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악산 신흥사 통일대불의 전경 ▲ 대불 앞의 전경 ▲ 대불앞의 기도 ▲ 대불의 전면 상세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사철 경치 좋기로 유명한 설악산에는 신흥사가 있다. 신흥사는 652년 신라가 통일하기 이전에 자장율사가 세운사찰로 처음에는 향성사라 했으나, 여러차례 전란으로 불타고, 조선조 1644년 인조 때 다시 세우고 신흥사라고 이름하였다. 설악산으로 가려면 주차장을거쳐신흥사 일주문을 지나고외설악 계곡의 입구에 청동으로 조성한 통일대불을 거쳐야 하므로 많은 등산객들이 드나드는 설악산의명소가 되었다. 통일대불이라 함은 한반도에 동서로 가로놓인 휴전선을 속히 걷어내고 민족의 통일을 기원한다는 뜻이다. 한국은 당연히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지만, 일제강점기를 겪고나서 세계 양대 강국인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에 점령함으로 인하여,한민족이 살고 있는 한반도는 분단되고 말았다. 일제 침략 정책으로한국을 무자비하게 다루고 민족말살을 꾀하던 일본은멀쩡하게 용서받고 통일된 모습이니, 참으로 야속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고착화된 한국의오늘임을 뼈저리게 인식하고,이를 타파하고 통일의 그날을위하여 부처님의 원력을 빌어보자는 뜻으로 세운 것이 바로 이 거
▲ 범종 ▲ 종소리를 듣고서 깨침을 이루라는 싯귀 ▲ 비천상 ▲ 연꽃무니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여기 설악산 신흥사의 범종처럼 대부분의 사찰에 가면 청동으로 주조한 커다란 범종이 있고 그 종을 매달고 보호하는 범종각이 있다. 은은한 종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고 그윽한 산사의 풍경을 더욱 더 멋지게 하지만, 종소리는 단순히 그런 의미로만 치는 것은 아니다. 바위 속에서 캐낸구리 주재료로 니켈 아연등으로 함금하여 용광로에서 함께녹인 쇳물을 밀랍으로 만든 거푸집에한 번에 부어 넣어서 만들어 지는 것으로, 불교의 범종은 서양의 기독교 종처럼 안에 매달린 추가 치는 것이 아니라, 범종의 밖에서 당목으로 힘껏 친다. 그 종소리를 듣고서 과거 현재 미래세의 모든 업장을 소멸하고 깨달음의 진리를 체득하길 바라면서...종의 면에는 종을 만들때 시주한 사람들의 명단도 있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천상도 있고,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한 연화장세계의 상징인 연곷도 있지만, 한 면에는 한시로 표현한 서원이 새겨져 있다. 원차종성편법계;이 종소리 온세계에 두루 퍼져 철위유암실개명:철위산 깊은 곳까지 다 밝아지고 삼도이고파도산: 삼
▲ 부지런한 어부들...해가 뜨기 전부터 항구를 오고 갑니다. ▲ 의상대 위로 떠오르는 해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동해 아름다운 절경을 보여주는 낙산사와 그 안에 있는 의상대! 맑은 날 아침 찬란한 해을 맞이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관세음보살께 소원도 빌어봅니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유산사진작가,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
▲ 대빈묘의 좌측면 ▲ 대빈묘의 정면 ▲ 묘비 ▲ 문인석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서오릉에 한 많은 여인의 묘가 있다. 한때는 왕비였으니 능명을 갖을 수 있었으나, 그녀의 기구한 운명으로 궁녀에서 왕비가 되었다가 왕비에서 다시 폐서인이 되고 결국에는 자신이 사랑하던 왕이 내린 사약을 받고 큰 한을 품은채 죽어갔던 여인의 무덤인 것이다. 그 여인은 다름이 아닌 숙종의 비였던 장희빈(정옥정)이다. 장옥정은 궁녀에 뽑혀서 궁중에서 시녀생활을 하다가 젊은 숙종의 눈에 들었다. 그러나 왕이 왕비보다 궁녀에 불과한 장옥정을 가까이하는 것을 눈치챈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현종의 비)는 장희빈을 궁밖으로 내좇아버렸다. 그런데 궁밖으로 내쳐진지 3년 만에 그녀를 미워하던 명성왕후가 승하하자 숙종은 명성왕후의 탈상이 다음에끝나자옥정을곧바로 다시금 궁으로 불러들여 왕자 '윤'을 낳았다. 그 왕자가 후에 경종이 되었다. 왕자 '윤'은자신을 낳아준 장희빈에 의하여 성불구자가 되었다. 옥정은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고 인경왕후의 뒤에 왕비가 된 인현왕후와 철저한 암투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적인 인현왕후를 어떻게든 밀어내고 자신이 왕비가 되려고 권모술수를 썼고,
▲ 익릉의 전경 ▲ 익릉의 정자각 ▲ 능을 지키는 능지기가 거하는 수복방 ▲ 정자각에서 본 익릉 ▲ 능의 아라에서 본 익릉 ▲ 능의 앞에 도열한 석물들 ▲ 능의 우측에 도열한 망주석 문인석 무인석 석마들 ▲ 능의 좌측에 도열한 망주석 문인석 무인석 석마들 ▲ 능의 앞에서 왕비의 명령을 기다리는 문신 ▲ 능의 앞에서 능을 수호하는 무신(장군) ▲ 익릉의 석수들(석호 석양) 능의 주변을 보호 감시한다. ▲ 익릉 전경 ▲ 능의 뒤에서 본 익릉과 전경 ▲ 능 아래로 내려와서 본 익릉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익릉은 서오릉에 숙종보다 먼저와서 자리한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능이다. 일찍이 11세에왕궁에 들어와 세자빈이 되었고, 13세에 왕비가 되었던 인경왕후는 왕자를 생산하지 못한채 20세 에 삶을 피워보기도 전에 콜레라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가 그리 일찍 세상을 뜨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후기 역사는 또 어찌 펼쳐졌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숙종때 궁녀에서 왕비까지 되었던 장옥정(장희빈)도 없었을것이고, 그녀의 뒤를 이어 제1계비가 된 인현왕후도 없었을 것이며 인현왕후의 시녀로 궁녀가 되었던 최숙빈을 만나지도
▲ 굵은 수도관에 여러개의 수도꼭지가 달려있다. ▲ 수도꼭지에 나무로 마개를 만들어 달아 사용중에는 빼고 사용하고 난 다음에는 막았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로마 폼페이에서 발굴된 청동제 수도꼭지이다. 굵은 수도관의 끝에는 여러개의 수도꼭지가 달려있어 여러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도꼭지는 지금의 수도꼭지처럼나사를 파서 손잡이를 열고 닫을 수 있게 하지는 않았고, 물이 나오는 수전의 윗쪽에 구멍을 내서청동마개를 만들어사용할때만 뚜껑을 빼서 열었다가, 사용을 한 뒤에는 뚜껑을 막아, 물의 허비를 방지했다. 2000년 전에도 이렇게 깨끗한 물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였다. 로마제국의 도시문화와 폼페이전' 2015년 4월 5일까지 전시.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
▲ 홍살문 밖에서 본 명릉의 전경 ▲ 홍살문 안에서 본 명릉의 전경 ▲ 정자각에서 본 능상의 모습 ▲ 능의 아래에서 본 석물들(문인석 무인석 석마 망주석) ▲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 ▲ 문인석 무인석 그리고 망주석 석마 ▲ 장명등 ▲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 주변에 있는 난간석 ▲ 무인석 ▲ 문인석 ▲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 뒤에서 본 전경 ▲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에서 본 인원왕후의 능 ▲ 인원왕후의 능에서 본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 ▲ 인원왕후의 능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서오릉이란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을 중심으로 볼 때 서쪽에 5기의 왕릉이 있다는 뜻으로, 한양의 동쪽에 9기의 능이 있는 곳을 동구릉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인데 그것이 이름이 된 것이다. 이 1600년대 조선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당쟁의 격랑 속에 죽음을 당하였고, 왕비로 살던 사람도 한 사람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런 까닭에 후세들에게는 왕좌를 둘러싼 이야기 거리가 많아 지금에 와서도 드라마의 소재가 되어 서민들에게 안방극장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이미 여러 차례 걸쳐 영화도 되고 드라마도 되었지만, 그 때마다 흥행에 성공하니 영화나
▲ 부조-1. 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 사람의 모습은 측면으로 보인다. 이는 이집트시대 조각기법을 그대로 보여준다. ▲ 부조-2 몸의 형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옷을 입고 오른손에 물건을 들고 있는 모습 ▲ 부조-3 ▲ 부조-4.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로마시대 폼페이에서 발견된 부조 조각상들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바로 어제 만든 것 같다ㅏ.이것들은 신전의 벽면을 장식한 부조로,부조의 기법은 매우 섬세하고 인물의 형태와 머리모양 그리고 옷주름이 매우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도끼와 창을 들고 있어도 무장이었으면 갑옷과 투구등으로 몸을 감쌌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은 신전의 의식에 쓰이는 도구로 보인다. 모두가 오른 손에는 신전의 의식에 쓰이는 물건들을 들고 있고, 얼굴은 모두 측면상을 나타내고 있다. 얼굴이 측면상인 것은 이집트회화에서도 보이는 기법이다. 인물들의머리는 곱슬머리인데 남자도 머리를 자르지 않고 길렀다. 긴 머리를위로 틀어올려 테를 둘러 흘러내리지 않게 묶었으며 묶은 머리의 일부가 뒷쪽으로 흘러내린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발에는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인 모습이 특이하다. 국립중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폼페이 도심지 사람들이 살던 집안이나 신전에 다양한 그림들이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면 중정이나 정원의 벽에 그려진 그림도 있고, 신전의 벽에도 그림이 그려졌다. 그 회화기법은 그리이스에서 완성된 회화기법을 이어받아,벽돌벽면에 회칠로 면고르기를 한 뒤에 밑그림을 그리고 물감으로 색을 칠하는 기법이 많은데 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기법과 유사하다. 그런데 차이점은 고구려 고분벽화는 매우 상징적 생략기법이 많이 사용된 것에 견주어 로마의 그림들은매우 사실적인 형태로 그린그림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와는 대조적이었다. 풍경을 그린 그림도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을 거의 그대로 묘사하였다. 특히 사람의 신체를 그린 그림에서도 이상적인 각부분의 비례와 인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모습에서 완성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이상적 인간의 모습에서 신의 모습을 보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중 2015년 4월 5일까지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 술을 담아 보관하던 그릇들 ▲ 물을 담아 보관하던 그릇들-1 ▲ 물병-2 ▲ 요리용 그릇 ▲ 그릇의 윗부분 장식 ▲ 요리용 그릇 ▲ 다양한 용도의 그릇 ▲ 그릇의 윗부분 ▲ 유리병 ▲ 유리병 ▲ 기타 그릇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로마인들은 다양한 그릇을 사용했다. 당시에는 표면을 반짝이게 빛나게 하는 유약이 개발되지 않아서우리가 보는청자나 백자 같은 자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표면을 보호하는 유약이 칠해져 있었다. 그 도기들의 색은 짙은 밤색이 대부분이지만 흙을 구워서 그대로 쓰지 않고 유약을 칠하여 도기의 표면에서 내부로 내용물이 스며들지 않게 했으며, 높은 온도에 구워 그 강도도 상당히 높였다. 동양에서도 2000년전 그릇이 있었으며 그 대부분은 토기다. 그러나 그 무늬나 모양은 다양하지 않았다. 그런데 로마인들이 사용하던 도기들은 그 형태도 다양하고 장식도 꽤 멋스럽게 되어있는 게 특이하다. 또 당시 로마에는 유리세공술도 매우 발달하였다. 모래를 녹여서 유리를 만들줄 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전시된 유물 중 유리그릇은 크기도 꽤 컷고, 곡선으로 가공한 그릇의아름다움도 놀랄 정도였다. 폼페이 최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