원회는 장준하 선생의 유골을 감식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정빈 서울대 명예교수의 정밀감식팀은 장준하 선생이 머리를 가격당해 목이 손상돼서 즉사 했고, 이후 누군가 벼랑 밑으로 내던졌거나 추락해 엉덩이뼈가 손상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비록 민간 발표이나 이로써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에 있는 약사봉에서 실족해 죽었다는 정부의 공식보도를 38년 만에 부정하는 것으로,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진상을 규명해야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장준하 선생의 죽음이 정치적 타살로 인정된다면,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국의 광복을 찾기 위해 한 몸을 다 바친 광복군 대위가 해방 후에 자신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의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조선인 출신 일본군 중위에게 오히려 죽임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찌 비분강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독립투사 중에 독립투사이며 나라와 민족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정통 보수주의자가 해방 정국에 기회주의자인 친일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다니.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빼앗은 당시 대통령에게는 군부정권 시절임에도 거침없이 독설을 퍼붓는 장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