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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조선말 최후의 주리학자 양평 이항로선생 유적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북한강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는 조선 후기 위정척사사상으로 몰아쳐 들어오는 서양의 문명에 대항하여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는 유교에 근본을 둔 학자들이 따르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선생이 있었다.  

 

그는 1792년(정조 16)에 태어나 1868년(고종 5)에 세상을 떴는데, 학문에 천재적인 소양이 있었는지 3살에 천자문을 떼고, 6살 때에는 중국의 전체역사를 축약한 《19사략》을 읽고 이를 독후감처럼 쓴 천황지황변(天皇地皇辨)을 지었다. 또 12세에는 '신기령'에게서  《서전(書傳)》을 배우는 등 학문과 역사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그는 16세인 1806년(순조 8) 한성에서 열린 초시에 합격하여 관직의 길에 들어서려 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고관대작들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친근을 종용하자 사사로운 정분을 통하여 관리가 되는 것이 학자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이항로는 이후 한양에서 학문이 높기로 수문난 임로(任魯)와 지평의 이우신(李友信)을 찾아가 학우가 되었고 25~26살 때 부모를 여의고 학문에 더욱 전념하여, 30살이 되어서는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한 청년들이 그의 거처로 모여들었으나 자신만의 학문성취를 위하여 전국의 유명한 절을 찾아다니며 성리학연구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그의 인품이 널리 알려지고 그 소문이 조정에 까지 전해지자 1840년(현종 6)에는 능참봉이나 지방의 수령등이 제수되었으나 이를 모두 사양하였다. 

 

혼란기를 사는 동안 그의 문하에는 구한말 위정척사사상에 동참한 유학자로 의병장이 된 최익현과 김평묵 유증교 등이 찾아와 수학하여 훗날 일본군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이 되었다.  위정척사사상은 올바른 우리의 옛 것을 잘 지키고, 삿된 서양의 것을 배격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조선 말 혼란기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한 유학자들의 사상이었다.

 

1866년(고종 4)에는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의 자격으로 입궐하여 흥선대원군에게 주전론을 건의하기도 하였고 임금과 학문을 논하는 경연관이 되기도 하였으나, 굽히지 않는 성품으로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고 대원군이 철폐한 많은 서원 가운데 명나라 황제(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신 충북 괴산의 화양서원과 그곳에 있는 명나라 황제를 모신 사당인 '만동묘'를 다시 세워줄 것을 요구하는 등 대원군의 정책과 대립이 심하여 이후로는 배척당하였다.  만동묘에는 명나라 황제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을 보내준 의리를 잊으면 안된다고 하여 조선 후기에 세운 사당이다.

 

이항로는 조선말 성리학자 가운데 주리철학의 3대가로 평가 받았는데, 나머지 2인은 호남지방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이다.  이항로 선생의 저서로는  《화서집》, 《화동사합편강목(華東史合編綱目)》 60권,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화서아언(華西雅言)》 12권 이 있으며 세상을 뜬 뒤 임금으로부터 받은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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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