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기자]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화려했던 시절을 잊은채 또 다시 그때를 그리면서 겨울을 지새는 연입니다. ▲ 앙상한 줄기에 커다란 연밥을 이고 서있는 겨울을 지새는 연.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포토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
[그린경제/얼레빗=삿포로 최우성 기자] 눈이 많이 오는 북해도에는 겨울이면 눈세상이 된다. 정말 눈 구경 실컷 한다. 그런데도 자동차는 체인도 없이 다녀서 희한하다 생각되었다! 무슨 비밀이 있는지 알아보니 자동차는 모두가 4륜구동이고 원적외선이 방출되는 스노타이어를 달았단다. 체인도 없이 마음껏 달리는 삿포로의 거리풍경이 무척 신기해 보였다
▲ 의상대사의 지팡이라는 설과 신라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가 심은 은행나무라는 설이 있는 용문사 은행나무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양평군 용문면에 있는 용문사에는 사찰내 그 어느 것 보다도 오래된 주인이 바로 이 은행나무다. 높이 60m 몸둘레 4m 공식수령 1110년이 넘는 동양 최대의 거목 은행나무다.. 신라 의상대사(625~705)가 자신의 지팡이를 꽂았는데 그 지팡이에서 뿌리가 뻗어 가적처럼 살아나 이렇게 거목이 되었다는 설과, 나라잃은 서러움에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927~935)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다가 심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그 연유야 어찌 되었건 용문사 은행나무는 이미 1000년을 훌쩍 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봄이면 회춘하여지금도 수없이 많은 열매들을 맺혀서 중생들을 살피고 있다. 또 그동안 절의 건물들과 모셔진 불상들은 전란과 탄압에 생몰을 여러차례 하는 동안다 바뀌었지만 이 은행나무만은 건재하고 있으며, 또한 건강하기 이를데 없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에도 정3품 당상관 벼슬까지 받았으니 용문사의 주인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이제는 신목의 경지오 오른 용문사 은행나무도 겨울이 깊어지니 잎은 다 지고
▲ 요지연도 8폭 병풍전설의 서쪽에 사는 서왕모가 잔치를 베풀자 천하의 신선들이 모여드는 장면을 그린 그림 ▲ 하늘에서는 구름과 학을 타고 바다에서는 파도를 타고 서왕모를 찾아 간다. ▲ 지상에는 천도복숭아가 탐스럽게 열려있고 소나무가 멋지게 자라난 성안에 잔치상를 차려놓고 신선들이 하늘에서 날아온다. ▲ 서왕모가 자리를 찾이하고 있는 중앙에는 육로로 온 신선들이 타고온 말들과 하늘을 날아온 학들이 있고 주변에는 천도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사이에는 폭포수가 흐르고 산위에는 소나무가 자라며 동쪽에서 오는 신선은 사슴을 타고 온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요지연도를 카메라로 담은 사진이다. 요지연도는 한국의 도교문화전이 열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담아온 것으로 서쪽에 거대한 산인 곤륜산에 살고 있다는 서왕모가 지상의 신선을 모아놓고 잔치를 연다는 주제를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무척 생동감이 넘치는 그림으로 도교의 이상향인 곤륜산에서 서왕모가 잔치를 베풀고자 방을 붙이자 세상의 신선들이 모여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세상의 신선들은 말, 사슴을 타거나 학을 타고 날아오거나 파도를 타고서 모여든다. 서쪽은 선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남쪽에서 7번 국도를 타고 길을 가다가 아름다운 경관에 발길을 멈춰야 하는 곳. 바로 강원도 고성군 공현진 옵바위입니다. 바위 사이로 떠오르는 해돋이가 장관입니다. 구름이 살짝 해를 가려 수줍은 새악시 같아 보입니다.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한국인의 삶 속에 깊이 간직된 도교문화전이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실에 전시중이다. 전시물중 백제금동대향로를 통해 본 한국의 도교문화 일면을 살펴본다. 백제 사비성이 함락되는날 !! 후세에 백제의 세련된 문화를 전하기 위하여 물이 흐르는 절의 도랑에 파 묻혔던 비운의 향로!! 향로라 함은 부처님전에 향을 사르면서 예의를 갖추고 불타의 가피를 소원하기 위하여 향을 피우는 그릇이다. 따라서 향대를 꼽을 수 있도록 흙이나 모래를 담은 화로만 있으면 되는 것이고, 대부분의 경우 거기에 머물러 있다. 중국의 고대문물 중에도 크나큰 향로가 청동기 문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많이 있다.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최후의 결전을 하다가 힘의 부족으로 결국 나라가 망하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 귀중한 향로를 도랑바닦에 묻을수밖에 없었던 백제스님의 심정은 얼마나 허전하고 아렸을지 짐작해본다.. 그가 믿고 의지하던 부처님 마져도 원망하고픈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로부터 1300년이 훌적 흐른 뒤에 신화가 되살아나듯 운명처럼 우리앞에 나타나 백제의 공속공예술의 최고봉으로 아름다움에 대
▲ 유비 관우 장비상관우는 관성제군으로 재물을 지켜주는 신으로 모셔짐 ▲ 조선시대, 해와 달이 그려진 관모를 쓴 성황신 ▲ 유비 관우 장비가 그려진 그림관우는 산시성에서 관성제군으로 모셔진후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에도 전파됨 ▲ 하늘의 별을 사람으로 형상화한 칠성도 가운데 중심상은 치성광 여래 ▲ 고구려. 새를 탄 신선 ▲ 조선시대. 김홍도의 군선도 하선고, 남채화 장과로 한산자 노자 동방삭 문창 종리권 여동빈 이철등이 그려져있다. ▲ 장수의 상징 수노인( 이마가 무척이나 길다.) ▲ 학문의 신 문창제군 ▲ 팔신선의 하나인 여동빈 검법의 대가로 알려져 칼을 들고 있다.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한국인의 삶 속에 깊이 간직된 도교문화전이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실에 전시중이다. 도교문화는 한국의 토착 자연사상인 신선사상과 결합하여 계승 발전하였는데, 자연물 숭배사상으로 하늘 땅 해 달 바위 거북에 대한 숭배사상으로도 이어져왔다.토착사상인 자연물 숭배와 신선사상에 중국에서 들어온 체계화된 도교가 결합하여 한국인의 삶 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으나, 조선시대 유교의 성리학에 몰려 깊숙히 내재된 채로 우리의 삶 속에 살
남쪽의 신 주직 중국 서위시대 도교의 사면상 고려시대 향로(상상의 동물 기린으로 조성됨) 도교의 존상 신선세계의 영약천도복숭아형 연적 서왕모를 위해 방아를 찧는토끼와 두꺼비와 계수나무 산모양의 연적 산위에 누각도 있다. 낙양출토 박산향로 한나라 시대 신선이 마시는술단지 조선시대, 신선과 십장생이 그려진 노리개 고려시대 청자. 당나라 하지장의 시가 새겨진 조롱박형 청자 조선새대, 십장생이 그려진 화로 [그린경제, 얼레빗 = 최우성 기자] 한국인의 삶 속에 깊이 간직된 도교문화전이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실에 전시중이다. 도교문화는 한국의 토착 자연사상인 신선사상과 결합하여 계승 발전하였는데, 자연물 숭배사상으로 하늘 땅 해 달 바위 거북에 대한 숭배사상으로도 이어져왔다.토착사상인 자연물 숭배와 신선사상에 중국에서 들어온 체계화된 도교가 결합하여 한국인의 삶 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으나, 조선시대 유교의 성리학에 몰려 깊숙히 내재된 채로 우리의 삶 속에 살아남아있다. 삼천갑자 동방삭, 신이된 남자 노자(태상노군) 외에도유명한 8명의신선들. 재물을 관장하는 신(관성제군) ,학문을 관장하는 신(문창제군) ,수명을 관장하
▲ 필리핀군 참전비 전경 ▲ 참전비 ▲ 동상 세부 ▲ 동상세부 ▲ 동상세부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기자] 1950년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필리핀군의 참전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통일로변에 있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포토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 모덕사 앞 호수에서 본 전경 ▲ 모덕사들머리 안내판 ▲ 최익현 선생이 사시던 집 ▲ 최익현 선생을 모신 전각(현판=성충대의),후학들이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방문하였다. ▲ 영정 앞에서 분향 ▲ 재배 ▲ 최익현 선생의 영정 ▲ 영정 세부 ▲ 최익현선생 가족 사당과 삼문 ▲ 사당 ▲ 최익현 선생 생전 모습 생전에 쓰시던 붓 생전의 갓과 망건 면암 최익현 선생은 1833년 경주 최씨문중의 자손으로포천에서 태어나 21살인 185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당시 실권자인대원군의 시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제주도로 유배를 당하였고, 그뒤 정부 관료가 되어 관직생활을 두루 역임하였다. 선생은 일본이 침략의 근거로 삼기 위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자1875년에는 병자수호조약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조약의 상사를 반대하여 도끼를 짊어지고 상소하다가 흑산도로 유배당했다. 1895년 단발령이 발표되자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렸으며 그 뒤 1905년 소위 을사 5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화와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등 을사 5적(五賊) 처단을 주장한 청토오적소(晴討五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