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울을 중심으로 조성된 조선왕릉 가운데 한강을 건넌 김포에는 장릉(章陵)이 있다. 김포장릉은 '정원군'으로 선조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배다른 형인 광해군에 밀려 자신은 왕이 되지는 못하였고, 그의 아들(능양군)이 큰아버지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로 등극하는 바람에 왕의 아버지(대원군) '원종'으로 추존하였으며 그의 무덤 이름도 홍경원이었으나 한참 뒤에 왕릉으로 격상되어 '장릉'이 되었다.
장릉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정원대원군)과 그의 부인인 인헌왕후 구씨가 묻힌 곳이나 함께 묻힌 합장릉이 아니고 봉분이 각각 있는 쌍릉이다. 정자각에서 올려보았을 때 왼쪽이 원종(정원군)의 왕릉이고 오른쪽이 인헌왕후 구씨의 왕비릉이다. '왼쪽에 남자, 오른쪽에는 여자의 자리'로 정해진 유교시대의 위계질서에 따른 봉분의 배치댜.
원종은 1619년 광해군 11년 일찍 세상을 떠나 양주 곡촌리(현재 남양주시 금곡동)에 무덤을 썼고 그 무덤 이름을 '홍경원'으로 불렀다가, 아들인 인조가 왕위에 오른 뒤 1623년 '정원대원군'으로 추존되었고, 그의 부인 연주부부인 구씨가 1626년 세상을 뜨자, 풍수적으로 명당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 정원대원군의 무덤과 멀리 떨어진 이곳 김포 성산에 '육경원'을 조성하였다. 이듬해 정원군의 무덤(홍경원)은 풍수지리적인 문제점이 논란이 되어, 명당터로 판단한 그의 부인이 먼저와 있던 이곳 김포로 이장하면서 합장하였고 무덤의 이름은 홍경원이라 하였다.
그리고 1632년 대신들의 논의를 거쳐 왕자 정원군에서 임금의 아버지인 '정원대원군'으로 추존되자 홍경원은 능의 이름도 그 급을 높여 '장릉'으로 이름을 바꾸고 능의 구성도 또한 왕릉에 맞추어 재실, 정자각을 비롯한 건물도 세우고, 능의 주변에는 왕릉에 합당한 석물들도 새롭게 조성하였다. 김포 장릉은 김포지역의 아름다운 산책길로 많은 시민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그런데 최근 김포시의 도시개발에 따른 아파트 건설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 사적지(史跡地)인 장릉의 문화재보호구역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가 장릉의 문화재적 값어치를 떨어뜨리는 일이 발생하여 지금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