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논어(論語)》 미자편(微子篇)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장저(長沮)ㆍ걸익(桀溺)이 나란히 밭을 갈고 있었는데, 공자가 지나가다가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터를 묻게[問津]하였다. 장저가 “수레 고삐를 잡은 이는 누구요?” 하여, 자로가 “공구(孔丘)라고 합니다.” 하니, 장저가 “노나라 공구라는 사람이요?” 하여, 자로가 “맞습니다.” 하니, 장저가 “그는 나루터를 알 것이다.” 하였다.
다시 걸익에게 물으니 “당신은 누구요?” 하여, 자로가 “중유(仲由)라고 합니다.” 하니, “노나라 공자의 제자입니까?” 하여 그렇다고 하였다. 이에 걸익이 “천하의 도도한 물결이 다 그러한데 누가 바꾼단 말이오? 사람을 피해 다니는 선비를 따르기보다는 세상을 피해 사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나을 것이오.” 하고 여전히 김을 매었다.
자로가 그 내용을 가지고 가서 공자에게 고하니 공자가 서글픈 표정으로 말하기를
“조수(鳥獸)와는 함께 살 수 없는 법이다. 내가 이 백성들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내가 바꾸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 이야기는 장저와 걸익이라는 도가(道家) 계열의 은자(隱者;숨어 있는 현인)들이 공자에 대해서 비판하는 내용을 통해 공자 스스로의 생각을 밝힌 것이다. 나루터라는 것은 강이라는 자연적인 난관을 극복하는 출발점이자 방법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나루터를 찾는다는 것은 곧 이 세상을 순화해서 사람들이 편안하고 의미 있게 사는 방법을 물어보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와 생각을 같이하는 장저와 걸익 두 사람은 공자가 그 방법을 잘 알고 있을 것이지만, 왜 그렇게 세상의 혼탁함 속에 들어가 애를 쓰려고 하느냐, 세상을 떠나서 조용히 사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냐고 되묻는 것이고, 여기에 대해 공자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서 누구와 같이 살란 말인가, 천하의 이 중생들이 제대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냐,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애를 써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이야기는 ‘나루터를 묻다(問津)’라는 제목으로 과거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이 좋아하는 교훈적인 이야기이다. 우리가 세상을 공부하고 연마한 지식으로서 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이 세상을 위해서 어떤 생각과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를 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학문을 하는, 글을 공부하는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인 가치관과 목표를 묻는 것인데 , 그것은 곧 노자나 장자처럼 세상의 어려움을 피해 혼자만이 일신의 평안을 구하지 말고 세상 속에 들어가서 사람들의 바른 삶을 이끄는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을 공자가 천명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조선 중기의 학자인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일찍이 '문진가(問津歌)'라는 시조를 통해
밭 가는 저 할아비 문진(問津)을 비웃지 말게나
사람이 되어서 조수(鳥獸)를 벗할 것인가
마음에 잊지 못하여 오락가락하노라
라고 하여 자신이 세상에서 할 일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과연 주세붕은,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워 서원을 통해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이들을 통해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는 일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루터를 묻는다는 이 말은 우리나라 서원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개념임을 이 시조를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나루터를 묻는다는 말은 주세붕이 쓰기 훨씬 이전인 서기 4세기 말 동진 시대에 이미 당대의 이름 높은 문사인 도연명(陶淵明), 곧 도잠(陶潛, 365년 ~ 427년)이 그의 유명한 음주시(飮酒詩) 중 스무 번째 편에 쓸 정도로 유명한 개념이었다. 도연명은 복희와 신농씨가 오랜 전에 죽은 이후로 세상에는 바르게 살려는 사람들이 적어져, 공자가 백성들을 순화해서 바른 나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썼지만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고 그 뒤로는 진시황 같은 이가 나와서 모든 서책을 불태우는 등 광풍이 휘몰아쳐서 세상이 더욱 혼탁해졌다고 한탄을 하면서
區區諸老翁 나라의 모든 학자들이
爲事誠殷勤 정성을 다해 예의를 가르쳤으나
如何絶世下 어떻게 그 가르침이 다 끊어졌는지
六籍無一親 아무도 육경을 공부하지 않는다
終日馳車走 온종일 수레 몰고 다녀도
不見所問津 나루를 묻는 이 듣지도 보지도 못했네
若復不快飮 세상이 이러니 술 마시지 않는다면
空負頭上巾 머리에 쓴 갓에게 미안하리
라고 읊는다. 여기에 나루를 묻는다(問津)라는 말이 나오거니와, 이 말은 곧 세상을 올바르게 하는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들이 없다는 뜻이 되어, 도연명이 왜 평소에 그처럼 술을 좋아했는지를 솔직히 밝힌 것이다.
이화여대의 최재천 석좌교수가 오래 전에 여러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모이는 ‘문진포럼’을 꾸린 것도 이러한 뜻이라 보인다. 강 건너로 상징되는 우리의 목적지에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를 인문사회학과 자연과학이 함께 찾아가자는 뜻이리라.
그런데 해방 이후 지금까지의 우리 정치사를 보면 선거 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데 앞장서겠다며 대학에 있는 많은 학자가 대통령 후보 측근에 가서 이름도 멋진 많은 포럼을 만들고 거기서 갖가지 정책 자료집을 내놓고, 선거가 끝난 후에는 논공행상에 따라 자리를 차지했지만 바른 소리를 하지 못해 불명예 퇴진하거나 감옥에 가고, 역대 대통령의 정치도 거의 모두 실패한 것을 보면 그들 학자의 ‘문진’이 잘못된 방향으로 추진됐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 바른 정치를 해서 국민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그들의 주장이 결국에는 자신들의 안위와 복록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분석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인조 때 당시의 당파에 휩쓸리지 않고 벼슬보다는 향리인 경남 함안에서 바른 소리를 하고 인재를 가르쳐 이름이 높았던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1585~1664)는 당시 선비들의 권력만을 탐하는 행태를 보고는
“세상 선비들이 말하는 학문이란 / 글을 배워 잘 외워 읽는 것 / 세상 선비들이 말하는 사업이란 / 글짓기를 일삼아 작록을 따는 것 / 마음과 입이 서로 맞지 않고 / 말과 행동을 서로 돌아보지 않네 / 비록 만 권의 책을 독파했다 한들 / 덕행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네”라고 ‘세유탄(世儒歎)’이란 글에서 한탄을 했다(간송집(澗松集)
이처럼 공부를 하는 선비들에게는 나루터를 묻는다는 말은 곧 바른 세상을 만드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노력해야 한다는 중요한 개념이자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나 진정 사람들을 위한 나루터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제대로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것 같다. 옛 사람들은 성현의 가르침을 잘 따라서 하는 것으로 백성들이 다 편안하고 세상이 다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세상에 나간 사람들은 그런 교과서적인, 원론적인 생각을 비웃고 세상이나 국민보다는 일신의, 혹은 자신이 속한 당파의 이익에 혈안이 된 경우를 참 많이도 보아왔다.
올해 4월은 정치의 달이 되었다. 이달의 한복판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선거에서는 공자가 말한 대로 나루터를 찾으려는 수많은 정치인들이 각축을 벌였다. 이를 위해 몇 년을 준비한 사람, 몇 달을 준비한 사람... 등등 기간은 다르지만 다들 이 세상에 나가서 말로는 국민들을 위한 정치를 펴보겠다고 애가 타는 선거전을 치러 왔는데, 그동안의 과정을 보면 대체로 이번 선거도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선거 전에 자신들이 속한 당파의 정치적인 이해득실을 따져서 선거법을 고치고 선거방법을 멋대로 요리한 것은 국민들이 다 보아온 바이지만, 선거 과정에서도 코로나19라는 사상 초유의 재난 속에서도 상대방에 대한 마타도어나 허위 사실 유포, 여론 조작, 투표 방해 등 온갖 부정적인 현상들이 그대로 나타난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나라를 어떻게 끌고 가서 국민들이 어떻게 안심하고 잘 살 수 있는지를 밝힌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자리를 내주면 안 된다는 논리만 횡행했기 때문이다.

미국 가수의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라는 노래가 요즈음 식으로 생각하면 바로 나루터를 찾는다는 것과 상통한다고 하겠는데, 이 노래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힘들 때 세상이란 파도를 건너는 다리가 되고 사람들을 태울 배가 되겠다는 것이지만, 그 노래만큼이라도 이번 선거가 위안과 희망을 주지는 못한 것 같다.
선거 결과가 어느 쪽에 유리한지 아닌지를 따질 것 없이,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사람들이라는 바다 위에 띄워진 작은 나룻배임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면 사람들이란 바다는 화가 나면 그 어떤 배도 항해 도중에 뒤엎는 힘이 있고 또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개인이나 어느 당파만을 위한 정치를 하면 그들이 타는 배는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가 없음을 부디 잊지 말아 달라는 당부 아닌 명령을 국민의 이름으로 하고 싶은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