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충단 전경 ▲ 장충단 뒷면 ▲ 장충단 정면 ▲ 장충단 전경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배호의 '안개낀 장충단(奬忠壇)공원'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장충단공원입니다. 그런데 그 '장충단(奬忠壇)'이 무슨 곳인지는 아마도 대부분 잘 알지 못하고 그저 서울 남산의 한 자락에 있는 도시공원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장충단의 설립의미를 알고나면편한 마음으로만 산책 삼아 들르는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장충단은 1900년 고종이 세운 영령들을 위로하고 제사를 지내던 제단인데, 이는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과정에서 함께 목숨을바친 궁궐의 수비대장과 당시 내부대신 이경직을 비롯한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1910년 강제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이 사라진 뒤 일본은 장충단을 폐하고 비석도 파서 멸실시켰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벚나무(사쿠라)를 심고 일본식 공원으로 만들어 장충단공원이라 이름하였지요. 이렇게 제사를 모시던 장충단은 장충단공원이 되어버렸고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많은 사람들은이곳이 단순한 공원인지 알고 찾고 있는 것입니다. 배호의 노래로 '장충단공원'은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요. 하지만, 역사의 숨결은 되살아나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조선은 유교의 한 유파인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았다. 정신이 성리학에 이상을 둔 탓인지, 조선은 건축을 각종 예술품을비롯한 생활도구의 전반적인 가치가 성리학의 정신을 구현하는데 맞추어졌다. 성리학은 사치를 금하고 근검과 절약을 우선하며, 산업은 농업을 위주로 공업과 상업은 천한 것으로 여겼다. 이런 연유로 그릇에 있어서도, 고려가 크고우아하고 귀족적인 청자를 발전시킨 반면 조선은 깨끗한 선비의 이상인 군자를 나타내고자 백자를 들여와 발전시켰다. 그 중에도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수 백자가 있는가 하면, 당시 유행하던 산수화 문인화 각종 길상문과 동물무늬가 있는 아름다운 백자에 산화코발트로 문양을 넣은 청화백자는 궁궐의 그릇들에 많이 사용되었다. 무늬가 없는 순수한 백자는 주로 민간에서 사용되었다. 조선의 청화백자는 경기 광주 분원리의 관요를 설치하여 도자 장인들에 의해서 생산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궁궐에서도 초기에는순수 백자를 사용하다가, 세조대(1445년경까지)에 와서는 채색한 백자들이 사용되었으며, 광주에 분원을 설치한 후(1446년) 1
▲ 신륵사 일주문 ▲ 신륵사 금강문 ▲ 신륵사 전경 ▲ 신륵사 가을전경 ▲ 신륵사 범종루 ▲ 범종루 안의 목어 ▲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승탑 ▲ 나옹화상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 ▲ 신륵사 대웅전 ▲ 대웅보전 앞의 대리석탑 ▲ 대리석 탑에 새겨진 용무늬 ▲ 신륵사 전탑으로 오르는 길 ▲ 신륵사 전탑 ▲ 신륵사 3층석탑 남한강을 맞이하고 있다. ▲ 3층석탑과 참나무 ▲ 남한강에 떠있는 어선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나옹선사는 고려말 고승으로 원나라에 유학하여 인도의 고승 지공에게 공부한 후 그 지공화상을 고려로 모셔와 스승으로 모셨다. 지공은 인도에서 온 그냥 스님이 아니고 석가의 법을 이어 받은 법제자로 108대 법손자로 그의 고려행은 불법의 정통이 고려로 옮겨온다는 것을 뜻한다 인도의 나란다 대학에서 불교공부를 한 지공은 인도에 몰아닥친 이슬람교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고향인 인도를 떠나 중국(원나라)로 왔던 것인데, 그를 알아본 젊은 나옹스님은 그에게 몇 년 불교공부를 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를 자신의 나라인 고려로 모셔왔던 것이다. 인도의 고승이었던 지공화상은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 낙선재 위에 있는 상량정이 보이는 풍경 ▲ 낙선재 마당에서 본 상량정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낙선재는 조선 후기현종이 왕비간택에서 왕비가 되지는 못했지만 간택된 왕비보다 더마음을 주었던 여인을 경빈으로 궁중에 들이고 그녀를 위해서 따로 지어주었던 궁궐안 양반가옥이다. 현종과 경빈김씨의 애틋한 사연을 뒤로하고, 그 이후 구한말 일본 왕실 종친이었던나시모토의 장녀로 태어난 이방자여사가 홀로 만년을보냈던 집으로 우리에게는 친숙하고 또한애틋한 사연이 담겨진 집이다. 이방자여사는 일본이 패망한 후에도일본의 왕족의 대우를 받으며 일본에 살다가, 1965년 남편의 나라인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남편 이은과 함께 귀국하여 한국의 장애인 재활을 위해 헌신하기도 하였다. 이후 남편이었던 영왕(이은)과 왕가의 유물을 보존하는데 헌신하다가, 만년에 병이 깊어 일본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1989년 다시귀국하여 이곳 낙선재에서 지내다 그해 4월에 숨을 거두었다. 한국으로 볼 때에는 격동의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 한 인간으로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고,힘들고 버겁게 살다간 이방자 여사. 그는장애인을 위한헌신적인삶을 살다가숨을 거둘때까지낙선재에 묵었다. 그가 떠난 곳에도
▲ 고달사지중심구역배치도, 광대한 구역에 많은 전각들이 있었을 것으로 발굴조사 되었다. 본래 절의 권역이 사방 30리에 달했다고 하며, 중심구역을 제외하고는 논 밭으로 변했다. ▲ 고달사지의 중심구역 대좌 ▲ 원종대사의 사리탑의 전체모습. 기단부 답신부 상륜부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 아름답기 그지 없다. 이런 사리탑을 조성한 것을 보면 원종대사의 행적이 크고 대단했으리라 짐작하지만, 구체적으로 그의 공적이 무엇인지 알수 없어 궁금증만 더 한다. ▲ 고달사지 승탑(원종대사의 탑과 유사한 형상이나 자세히 보면 다른점이 많다.) ▲ 승탑의 용트림 장식 옆모습원종대사의 승탑에서 200m 더 오르면 있는 승탑이다. 주인을 알 수 없어 안타깝다. ▲ 승탑의 옥개석 덥개돌의 귀꽃장식, 곡선으로 치켜올라간 지붕곡선과 처마끝의 귀꽃이 무척이나 섬세하고 아름답다. ▲ 승탑의 기단을 이루는 부분의 복련장식(업드린 연꽃모양 장식) ▲ 승탑의 기단부를 장식하는 용트림의 용머리장식 ▲ 고달사지 승탑 : 전면에는 배례석까지 놓여있다. ▲ 원종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의 모습(뒷면) 본래 비석의 몸체는 깨어져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 보관전시
▲ 홍살문에서 본 영릉과 정자각 ▲ 영릉의 전경 ▲ 능의 정면에 세워진 장명등(사찰의 석등에서 유래) ▲ 능의 앞에서 호위 중인 무인석과 석마 ▲ 능의 앞에 도열한 문인석과 석마 ▲ 능의 앞에 설치된 혼유석과 장명등 ▲ 능의 주변에 있는 난간석과 석주 ▲ 능의 주변을 지키는 석양과 석호 그리고 곡장 ▲ 능 위에서 내려다 본 대왕의 능과 그 앞의 전경, 명당으로서의 기품이 느껴진다. ▲ 능의 정자각에서 본 능상 ▲ 능 입구에 지어진 세종대왕 기념 전시관 ▲ 영릉의 재실, 대왕의 제사를 지낼 때는 이곳에서 준비한다. ▲ 전시중인 혼천의 ▲ 능 입구에 있는 대왕의 동상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늘 간다 간다 하면서도 어렵사리 이제야 세종대왕릉을 답사하게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비가 올듯 말듯 하더니, 도착하고보니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좀 심난한 듯한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더 많은 비가 내리지 않음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아침 일찍부터부지런히 둘러보았습니다. 한국의 명당 중에 풍수가들이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은 바로세종대왕이 누워계시는 여주 영릉(英陵)입니다. 대왕의 능은 다른 왕들의 능에 비하여 후대에
▲ 광화문 이순신장군 동상 앞에서 아직도 찾지 못한 희생자들을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마음을 함께하는 사람들 ▲ 침묵의 국화꽃 조화를 들고서 하루 종일 광장을 도는 사람 ▲ 희생자의 사진들로 만들어진 펼침막에서 누군가를 찾는 사람 ▲ 어렵게 찾은 사진 위에 리본을 달고 있는 추모객 ▲ 희생자가 친구일까? 그 마음을 달래며 추모의 리본을 달고 있다. ▲ 희생자가 언니일까?그얼굴을 보고 추모의 리본을 달아주고 있다. ▲ 한참만에 찾은 희생자의 사진에 리본을 매달고 있다. ▲ 한 어린이가추모자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 ▲ 300여 희생자의 사진 중에도 가장 많은 추모리본을 받은 희생자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2014년 4월 16일 한국을 온통 슬픔으로 몰아넣은 세월호 침몰사건이 발생한지 11월 1일로200일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진흙 뻘밭에서 암흑의 바다속에 갖힌채 떠돌고 있는 희생자가 9명이나 있다고 하니, 그 시신조차 찾지 못한가족들은 200일이 지나도록 단하루도 잠은 커녕 식음도 전폐하고 있다. 애달픈 일이고 남의 일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자 지금도 광화문광장, 서울시
▲ 미륵불 전경 ▲ 쌍미륵불의 다정한 모습 ▲ 왼쪽 미륵불 ▲ 오른쪽 미륵불 ▲ 쌍미륵불은 주변 나무들로 인해 이끼가 항상 많이 낀다. ▲ 미륵불 앞에서 기도하는 다정한 부부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파주 용미리에는 보물 제93호로 지정된 용암사 쌍미륵석불이 유명한데 그 크기만도 압도 당할만큼규모가 거대하다. 용미리 미륵불은 거대한 자연암벽에 부처님의 몸통과 옷자락을 새기고 머리와 갓은 별도의 바위를 깎아서 얹혔다. 조성시기는 고려시대로 알려져 있으니 천년이 넘은 부처님이다. 유래도 흥미롭다. 고려 13대왕인 선종이 자식이 없어 오래도록 부처님께 기도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그러자 선종은 원신궁주까지 맞이하였으나, 여전히 아들을 얻지 못하였다 . 그러던 어느날 원신궁주가 기도하다 깜박 잠이들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도승이 나타나 자신은 파주 장지산에 사는 사람으로 배가 몹시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서사라졌다는 것이다. 꿈을 깬 궁주는 꿈 이야기를 선종에게 이야기하자,선종 임금은 사람을 시켜서 장지산 주변을 살피게 하였다. 그랬더니이곳 장지산에 지금의 미륵불을 새긴 바위가 있어 그 바위에 원신궁주가 보았다는 두 도승을 새기게하고
▲ 북한산 봉우리들이 보이는 고양시 지축동 흥국사에서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수도권 천년고찰로 이름이 있는 고양시 지축동에 있는 흥국사는 경내는 비록 그지 않고아담하지만 유서깊은 사찰이다. 사찰의 유래에 따르면 661년 신라문무왕때원효대사가 창건하고 그 이름을 흥성암으로 불렀으나 이후 나라를 흥하게 하라는 의미의 기원을 담아흥국사로 변하였다. 흥국사는 전국의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때 폐허가 되었던 것을 이후 중건했는데, 조선조 후기 영조임금이 자신의 생모인 숙빈최씨의 묘인 소령원으로 행차하던 중 이곳에서 하루를 묵었다고 하여 왕의 행차를 모신 사찰이며, 그가 직접쓴 약사전 현판이 지금도 약사전 전면에 붙어있다. 이후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원찰로서 유지되었다. 흥국사에는 약사전에 약사여래불을 비롯한 흥국사극락구품도와 흥국사괘불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건물로는 약사전 나한전등이 경기도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다. 가는 길은 구파발 전철역에 내려서 의정부 방면으로 가는 버스나 북한산성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쉽게 갈 수 있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 가을이 물들어가는 불암산 바위 아래 석천암이 자리하고 있다. ▲ 부처님 형상이 있다는 불암산 산마루 ▲ 불암산 바위에 기댄 석천암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푸르고 무성하던 잎들이 차츰 제 색을 잃어가고 있지만, 또 다른 색으로 옷을 입은 듯 아름답다. 무상함을 불가에서는 제행무상이라 한다. 결코 그 어느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이 현상계의 진리이고, 그렇기 때문에 한시도 게으르지 말고 정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름 푸르름과 더위에 지칠 때에는 언제 가을이 올까 싶었지만, 찬이슬과 서리를 한 번만 맞고보면 푸른 잎도 금새 퇴색되고 낙엽이 되어 앙상한 가지만 남긴다. 하지만 그 모습 또한 생명있는 존재의 또 하나의 모습이므로 그대로 반갑게 맞이하고, 얼마 있으면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리라. 불암산 산마루에는 파란 가을하늘과 울긋불긋 단풍진 나뭇잎이 보이고, 물들어가는 나뭇잎사이로 여전히 푸른 소나무도 보인다. 겨울에도 꼿꼿한 푸른 소나무는 세파에변치않는 지조로 여겨 옛 사람들은 몹시 아꼈다. 불암산산마루에는 크고 우람하게들어난 바위의 모습이 있는데 바위가 마치 부처님 모습과 같다하여 불암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