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인의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불교문화는 음악, 무용, 그림, 조각, 건축, 문학 등 종합문화예술로 승화되어 이어져 왔다. 불교는 한국의 옛날 종교로만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삶에 있어서 모든 방면에 깊이 남아 어려운 국난의 시절에는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감싸주는 의지처가 되어왔다. 불교의 상징은 부처님으로 형상화 한 불상이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형상화한 부처님을 건물에 모시고 예불을 드리기도 하고, 건물 밖 상징적인 곳에 세워서 예불을 드리기도 하였는데, 불상을 새기는데는 당대 가장 솜씨좋은 불상조각가들이 최고의 정성으로 조성하였다. 그런 불상이지만 여러 차례 국난과 조선시대의 배불정책에 많이 훼손되기도 하였다. 이번 전시는 불교사진 동우회 인연(印緣)의 제8회 전시회로, 전국의 절과 폐사지를 찾아다니면서 담아온 사진들이다. 전시회에 담겨진 한국의 석불은 한국인의 마음을 담은 종교적 조각상으로, 수많은 전란을 거치면서도 오늘날 남아있는 불상들이다. 우리는 이 불상들을 통하여 우리 옛 조상들의 마음이 그대로 스며있는 모습을 느낄 수 있으며, 한민족의 순수한 마음이 평화적으로 표현된 부처님의 모습을 새롭게 느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누에는 본래 뽕나무 잎을 먹고 자라는 애벌레로, 가을이면 뽕나무 가지에 누에고치를 틀고 번데기가 되어 겨울잠을 자다가, 봄이면 고치를 깨고 나와 나비가 되어 그 뽕나무 잎에 알을 까게 되는데, 그렇게 깨어난 애벌레는 다시 뽕나무잎을 먹고 자라나 가을이면 또 누에고치를 만드는 생을 반복하는 것이 곤충인 누에의 일생이다. 이런 누에삶의 원리를 알게된 사람들은 가을이면 뽕나무 가지에 매달린 누에고치가 아주 가늘고 부드러운 실로 되어있음을 알게 된 뒤 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비단실을 뽑기 위하여 누에를 집안에서 키우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누에는 야생의 뽕나무에서 삶을 살지 못하고, 사람이 사는 집의 방안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누에가 먹는 뽕잎을 부지런히 가져다 먹였다. 누에는 자라는 동안 몇 차례 잠을 자고, 그 잠에서 깰 때마도 허물을 벋고 무럭무럭 자라나고, 다 자란 뒤에는 하얀 애벌레가 노란 번데기가 되어 스스로 누에고치를 틀고 그 안에서 번데기가 된채 깊은 겨울 잠에 들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누에들이 만들어놓은 누에고치들을 모아서 뜨거운 물속에 풀어 실마리를 찾아내어 여러겹으로 꼬아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우리나라에는 예부터 벅수와 장승이 있었다. 지금은 많은 이가 이 벅수와 장승을 혼동하고 있지만 이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벅수’는 주로 마을이나 절 입구에 세워져 있었는데, 밖에서 들어오는 재앙을 막아주었다. 특히 1600년 무렵 중국에서 발생해 조선으로 마구 밀려오는 돌림병과 잡귀들을 막아내기 위해 전설 속의 치우(蚩尤), 용, 또는 장수나 제왕의 표정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조각했고 가슴에는 글씨를 새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승은 역참제도에 의해 생긴 말로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그 역할은 '여기서부터 어디 어디다'라고 하는 표지 기능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유일하게 벅수와 장승 전문가인 황준구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기능의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여)장군이라는 벅수 문화를 ‘망령된 미신 문화’로 취급하며 깎아내렸고, 역참제도의 폐지로 우리 땅에서 사라지고 없는 장승을 다시 찾아내 벅수와 합치며 ‘장승’이 표준말이라고 왜곡했다. 그리고 1912년 언문철자법에 포함시켜 공표하고 교육시켰다.”라며 벅수와 장승은 분명히 다른 것임을 강조한다. 미국 사람으로서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1941년 일본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일제 강점기를 벗어나자 한국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시대 최전선이 되었다. 그 전선의 가장 앞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에는 북한-소련-중공등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한국-미국 등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세계의 나라들이 한국 땅에서 전쟁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때 한국을 지원한 나라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국가인 16개국의 전투병 참여국가들과 전투병은 아니지만 각종 의료와 봉사활동과 원조를 해준 나라들이 있었다. 프랑스는 한국에 전투병과 함께 의료지원을 함께해준 나라로, 1950년 7월 22일 한국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여 1개 대대(전투병1,000여명)를 편성하고, 지원군(400여명)으로 편성한 군대를 파견해 주었다. 이들은 전국의 수많은 격전지에서 전투를 수행하였고, 이곳 홍천에서도 치열한 전투를 치렀는데, "쥴 쟝루이" 소령은 1950년 11월 프랑스 의무대장으로 참전하여 남성리, 지평리, 1037고지 전투 등에 참가하여 많은 부상병들을 치료하였다. 그러던 중 1951년 5월 8일 홍천군 두촌면 장남리 전투에서 지뢰를 밟은 한국장병 2명을 구출하고 철수하던 중 중국군이 매설해 놓은 지뢰를 밟아 순국하고 말았다. 쥴 쟝루이 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국가에는 충(忠)을, 부모에서는 효(孝)를 가장 중요한 삶의 지표로 삼고 살았던 성리학의 시대가 조선시대였다. 국가에 충성한다는 것은 정당한 절차에 따라 임금이 되고, 그가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임금으로서 해야할 바를 다 할 때, 곧 임금 자신의 권세만 누리고 잇권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백성과 나라의 안위를 보살피는데 최선을 다하고, 백성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실천의 의무를 다할 때. 신하와 백성들은 그 임금에게 충성을 해야하는 것이다. 임금의 행실에 대하여 아무런 평가도없이 나라의 안위를 보살피지도 않고 방탕생활을 하면서 백성을 괴롭히는 잘못된 일을 하여도 무조건 따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리학에서는 임금이 그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을 때는 역성 혁명도 가능하다고 맹자의 가르침에 있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임금이면 곧 나라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워 임금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도 그 잘못을 지적하는 간언을 하거나 잘못된 명령에 따르지 않고 관직을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임금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서 충성을 다하고, 그 댓가로 권력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재산을 하사받고 생전에는 물론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는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인도에서 태어난 석가모니부처님이 열반한 뒤 2567년째인 올해는 서기2023년이다. 서기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하는데 견주어 불기는 부처님이 열반한 해를 기준으로 계산한다. 연등회는 1,200여년 전 신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하며, 왕조가 바뀐 고려시대에 가장 화려하게 꽃피었다.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에도 산속의 절에서는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절 주변에 아름다운 등을 달고 부처의 탄생을 축하하고 절을 찾아 각자 마음속에 이루고자하는 소원을 빌었다. 연등회는 고려시대에 국가적 행사로 발전하였는데, 봄철에 실시하는 연등회는 불교가 매우 번영하였던 고려시대에 왕실을 중심으로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하여 다양한 행사를 거행하였으며, 바쁜 농사철임에도, 전국민이 부처님오신날 만큼은 쉬면서 즐겼다. 이때 연등회 행사를 통하여 젊은이들은 절을 찾아 소원을 비는 등공양과 탑돌이를 통하여 인연을 찾기도 하였다. 이런 연등회는 일제강점기 같은 어려운 시대에도 그치지 않았으며, 한국전쟁기에도 행하였다. 한국의 연등회는 서울에서 가장 큰 행사를 거행하는데,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 광장에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으로 유명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부처님을 상징하는 불탑은 불교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조형물이다. 불탑은 처음 인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이세상에 살았던 위대한 사람을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조형물을 만들고, 당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숭배되었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장한 유골을 보관한데서 비롯되었다. 불교경전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 한 뒤에 화장한 결과 그 사리의 양(量)이 8말이나 되었다고 한다. 살아있을 때 주변의 모든 나라의 임금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었던 석가모니였기에, 그가 열반에 들자 장례식에 참석한 강대국 임금들은 화장한 결과 나온 부처님의 많은 사리를 각자 자기들 나라로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하여 다툼이 심하였고 전쟁이 일어날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강대국 임금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살려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타협한 결과, 부처님의 사리는 8개국의 왕국에 공평하게 나누어 가져가게 되었고, 이를 가지고 돌아가 각각 탑을 만들어 마치 살아있는 석가모니를 모시듯 봉안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불탑은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불교가 여러나라로 전파되었고,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자 하는 염원에 따라 많은 양의 사리들이 묻혀있는 불탑을 헐어 부처님의 사리들을 분양하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닷집은 궁궐 정전의 왕좌 위나 절 대웅전 불좌 위 천장에 장식한 집을 부르는 말이다. 그 형태는 다양하여 하늘에 지은 집처럼 보이기도 하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용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이다. 닷집은 부처님이 있는 곳을 극락과 같은 천상의 세계로 상징화하는 것으로, 매우 호화로울뿐 아니라 여러 층으로 만들며 공포장식도 본 건물보다 화려하게 겹쳐올렸다. 닷집은 건축의 양식을 따르지만 이를 만든 장인의 솜씨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발전하고 변화하였다. 이번 전시회는 한국의 다양한 불교전각에 있는 닷집만을 모아서 볼 수 있는 전시회로, 닷집의 화려함에 대한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관람을 추천한다. 본 사진전은 1차 2023년 4월 12일 ~ 4월 18일 부천 아리솔 갤러리, 2차는 2023년 5월 20일 ~ 5월 27일 부천 석왕사 갤러리에서 전시한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복궁의 내전인 임금과 왕비가 생활하는 강녕전과 교태전 뒷편에는 아미산이라 부르는 소박한 정원이 있다. 그 정원의 위쪽에는 사각형 기둥과 육각형 기둥으로 된 조형물이 서있는데 이들은 언뜻 보면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장식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용도는 굴뚝으로 장식은 덤으로 따라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각형 육각형의 조형물은 아궁이-구들방-굴뚝으로 이어지는 방바닥 난방의 최종 목적지인 굴뚝을 이처럼 멋스럽게 꾸민 것이다. 그러니까 강녕전과 교태전에 있는 여러 방의 아궁이에서 지핀 불이 침실의 바닥을 통과한 뒤 뒷마당 아래를 지나서 뒷편 아미산 언덕의 맨 윗쪽까지 올라가 여러 아궁이에서 모인 연기들이 빠져나가게 만든 것이다. 아미산의 굴뚝에는 다양한 나무와 풀들로 구성한 그림들이 각각의 면에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넓은 벽면을 이룬 굴뚝에는 십장생을 주제로 한 그림도 있다. 경복궁의 아미산은 굴뚝을 미적으로 꾸며 마치 궁궐정원처럼 보이게 한 것으로 '굴뚝 하나에도 예술성을 극치로 살린 ' 선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봄이면 꽃들이 만발하여 아름다운 '궁궐정원'으로 경복궁에서도 인기 있는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구례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운 절로 지리산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한국 화엄종의 가장 큰 절이다. 연기조사는 중국이 아닌 인도의 스님이며, 544년은 중국에서도 화엄종이 하나의 종파로 완성되기 이전이다. 그렇다면 이는 신라의 화엄종이 중국에서 발원한 것이 아니고, 인도에서부터 왔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해는 527년 법흥왕때 이차돈이 순교한 때이니 544년은 신라 땅에 불교가 국가에서 승인한지 불과 17년 후의 일이었다. 그러니 불교의 수많은 경전들 가운데서도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화엄사상이 신라 땅에 그리 빨리 들어 왔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도 하다. 또 이곳 구례는 당시 신라땅이었다고 하지만, 백제에 가까운 땅으로 민감한 분쟁지역이기도 하였다. 한편 역사적으로 한국 화엄종의 시조는 토종 원효와 유학파 의상으로 알고 있지만, 이때는 600년 중반을 넘어서다. 원효는 당나라로 유학을 하지 않고도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등 화엄학에 관한 책을 여러권 저술하였고, 의상은 당나라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해동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