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지난 토요일(6월 26일), 윤동주를 사랑한 일본인 서예가 다나카 유운(1957~2018) 씨의 유품전 개막식을 통해 여러 좋은 분들을 만났다. 특히 허선주, 허봉희, 민아리 님과는 시낭독을 함께 했으며 개막식을 마치고 뒤풀이에 가서도 같은 테이블에 앉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친목을 다졌다. 이날 멀리 대전에서 올라온 남상숙 님도 좋은 벗으로 기억된다. 이분들은 '창작산맥' 회원들로 헤어지면서 내게 <창작산맥> 여름호(2022년, 제40호)를 선물했다. 집에 가지고 와서 읽다가 반가운 이름이 있어 눈이 번쩍 떠졌다. 마츠오카 미도리 (p158~164) 씨와 다음 쪽에 연이어 나오는 야나기하라 야스코 (p165~175) 씨가 그들이다. 오늘은 “어머니의 무언의 가르침”을 쓴 마츠오카 미도리 씨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마츠오카 미도리 씨를 가장 최근에 만난 것은 2018년 2월 18일, 윤동주 추모회 때 함께 시낭송을 했을 때다. 성우라는 직업을 가져서인지 당시 마츠오카 씨의 시낭송은 압도적인 분위기였다. 그런 마츠오카 씨의 부모님이 경성(서울)에서 출생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태어난 곳이 용산 철도병원이라는 사실도 놀랍다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포운장(抱雲莊)은 서예가 다나카 유운(田中佑雲, 1957-2018) 씨가 일본 도치기현 도치기시에 있는 자택에 마련한 작은 서예교실 이름이다. 마흔여덟에 시작한 한글 공부 이후 그는 예순한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13년 동안을 신들린 듯 ‘한글 서예 작품’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예순둘의 나이를 코앞에 둔 12월 13일(2018년), 구름을 감싸 안은 집 ‘포운장(抱雲莊)’에서 조용히 삶을 마감했다. 한글을 사랑하고(한글 서예), 한국인을 사랑하고(윤동주 시인 등), 한국을 사랑(인생 말년을 한국으로 이주해 살기를 꿈꿨던) 일본인 서예가 고 다나카 유운 씨의 4주기를 맞아 어제(25일) 낮 3시, 인천관동갤러리(관장 도다 이쿠코)에서는 <구름의 길, 바람의 길 –윤동주를 사랑한 서예가 다나카 유운 작품전> 전시회 개막식 겸 조촐한 추모회가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한글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운명이라고 해야 좋을 이 한 편의 시와의 만남은 이후 나의 붓글씨 세계를 더욱더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다나카 유운 씨는 한국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이날 개막식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이태룡)는 22일 오전 광복회 서울특별시지부(지부장 이길호)에서 ‘서울출신 3·1독립만세의거 미포상자(학생) 발굴, 포상신청 현황 보고회’를 열었다. 이날 보고회는 광복회 서울특별시지부가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에 의뢰한 연구용역 보고회로 지난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간 서울지역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미포상자(당시 학생)를 발굴하여 포상을 신청하는 연구였다. 이번에 발굴해 포상 신청한 미포상 독립운동가는 경성의학전문학교 3년생 강학룡(姜學龍)·백인제(白麟濟) 등 61명으로 1919년 3월 1일과 3월 5일 경성부(서울) 탑골공원·광화문 등지에서 수만 명의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돼 1919년 8월 4일 예심을 거쳐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8월 실형이나 집행유예 3년이 선고돼 학업이 중단되고, 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 전신)에서 고초를 겪은 학생 출신 독립유공자들이다. 보고회에서는 먼저 61인의 발굴 과정에 참여한 이윤옥·전영복 박사, 임동한 연구원의 설명에 이어 공적 개요를 이태룡 소장이 보고했다. 광복회 서울특별시지부 이길호 지부장은 “일제의 강탈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는 어여쁜 꽃말을 지닌 연보랏빛 비비추꽃이 병원 뜰에 활짝 피어있는 어제(20일) 낮 3시, 여성독립운동가로 유일하게 생존해 계시는 오희옥 지사를 뵈러 서울중앙보훈병원에 다녀왔다. 지난 4월 18일의 면회일로부터 두 달 만에 찾아뵌 오희옥 지사는 그때보다 건강이 다소 안 좋아 보여 가슴이 철렁했다. 함께 한 아드님의 이야기는 그동안 오희옥 지사께서 무릎 통증을 완화시키려는 목적으로 맞은 근육통증 완화 주사 이후 상황이 안 좋아서 근 한 달여간 고생하셨다고 한다. 그러는 바람에 날마다 받던 물리치료를 지난 6주 동안 받지 못했으며, 그 영향인지 오희옥 지사께서는 평소 면회 때와는 달리 휠체어가 아닌 침대에 누운 채로 면회 장소인 병원 로비로 나오셨다. 간병인의 말에 따르면 과거, 기자가 찾아뵙기로 한 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들떠 계시며 기다리다가 휠체어를 타고 병원 로비에서 마주치면 손을 흔들며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었는데 어제는 침대에 누운 채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아직 병실 면회가 재개 되지 않아 병원 로비에서 면회를 해야하는 실정이다. 오희옥 지사께서는 병원 로비에 나오셔서도 한참동안 눈을 감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인 형제,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와 아사카와 노리타카 (1884∼1964)는 누구보다도 한국을 사랑한 사람들이다. 고향인 일본 야마나시에서 떠나와 한국에서 산 형제는 누구보다도 조선문화에 매료되었고 조선인의 진정한 친구였다. 특히 동생 아사카와 다쿠미가 마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조선인들은 서로 그의 상여 메기를 자청했을 정도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지금 망우리공원 묘지에 잠들어 있으며 해마다 한국인들은 그의 ‘조선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그가 죽은 기일에 무덤에서 모여 추모제를 연다. 6월 18일 도쿄 연합뉴스 김호준 특파원 기사에 따르면 “주일한국문화원(원장 공형식)이 한일 우호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는 아사카와 형제 답사 행사를 형제의 고향인 일본 야마나시현에서 18일 열었는데 이를 위해 30명의 정원을 모집한바 있다. 그런데 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412명(일본인 387명·재일 한국인 25명)이 신청해 추첨으로 참가자를 선정했다.”고 문화원 측의 발표를 토대로 보도했다. 아사카와 다쿠미 형제에 대한 한·일 간의 엄청난 관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선정된 30명은 야마나시현 호쿠토시에 있는 아사카와 형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질병은 무엇일까? 질병마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물이나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질병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으리라.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것이 물이요, 음식일진대 말이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질병인 ‘삼킴곤란(연하장애)’이라는 병에 걸려 완치까지의 병상일지 《삼킴곤란(연하장애),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를 쓴 저자 김영조 씨는 이 책의 집필 동기를 “그동안 이와 관련한 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본 책을 베끼거나 의학용어를 남발하는 수준이어서 실제 환자인 나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삼키지 못하는 절망'에서 ’삼키는 기쁨‘의 과정을 적은 이 경험담이 삼킴곤란 환우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뜻에서 이 책을 썼다.”라고 했다. 저자가 책에서 "주치의가 삼킴곤란의 예후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 그 이유를 추정컨대 환자에게 잘못 말했다가는 추궁을 당할 소지가 있기 때문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환자의 처지에서는 자신이 앓고 있는 병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절실했다. 그래서 저자는 병실에서 하루하루의 기록을 써가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책이 《삼킴곤란(연하장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글로 서예 작품 활동을 펼치다가 4년 전 세상을 뜬 일본인 서예가 다나카 유운(田中佑雲:1957-2018) 선생의 작품전이 오는 6월 24일부터 인천관동갤러리(관장 도다 이쿠코)에서 열린다. 다나카 유운 선생은 일제에 의해 살해당한 한국시인 윤동주와 송몽규, 이육사의 시, 그리고 김구의 《백범일지》 속 문장을 한글로 서예 작품화해 온 일본인 서예가다. 그는 일본의 왜곡된 역사관과 근대화 정책을 비판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윤동주, 이육사 등 한국 근대 지성사를 대표하는 시인들과 독립운동가, 사상가들의 언어를 한글 서예 작품으로 승화시켜 작품 활동을 전개해 왔다. 활동 장르와 생존 시대는 달랐지만, 윤리적이면서도 순수 일변도였던 그의 인생 목표와 시심(詩心)과 생애는 윤동주의 그것과도 비슷한 데가 많다. 생시에 실현되지는 못 했지만, 그는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전시회 개최와 한국에의 이주 생활을 꿈꿔오기도 했던 작가로 61살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를 사랑하는 한국내 많은 팬들의 슬픔이 컸다. 다나카 유운 선생의 타계 4주년을 맞아, 인천관동갤러리에서는 그가 남긴 한글 및 일본어 서예작품 15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국 북간도지역에서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을 했던 단체의 활약상을 파악할 수 있는 문건이 처음 공개됐다. 특히, 이 문건에는 그간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지 않은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독립유공자 발굴은 물론 독립운동사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8일 “1930년대 남만주 지역의 최대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정부인 국민부가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북간도로 파견했던 모연대(模捐隊)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를 국내에 처음 공개한다”라고 밝혔다. 간도지역은 당시 한인들이 많이 이주해 살던 곳으로 독립군은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무장투쟁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 등의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이 1920년 간도지역 한인을 대거 학살한 간도참변을 일으키면서 독립군은 지지기반을 잃고 무장투쟁 자금을 직접 마련해야만 했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에도 당시 남만주를 일대로 무장투쟁을 수행하던 국민부*는 설립 직후인 1929년 5월에 북간도에서 친일 부호 등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할 별동대로 모연대를 조직했다. 모연대를 통해 모집된 군자금은 국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월세로 카페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꿈을 물어보면 하나같이 자신의 건물을 갖고 영업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예컨대 1층은 레스토랑 2층은 까페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3층에 수경채소를 기르는 농장(?)을 소유하고 있다면 어떨까? 수경농장에서 재배된 신선하고 청정한 채소를 레스토랑의 재료로 쓴다. 아울러 이러한 채소를 원료로 해서 만든 케잌이나 요리를 레스토랑에서 파는 방식이다. 말만 들어도 흥미롭고 왠지 장사가 잘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이러한 멋진 생각을 실현하고 사람이 일본에 있어 화제다. 요코하마시의 기비카요(吉備カヨ) 사장(56)이 그 주인공이다. 기비카요 사장은 3층의 수경재배 농장에서 10종류 정도의 허브 등 잎채소를 키워 이를 재료로 한 케잌과 요리를 만들어 1층 카페 겸 레스토랑 아이코닉 스테이지에서 판다. 기비카요 사장은 5층 규모의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데 3층을 수경재배 농장(1차 산업)으로 개장하고 2층에서 요리나 과자 등으로 가공하여 (2차 산업) 1층의 매점이나 카페에서 판매(3차 산업)하고 있으며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고 일본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다. 이런 발상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31일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함께 일제강점기 한인애국단*에서 일본군 고위 관료 처단을 위해 군사교육과 의열투쟁을 이끈 안경근ㆍ이덕주ㆍ최흥식 선생을‘6월의 독립운동가’로 꼽았다”라고 밝혔다. * 한인애국단 : 1920년대 중반 이후 독립운동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 침략의 원흉인 일본군 주요 인물을 처단하려고 1931년 김구 선생 주도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결성된 단체 안경근 선생은 안중근 선생의 4촌으로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으며, 1918년 국내에 가족 모두를 남겨두고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선생은 1924년 중국 운남성 곤명의 운남강무학교를 졸업, 만주 정의부에 참가하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도 근무하면서 군사 인재를 양성했다. 1931년 한인애국단에서는 윤봉길의사 의거 이후 일제의 독립유공자 탄압을 피해 김구 선생 신변을 보호했다. 선생은 1926~27년(황포군관학교 교관), 1934년(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황포군관학교 전신)에 걸쳐 조국 독립을 위해 꼭 필요한 군사인재를 양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