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가랑비 정도로 생각했던 가을비가 여름 소나기처럼 바뀌어 창밖을 계속 때리자 하루 종일 일이 안되고 시선이 계속 유리창 밖으로 돌아간다. 유리창에 부딪쳐서 깨어져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을 보면 마음은 어느덧 시인이 되어 누군가의 작품이라도 따라 부르고 싶어진다. 그리움에 지친 얼굴 표정하나 없는 회색 빛 그게 너의 진실인가 봐 목마름에 갈증을 느끼며 애타게 부르다 슬픔의 눈물방울 뚝뚝 떨구며 그렇게 넌 다가오고 있어 가까이 다가와선 내 마음 두드리지도 못하고 울밑에서 떨구고 서 있구나 .... 박명순/ '추우(秋雨)' 중에서 유리창을 때리는 비는 대개 말이 없다. 유리창으로 격리돼 있어서 바깥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그런 언어의 정지 속에서 느껴지는 말없는 가을비의 마음을 "가까이 다가와선 내 마음 두드리지도 못하고 울밑에서 떨구고 서 있구나"라고 하는 구절처럼 절묘하게 대변하면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그런 가을비를 바라보노라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센티해지는 모양이다. 우수수 부는 바람을 타고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그 자체가 마음의 빗장을 긁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러기에 번잡한 세속을 피해 산 속에서 수양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나 홀로 길을 나섰네 안개 속을 지나 자갈길을 걸어가네 밤은 고요하고 황야는 신에게 귀 기울이고 별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네 길을 나서면 모든 게 경이롭다. 길을 가다보면 안개 낀 날도 있을 것이요, 무작정 가다가 날이 저물어 낭패를 보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날이 저문다고 걱정만 할 일은 아니다. 그런 날이면 밤이 더 고요하고 황야는 바로 머리 위로 다가온 저 깊고 푸른 하늘에 거하고 있는 신(神)과 더 가까이서 대화할 수도 있다. 그런 날이면 별들이 서로 속삭이는 것 같다. 서로 얼굴과 몸매 자랑도 하고 정담도 나누고 때로는 거울로 햇빛을 얼굴에 쏘아주는 장난도 할 것이다. 사람을 뺀 모든 자연이, 그동안 말도 없이 숨어있던 모든 자연, 무생물이 이야기 한다. 밤을 걷는 사람들에게 걷는 일 자체는 이처럼 많은 경험의 보고이다. 이런 멋진 표현을 한 시인이 누구인 줄 아는가? 이 시는 ‘나 홀로 길을 나섰네’로 잘 알려진 러시아 음악의 노랫말이다. 스베틀라나라는 러시아출신의 프랑스 여성이 프랑스어로 불러 10년 전 우리나라에 유행했던 노래다. 단조로 된 쓸쓸한 멜로디, 그러기에 더욱 혼자 걷는 외로움을 잘 묘사하고 있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배달은 박달과 통한다. 박달은 박달나무를 일컫는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단군(檀君)의 단이 바로 박달나무 단이니까 단군도 박달나무가 나는 곳의 임금이란 뜻이 된다. 실제로 박달나무 아래서 나라를 열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박달나무의 박달은 한자로 ‘朴達’, 또는 ‘백달(白達)’, 그러다가 ‘배달’.... 이렇게 이어지지만 굳이 한자로 표기하기 이전에 박달은 '밝은 달'이란 순수 우리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박달나무를 본 적이 있으신가? 사전을 보면 박달나무는 자작나무과의 낙엽교목으로 깊은 산 속에서 30미터 높이까지 자라는데 한국, 일본, 중국 북동부, 그리고 러시아 우수리 지방 등에 사는 곳으로 되어 있어 우리 겨레의 거주범위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우리 겨레를 배달겨레, 곧 박달 민족이라고 해서 크게 틀리지 않는다. 박달나무는 무척 단단해서 예전에는 포졸들이 들고 다니는 방망이나 윷, 방아와 절구공이, 떡살판, 다식판, 수레바퀴 등 생활 주변 곳곳에 쓰였다. 그런데 박달나무를 이제는 볼 수가 없다는 것이 큰 아쉬움이다. 나무가 단단한 만큼 빨리 자라지 않는데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벌채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대체로 독일어라는 것은 딱딱하고 정감이 없는 개념어 일색이란 비판을 듣지만 때로는 매력이 있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그 언어도 중국의 한자와 비슷한 구성법을 갖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Fernseh’라는 단어가 있다. ‘fern’은 멀다(遠), ‘seh’는 보다라는 뜻의 동사 ‘sehen’에서 나온 말로 ‘봄(視)’ 이란 뜻이니까 이 단어는 멀리서 보는 것이란 뜻의 텔레비전이 된다. 중국에서는 전기를 통해 멀리서 볼 수 있는 것이란 뜻으로 電視(전시)라는 말이 텔레비전의 번역어로 쓰인다. 같은 원리로 ‘Fernweh’가 있다. ‘weh’는 ‘불다, 전달하다’라는 뜻의 ‘wehen’에서 나온 말이니까 멀리 전달되는 그 무엇, 곧 ‘동경(憧憬)’이란 뜻이 된다. 그러면 ‘Fernweh’는 먼 데에 대한,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이란 뜻이 된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유명한 여성 수필가 전혜린의 ‘먼 곳에의 그리움’이란 글이 생각이 나서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러나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너져 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인생의 시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조선왕조 제10대 임금인 연산군 7년에 태어나 중종과 인종, 명종을 거치며 뛰어난 학문과 성실한 생활로 관직에서 승승장구하던 톼계 이황이 고향으로 물러가려는 뜻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한 것은 46살 때이다. 이 때에 이황은 그의 고향인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이라는 조그만 암자를 지어 자신의 학문연구의 처소로 삼는데, 이를 계기로 동네이름도 토계에서 퇴계로 바꾸고 스스로의 호(號)도 그것으로 한다. 토계(兎溪)라는 말은 토끼가 뛰어노는 골짜기라는 뜻이라면 퇴계(退溪)는 ‘물러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 되어 이 조그만 골짜기는 미물이 뛰어 노는 자연적인 공간에서 갑자기 사람, 그것도 높은 뜻을 지닌 선비가 주인공이 되는 인문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그리고는 지금부터 450년 전인 1569년 4월 퇴계는 서울에서부터 고향집으로 아주 내려간다. 거기서 터를 잡고, 중앙 정계의 소용돌이를 멀리하고, 자연 속에서 우주와 인간의 근본을 보다 철저히 찾아내고 이를 삶 속에서 어떻게 구현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뜻있는 분들이 이 귀향을 기리기 위해 재현단을 만들어 올해 4월에 서울에서부터 안동 도산 토계까지 걸으면서 선생의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은박지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을 우리는 기억하며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중기에도 이중섭이라고 불리는 화가가 있었다. 바로 대나무 그림으로 유명한 이정(李霆, 1541~1622)이란 분이다. 이름이 이정인데 어떻게 이중섭이라고 하는가? 바로 그의 자(字), 곧 어릴 때의 이름이 중섭(仲燮)이었던 까닭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름대신에 호를 많이 불렀지만 친한 사이에서는 자를 그대로 불렀으니까 이중섭이라고 해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 조선시대 이중섭은 탄은(灘隱)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세종대왕의 현손, 곧 4대 손자 곧 고손이었다. 그는 시ㆍ서ㆍ화에 뛰어났고 특히 묵죽(墨竹), 곧 먹으로 치는 대나무 그림은 당대 최고로 이름을 떨쳤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이 대나무 그림을 보면 그가 왜 이름을 떨쳤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림 가운데에는 진한 먹으로 그린 대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 뒤로 연한 먹(淡墨)으로 그린 대나무 서너 그루와 화면 밑쪽에 거칠고 억센 필치의 바위가 있다. 이 그림은 우리가 흔히 보듯 꼿꼿한 대나무 줄기를 굵게 그려 넣는 그림들과는 달리 줄기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국화의 향기가 은은하게 다가오는 시절이다. 국화의 색이 눈을 포근하게 만져주는 계절이다. 국화의 꽃술이 우리 마음을 보드랍게 감싸주는 때다. 지난 월요일은 음력 9월9일, 중국인들이 중양절이라고 부르는, 우리에게는 잊힌 계절의 분수령이다. 중국인들은 9라는 숫자를 매우 중요시하고 좋아해서, 9가 두 번 겹치는 9월 9일을 중양절(重陽節)이라고 하여 일찌기 당나라 때부터 이 날을 축하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한가위를 풍성하게 즐기고는 3주 뒤쯤 되는 중양절은 지나치지만, 중국 사람들은 중양절인 9월 9일엔 높은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셨다는 전설이 있다. 일찍이 비장방(費長房)이라는 사람이 그의 제자였던 여남의 환경(桓景)에게 "9월 9일 자네의 집에 큰 재난이 닥칠 것이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 집안사람들에게 붉은 주머니에 수유(茱萸)를 넣어 어깨에 메고 높은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면 이 재난을 면할 것이다."라고 하자 환경이 그 말대로 하였다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과연 집안의 개, 돼지, 닭, 양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날에 가슴에 수유 가지를 꽂고 높은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는 습관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을 가리키는 말로 ‘선비’라는 말 이상은 없다고 하겠다. 행실이 바르고 근검절약하며 재물을 밝히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고 임금에 대해서는 충성을 하되 바른 말을 할 때에는 목숨을 내걸고 하고 자신이 공부한 바른 이치를 세상에 펴서 모든 이들이 고루 공평하게 잘 살도록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물론 공자가 처음 만들어 낸 것이다.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 사서(四書)와 《주역(周易 또은 易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등 3경을 포함해 이른바 사서삼경(四書三經) 가운데서 《예기(禮記)》라는 책은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지키고 따라야 할 예법에 대해 공자의 말을 빌어 길고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 「유행(儒行)」편이 나온다. 유(儒)라는 단어를 ‘선비’라고 풀 수 있다면 유교라는 것은 선비가 되어 선비의 도를 행하는 길을 열어주는 가르침 혹은 종교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거기서 선비의 길을 아주 소상하게 일러주고 있다. “선비는 오늘날 세상을 살면서도 옛 사람들을 되돌아봅니다. 이 세상에서 행하여서 후세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9월이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뜨겁던 여름 기운이 서늘한 가을 기운에 밀려 확실히 서늘하게 내려간 것은 물론 바람의 방향이 달라졌다. 옛날 동양에서는 사방팔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대해 각각 이름을 붙이고 구분을 했단다. 이른바 팔풍(八風)이다. 일 년 365일은 대략 45일을 기준으로 철이 바뀐다고 보겠는데 입춘에는 북동풍이 분다고 보고 이를 조풍(條風)이라고 했고 45일 후인 춘분에는 동풍이 부는데 이를 명서풍(明庶風)이라고 불렀다. 춘분 후 45일이 지나면 입하가 되고 이때는 동남풍인 청명풍(淸明風)이 불어온다. 또 45일이 지나면 하지인데 이때는 마파람이라고 하는 경풍(景風)이 남쪽에서 불어온다. 다시 45일이 지나면 입추가 되니 이때는 서늘한 바람인 양풍(凉風)이 서남쪽에서 불어온다. 다시 45일이 지나면 추분이 되는데 이때는 창합풍(閶闔風)이 서쪽에서부터 불어온다고 했다. 창(閶)은 큰 문이고 합(闔)은 작은 문짝이니 아마도 이제는 찬바람에 문을 닫아야 한다는 뜻일 게다. 추분 이후 45일이 되는 입동에는 서북쪽에서부터 부주풍(不周風)이 불어오고 다시 45일 후인 동지에는 북쪽에서부터 광막풍(廣莫風)이 불어온다고 했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북쪽의 이민족 여진족의 금(金)나라에 의해 송(宋)나라가 망하고 남은 세력이 다시 지금의 항주로 근거지를 옮겨 다시 송나라(역사에서는 남송이라고 부름)를 세운 무렵에 태어난 주희(朱熹 1130~1200)는 왜 나라가 이처럼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리게 됐는가를 깊이 생각하다가 그것이 불교와 도교 때문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위진(魏晋)남북조와 수(隋),당(唐)시대를 거치면서 유학은 침체되고 불교(佛敎)와 도가(道家)가 유학을 압도하게 되는데, 이들은 군신(君臣) 부자(父子)라는 사회적 관계를 부정하고 오로지 마음의 평안을 구하고자 하며, 도덕이라는 추상적인 개념만을 강조하다 보니 결국 인의까지도 망가지므로 해서 사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천하가 어지러워진다는 생각이었다. 한때 불교와 노자의 학문을 열심히 공부했으나 24살 이후 유학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며 유학에 복귀한 주희는 11세기 북송(北宋)의 대표적인 학자 주돈이와 정호ㆍ정이 형제 등의 학문을 이어받아 새로운 유학을 연다. 그 유학은 과거처럼 경전의 해석을 중요시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며, 경전과 성현의 말씀을 다시 새겨 우주의 원리를 새롭게 규명하고, 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