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목포에서 승용차를 배에 싣고 하의도로 들어가는 바닷길은 멀었다. 목포를 출발한 배가 중간에 장산도에서 정박하고 다시 출발해서인지 꼬박 2시간이 걸렸다. 김대중(1924~2009) 대통령이 태어난 신안군의 작은 섬 하의도로 가는 길, 선창가에 서서 하얀 포말을 일으키고 달리는 바다를 응시해본다. 지금도 서울에서 목포까지 승용차로 쉬지 않고 달려 5시간, 다시 목포에서 배를 싣고 2시간, 신의도(신의도로 가서 승용차로 가는 방법과 직접 하의도로 가는 배가 있지만 신의도 보다 드물다)에서 다시 승용차로 삽십여분 달려야 갈 수 있는 김대중 대통령 생가, 오지라면 오지다. 신안군의 어지간한 섬에는 목포와 연륙교를 통해 갈 수 있지만 하의도로 들어가는 길은 오직 배편밖에 없다. (신의도와 하의도는 연륙교로 건널 수 있지만 신의도 역시 목포에서 2시간 배로 가야함) 하의도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소규모 염전이 펼쳐져 있었으며 몇몇 염전은 폐염전처럼 보였다. 그런 오지에서 김대중 (제15대대통령, 1999~2003) 대통령은 태어나고 자랐다. 고향에서 중학교 까지 마친 김 대통령은 목포로 나와 1943년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다. 지금보다 더 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물이 있는 습지에 잘 자라는 물봉선화(다른 이름 물봉선), 꽃은 8~9월에 붉은자주색으로 피어난다. 가지의 윗부분에 여러개의 꽃봉우리가 맺혀 작은꽃자루와 꽃대가 자라서 꽃을 피운다. 꽃의 크기는 3cm 정도 되는데 밑부분에 작은 포가 있으며, 꽃받침조각과 꽃잎은 각각 3개씩이다. 줄기와 잎은 봉선화와 다르지만, 꽃의 모양이 봉선화와 비슷하다. 꽃의 색깔은 붉은자주색이 대부분이나, 때로는 흰꽃도 있다. 흰꽃이 피는 것은 흰물봉선이라고 부른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는 우뚝 솟은 산방산이 있고, 산방산에서 남쪽으로 해안가에는 바다로 불쑥 내민 능선이 마치 꿈틀대는 용이 바다를 향해 들어가려는 듯한 언덕이 있는데, 그 언덕이 바다에 면한 곳인 용머리해안과 그 옆으로 황우치해변이 있다. 용머리해안은 용암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경치를 뽐내는 절경으로 평가되어 제주도에서도 중요한 지질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이 해안가는 80만년전 지하에서 솟아오른 용암이 흘러내려 해안가에서 멈춘 것으로 밀물이 빠지면 용머리처럼 솟아오른 해안가를 돌면서 아름다운 경관을 관찰할 수 있다. 반면 밀물 때는 파도에 휩쓸릴 수 있는 위험이 있어 해안 출입이 금지된다. 기자가 찾은 날은 때가 밀물 때인지라 해안가를 돌수 없어서 매우 아쉬웠다. 이곳에는 조선 효종4년(1653) 네델란드 사람 하멜이 선원 64명과 함께 일본으로 가던 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여 가까스로 이곳에 당도하였다. 그들은 난파당한 신세로 28명은 익사하고 36명은 살아남았는데, 배가 파손되어 결국 조선 관원들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양인을 처음 보게된 조선사람들은 그들이 참으로 별난 사람들로 여겨졌다. 그들은 조선 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곤드레는 고려엉겅퀴의 다른 이름이다. 다른 엉겅퀴들은 식용과 약용으로 많이 쓰지만, 곤드레는 식용으로만 쓰인다. 곤드레는 잎과 줄기를 데쳐서 나물로 묻혀서 먹거나 국거리 볶음으로도 요리하여 먹는다. 옛날에는 먹을 것이 없는 강원도 산골사람들이 산과 들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 곤드레를 꺾어서 곡식이 부족한 빈궁기에 밥의 양을 늘리기 위하여 많이 먹었다. 그런데 곤드레는 주로 강원도 산간지방에서 자라기 때문에 다른지역 사람들은 잘 몰랐다. 곤드레는 강원도 일대에서 많이 나는 야생초로 강원도만의 특산나물로 다른 지역에서는 잘 몰라 강원도에 가면 특산나물로 한번은 꼭 먹어야 할 귀한 나물이 되었다. 말린 곤드레나물을 쌀과 함께 넣어 밥을 짓고, 그 밥을 비벼먹으면 곤드레나물밥이 된다. 곤드레는 봄에 싹을 틔워서 5~6월까지는 잎과 줄기가 연하여 따다 데친후 말려서 먹으면 오래토록 즐겨먹을 수 있다. 7월부터는 곤드레가 자라면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키가 자라며 그 높이는 1.0m에 이르는데 잎은 좁은 타원형으로 가장자리는 뾰족해진다. 잎의 끝은 가시같은 작은 털이 돋아난다. 그리고 9월에 되면 가지의 끝마다 꽃을 피우는데 그 꽃은 엉겅퀴와
''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제주도는 깊은바다 속에서 솟아오른 용암들이 솟아올라 땅이 된 곳으로, 한국의 대부분의 지역과는 다르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는 뜨거운 용암이 뭉쳐있다가 압력이 높아지면 지표면 약한 속을 뚫고 솟아올라 품어 오르면 화산이 되는데, 그 솟아오른 화산이 바닷속을 다 채우고도 더 솟아올라 높은 한라산을 이루었다. 한라산 높은 봉우리는 그렇게 이루어진 산이고, 이곳 큰엉 해안경승지는 화산에서 솟아올라 흘러내린 마그마가 뜨거운 수증기를 뿜어내고 굳어져 이루어진 해안이다. 큰엉이란 제주 방언으로 큰 언덕이란 뜻으로 제주의 바닷가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절경을 이룬 곳으로 인정되어 자연문화유산 경승지로 지정되었다. 큰엉 해안경승지는 제주도 서귀포 동쪽으로 10km 정도의 거리에 있으며 약 1.5km에 이르는 해안가인데, 대부분 높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다에 접한 곳에는 작은 바위섬들로 이루어져 파도가 치면 부서진 파도 거품으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큰엉 해안경승지를 탐방하다보면 바닷가를 따라 산책길이 있는데, 군데군데 용암바위구멍들과 갑자기 굳어진 용암덩어리가 입을 벌린 호랑이머리모양, 인디언추장모양 등 다양한 모습을 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양수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서 한강이 되는 곳으로 한자로는 양수리(兩水里), 우리말로는 두물머리다. 두물머리는 말 그대로 두물(남한강, 북한강)이 만나는 곳이라는 뜻으로, 두 물이 만나는 곳에서는 물의 흐름이 느려지기 때문에 물과 함께 내려오던 흙들이 내려앉아 삼각주를 만든다. 그 삼각주의 한편에 연꽃으로 이루어진 세미원 연꽃정원이 있다. 세미원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 농부가 평생동안 연꽃을 심고 가꾸어 탄생한 연꽃정원이다. 세미원은 두물머리 지형을 잘 이용하여 크고 작은 연못들을 만들고 거기에 다양한 연꽃을 심어 볼거리가 다양하다. 여름이면 연꽃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붐비는 편이지만, 더러는 입장료가 비싸다며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한 평생 연꽃정원을 가꾼 사람을 생각한다면, 적지 않은 입장료를 지불하고 관람할 수 있을 만큼의 가치는 충분하다. 이제 연꽃들도 결실의 시기가 되어가고 있다. 얼마 후면 내년을 기약해야 한다. 연꽃이 모두 시들기 전에 날씨도 선선해지고 있으니 한번 발걸음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세미원은 주말에는 찾는 이가 많으므로 비교적 한가한 주중을 권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안반데기'는 '안반덕'의 강릉지방 사투리다. 한국 동쪽 해안의 북에서 남으로 뻗어내린 백두대간의 해발 1,000m를 넘나드는 고산지역 가파른 산등성이에 안반처럼 우묵하면서 넉넉한 지형으로 '편안하고 반듯한 언덕' 이란 뜻이라고 한다. 안반데기는 해발 1,100m 고산지역으로 늘 구름이 안개처럼 피어나는 땅으로 한여름 무더위에 전국이 열대야로 몸살을 앓아도 이곳은 더위를 잊고 사는 곳이다. 이곳에 사람들이 살게된 계기는 한국전쟁이후 땅없는 농민들이 좋은 농지는 고사하고 기댈곳 없던 피난민들이 국유림으로 가득한 이곳에 들어와 오로지 산림에 불을 놓고, 곡괭이와 톱으로 나무를 베어내고 개간하여 화전밭을 만들면서 농경지가 되었다. 이곳은 피덕령을 중심으로 옥녀봉과 고루포기산을 좌우측에 둔 농경지로 그 면적은 195.5ha에 이르며 넓게 펼쳐진 농경지가 마치 독수리 날개모양이다. 남북으로 길게 펼쳐진 안반데기 탐방로는 5.0km가 넘는 먼 거리로 그 폭은 200m 이상이다. 안반데기는 1965년 정부에서 오랫동안 삶을 이어온 경작자들에게 매각하여 산지를 개간한 농민들은 자신 소유의 농지를 갖게 되었다. 해발고도가 높은 지역인지라 이곳만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산하에는 빼어난 곳이면 어느곳이든 정자가 있다. 정자는 굽이쳐 흐르는 계곡이나 강을 낀 언덕이면 자리잡기 딱 좋은 건축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마음을 가다듬고 복잡한 세상사를 잊게하며 사람이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시설로, 한국인의 자연관과 그에 어울리는 건축관을 느껴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런 정자는 수백년전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마을의 유서가 깊은 곳이면 어디나 있었다. 정자는 그 크기가 그 위치에 따라 다양하다. 넓은 곳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에는 큰 정자를 지었고, 호졋한 냇가에 혼자 즐길 수 있는 곳에는 한칸짜리 작은 정자도 지었다. 이런 정자는 오랜 세월 시간과 함께 한국인의 역사를 담은 문화유산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에 두루두루 널리 펼처져있다. 조현숙 사진작가는 수십년 동안 전국의 자연속에 숨어있는 정자와 누각들을 찾아다니면서 사계절 자연의 변화와 함께 변하는 정자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왔다. 전국에 숨어있는 정자들을 목록으로 정리하여 시간나는 대로 찾아다니면서 사진으로 담으면서 남다른 흥분과 환희심도 느꼈다고 한다. 그렇게 오랜세월 담아왔던 사진들 가운데 작가의 마음속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936년 독일은 독재자 히틀러의 세상이었다. 그 무렵 한국은 일제강점기의 정점에 놓여 있었으며 한국인은 희망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일제감점기, 전국의 평야에서 생산된 곡식은 일제를 위한 군량미로 공출되어 정작 농사를 지은 농민들도 하루 3끼조차 먹고 살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청년기 운동선수인 손기정도 배불리 먹을 밥도 없어 굶어가면서 마라톤에 전념하였고, 선수로 뛰는 것조차 공정하지 못하여 어렵게 대표팀에 선발되었으며, 올림픽에서는 쳐다보기도 싫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뛸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여건 속에서 손기정은 혼신의 힘을 다한 결과 당시 마라톤 전구간을 인간 한계라 여기던 2시간 30분의 기록을 깨고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우승하였다. 손기정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하기 전, 한국에서 전국적으로 모인 선수들 대상의 선발전을 거쳐 조선인 대표로 일본으로 갔다. 그리고 일본에서 일본인 선수들과 여러차례 선발전을 거치는 동안 우승하여 출전권을 얻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한국인 손기정 대신 일본선수를 출전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편법의 선발전을 하였다. 하지만 달리는 시간기록으로 선발할 수밖에 없는 마라톤인지라, 대회가 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언듯 보면 화면 전체 호랑이 한마리만 있는 듯 보이지만, 호랑이의 등 뒤 소나무 가지에는 작은 까치가 매달리듯 앉아서 노래하고 있다. 호랑이는 전혀 무섭지도 않고 마치 집에 기르는 고양이처럼 온순하고 다정해 보인다. 이런 호랑이라면 누구나 한마리쯤 옆에 두고 친구처럼 다니면 든든할 듯한 모습이다. 까치호랑이 그림은 조선 후기 백성들의 마음을 표현한 대표적인 그림으로 말쑥한 까치에게 골탕먹는 바보호랑이를 그렸는데, 까치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반가운 새로 사람들이 좋아하였고, 호랑이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맹수로, 호랑이가죽은 액운을 막아주는 호신의 상징으로 귀하게 여겼다. 또한 호랑이는 인간의 삶을 보살피는 산신령의 명령을 따르는 사자로 신령의 복을 받고자 원하는 백성들은 집집마다 실제호랑이가죽은 못걸어도, 이를 대신한 까치호랑이 그림을 그려서 붙였다. 이렇게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호랑이라면 당연히 무섭지 않아야 할 것이고, 영특하기보다는 천진스럽고 바보스러워야 했던 것이다. 현실에서는 무섭기 그지없었던 호랑이를 한국인은 친근한 친구이면서 신령을 따르는 영물로 새롭게 형상화 하였다. 요즈음에 실감나게 그리는 무서운 호랑이그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