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1월 30일 무등산국립공원동부사무소는 “봄의 전령사 복수초, 무등산에서 첫 개화”라는 보도자료를 냈고. 2월 2일에는 국립산림과학원이 “띵동! 봄소식 전하는 복수초가 왔어요”라는 이름의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복수초’라 함은 언뜻 들으면 이 예쁜 꽃에 웬 원한이 있다고 ‘복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원한을 갚는 복수(復讐)가 아니라 복수(福壽) 곧 복과 목숨을 뜻하는 것으로 일본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을 그대로 따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수초를 요즘은 ‘얼음새꽃’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매화보다도 더 일찍 눈을 뚫고 꽃소식을 전하는 얼음새꽃이지요. 예쁜 우리말 이름을 놔두고 일본식을 따라 부르는 것으로 큰개불알꽃(봄까치꽃), 개불알꽃(복주머니난), 며느리밑씻개(가시덩굴여뀌) 따위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오랫동안 써왔으니까 그대로 불러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말로 된 예쁜 꽃이름을 놔두고 일본말을 굳이 쓰려는 것은 민족의식이 없는 탓일 것입니다. “모진 겨울의 껍질을 뚫고 나온 / 핏기 어린 꽃의 날갯짓을 봐 / 햇살 한 모금에 터지는 신(神)의 웃음을” 한현수 시인은 얼음새꽃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봄이 드는 날(立春) - 박목철 봄이 든다는데 버들강아지 움이나 틔웠는지 아지랑이 일 듯 나비도 날고, 꽃도 피고 그리움도 나른한 하품 하네 겨울이 눈 흘기니 봄은 살며시 가슴에 숨었다. 오늘은 갑진년 '봄이 드는 날 곧' 입춘(入春)입니다. 개울에 지천으로 널려있던 버들강아지도 겨울 눈 고깔을 벗고 고운 모습으로 기지개를 켜는 계절이려나요? 예전에는 변변한 장난감이 없어 산과 들에서 구한 재료로 장난감이나 놀이도구를 만들어 썼었습니다. 그래서 탱탱하게 물오른 버들가지를 꺾어 상처가 나지 않도록 비틀어 쏙 빼면 나무와 껍질이 나누어집니다. 이것의 양 끝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한쪽에 칼로 살짝 깎아내고 불면 봄을 부르는 멋진 버들피리가 되었지요. 버들피리뿐이 아니었습니다. 풀피리, 파피리, 보리피리처럼 소리 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악기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 속에 파묻혀 삽니다. 심지어 전철에서 어른들도 책을 손에 든 사람은 없고, 손말틀(모바일) 게임 삼매경입니다. 버들피리 불기도 순박한 놀이 곧 추억의 말뚝박기 등도 이젠 지나간 추억거리에 지나지 않지요. 어쩌면 이제 세상은 순박한 버들피리를 잃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2월 기축 초하루. 거란의 병사들이 구주(龜州)를 지나가자 강감찬 등이 동쪽 교외에서 마주하여 싸웠으나 양쪽 진영이 서로 대치하며 승패가 나지 않았다. 이때 김종현이 병사들을 이끌고 도달하였는데, 홀연히 비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와 깃발들이 북쪽을 향해 휘날렸다. 아군이 그 기세를 타고 분발하여 공격하니, 용맹한 기운이 배가 되었다. 거란군이 북쪽으로 달아나자 아군이 그 뒤를 쫓아가서 공격하였는데,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기까지 쓰러진 시체가 들을 가득 채우고, 노획한 포로ㆍ말ㆍ낙타ㆍ갑옷ㆍ투구ㆍ병장기는 이루 다 셀 수가 없었으며, 살아서 돌아간 적군은 겨우 수천 인에 불과하였다.” 이는 조선 전기 문신 김종서 외 28인이 고려시대 전반을 편년체로 정리한 역사서 《고려사절요》 1019년 2월 1일(음)의 기록으로 강감찬ㆍ김종현 등이 귀주에서 거란군에 대승을 거두었다는 내용입니다. 요즈음 KBS2TV는 매주 토ㆍ일요일 밤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을 방영하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관용의 지도력으로 고려를 하나로 모아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려의 황제 현종과 그의 정치 스승이자 고려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17년 <대립군>이란 이름의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영화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어린 ‘광해’(여진구)에게 조정을 나눈 ‘분조’를 맡기고 의주로 피란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임금 대신 의병을 모아 전쟁에 맞서기 위해 머나먼 강계로 떠난 광해와 분조 일행은 남의 군역을 대신하며 먹고 사는 ‘대립군’들을 호위병으로 끌고 가다가 벌어지는 사건을 다뤘습니다. 그런데 《현종실록》 4년(1663년) 11월 27일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도 나옵니다. “영동 재해 지역 중에서도 강릉과 양양이 심합니다. 두 고을 기병이 지금 당번이오나 옷과 물품이 허술해 얼어 죽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니 번 서는 것을 한 달 감해 주고 쓰고 남은 군포로 품팔이에게 대립시키는 것이 편할 듯합니다” 이는 16부터 60살까지의 양인 남성이 수시로 군사훈련을 받다가 유사시 동원되었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병역의 의무를 군역이라고 하는데 포목을 내면 면제받았으며, 이를 군포라고 불렀습니다. 군포는 균역법이 시행되기 전까지 한 해에 2필이었으니 이는 반년 치 식비 정도였다고 하지요. 영조 임금 때 균역법이 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재청은 지난해 12월 22일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에 있는 <하동 칠불사 아자방 온돌>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칠불사의 ‘아자방(亞字房)’으로 불리는 독특한 형태의 선방(禪房)은 스님들이 벽을 향해 수행할 수 있도록 방 안 네 귀퉁이를 바닥 면보다 한 단 높게 구성함으로써 ‘亞’자 모양의 아자형(亞字型) 방 전체에 구들을 놓아 만든 온돌방인데 한 번 불을 지피면 온돌과 벽면의 온기가 100일 동안 지속된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아자방 온돌은 신라 때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며, 2017년 진행된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고려시대의 유물인 기와 조각, 기단석(基壇石, 건축물이나 비석 따위의 기초로 쌓는 돌), 확돌(홈이 파여 있는 돌, 아궁이 문을 고정하는 용도) 등과 함께 기타 여러 기록 자료에 따라 아자방 온돌은 선종사찰(禪宗寺刹)의 선방으로서 그 기능을 유지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옛 선비들이 지리산을 여행하고 남긴 각종 지리산 유람록, 일제강점기 발행됐던 신문 기사 등 당시의 자료들을 통해서도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지요. 칠불사(七佛寺)는 지리산 반야봉 남쪽 자락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올해는 푸른 용의 해 갑진년입니다. 용의 해를 맞아 찾아볼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국보 <청자 어룡모양 주전자>도 있습니다. 이 주전자는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 무렵 빚어진 것으로 높이 24.4cm, 밑지름 10.3cm의 크기인데 용의 머리 모양을 한 부리에 물고기의 몸을 가진 특이한 형태의 동물 모양이지요. 이빨과 지느러미, 꼬리 끝에는 백토(白土)를 발랐는데 얼굴의 털이나 지느러미들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주전자 몸체에는 비늘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었으며, 가운데 부분에는 앞뒤로 커다란 갈퀴 모양의 옆지느러미가 묘사되었습니다. 연꽃 줄기 무늬의 손잡이는 주전자의 몸체 위로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고, 뚜껑은 물고기의 꼬리 부분을 본떠서 만들었지요. 전체적인 형태를 보면 기이하면서도 각 부위를 갖춘 용과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비취빛을 띠는 유약색과 더불어 지느러미와 꽃무늬로 드러나는 세밀한 오목새김(음각) 표현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따라서 이 청자 어룡모양 주전자는 고려청자 장인의 창의적인 미적 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세련되고 능숙한 청자 제작 수준을 보여주는 공예품으로 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1월 17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 쪽샘 44호분 발굴조사 성과를 누구나 알기 쉽게 이해하기 위해 제작한 8종의 삽화를 공개했습니다. 쪽샘 44호분은 1,550년 전 만들어진 신라 무덤으로, 무덤에서 출토된 꾸미개(장신구) 등의 유물을 연구해 주인을 신라 공주로 추정하였지요. 당시 쪽샘 44호분에 붙인 사람의 머리모양을 추정할 수 있는 머리카락과 꾸미개, 바둑돌 860여 점, 철제바늘 30여 점, 화장이나 헌화의 용도로 활용되는 홍화(紅花) 꽃가루 등을 확인한 주요 성과를 지난해 7월 공개하면서 큰 관심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이번에 공개한 삽화는 금동관을 쓰고 가슴걸이 등 꾸미개를 찬 모습과 말을 타거나 저승으로 향하는 모습, 바느질하거나 바둑을 두거나 화장하는 모습 등을 담은 모두 8종으로, 발굴조사와 연구를 통해 확인한 출토 유물들의 특징과 신라의 장례식 모습까지 담아 시각적으로 섬세하게 표현했지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신라 공주와 공주 무덤 삽화 제작ㆍ공개를 통해 어렵게만 느껴졌던 발굴조사와 고고학, 고대사(古代史) 등 전문 분야에 관한 관심과 이해를 높이고, 국가유산을 활용한 문화사업 활성화에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인천감리서 주사 조광희가 덕률풍으로 전해 오기를 영국군함 5척, 러시아군함 1척, 미국군함 1척이 닻을 내리고 머물러 있었는데, 육지로 상륙하였던 영국 병사가 금일 아침 10시에 승선하여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는 《외무아문일기》 1898년 1월 24일 치 기록입니다. 여기서 ‘덕률풍(德律風)’이란 전화기의 영어 말인 ‘텔레폰’을 한자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덕진풍(德眞風)’, ‘다리풍(爹釐風)’ 등과 어화통(語話筒), 전어통(전어통) 등으로도 불렀다고 합니다. 그 뒤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에 보면 1895년 통신국의 사무를 전하면서 일본서 만든 말인 “전화(電話)”를 썼고, 이후 이 말로 굳어졌습니다. 따라서 위 기록은 전화기를 처음 사용한 기록으로 보입니다. 조선에 처음 들어온 전화기는 1882년 청나라에 전기 기술을 배우러 갔던 유학생 ‘상운’이 가져온 것이라 하지요. 이로부터 14년이 흐른 뒤인 1896년에야 덕수궁 안에 전화기가 설치됐습니다. 고종은 당시 이 전화를 적극 이용했는데 특히 동구릉에 있는 대비 조씨의 무덤에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해 문안을 드릴 정도였지요. 또 고종은 신하들이 친러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나라 건축물에는 아름다움을 더하기 위한 여러 가지 기법을 썼는데, 흘림, 귀솟음, 안쏠림 따위가 그것입니다. 먼저 흘림을 보면 기둥의 굵기를 밑동에서 꼭대기까지 조금씩 달라지게 하는 것인데 민흘림과 배흘림이 있습니다. 민흘림은 기둥의 위쪽이 아래쪽보다 작게 마름된 기둥으로, 둥근기둥에 주로 사용하는데, 해인사 응진전, 화엄사 각황전 따위가 그 예지요. 배흘림기둥은 흔히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의 기둥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드는데, 기둥의 가운데 부분이나 아래에서 3/1 지점이 다른 부분보다 볼록하게 배불러 있는 기둥입니다. 배흘림도 주로 원통형 기둥에 쓰는 것으로 이 배흘림 기법은 아래위를 같은 굵기로 기둥을 세웠을 때, 기둥의 중간 부분이 윗부분이나 아래보다 가늘어 보이는 착시현상을 교정해 주는 효과를 거둔다고 합니다. 배흘림 기법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도 등장할 만큼 우리나라도 오래전부터 써왔는데 부석사 말고도 무위사 극락전(無爲寺極樂殿), 화엄사 대웅전(華嚴寺大雄殿), 강릉객사문(江陵客舍門) 따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전통 건축물에서 이러한 착시 보정효과를 거두기 위해 적용된 기법으로 귀솟음과 안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는 국가등록문화재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가 있습니다. 《조선요리제법》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교수인 방신영(方信榮, 1890~1977)이 우리 음식 조리법을 집대성하여 쓴 근대식 조리법에 관한 책입니다. 1917년에 처음 펴낸 이 책은 1962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45년에 걸쳐 34판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올리며 꾸준히 인기를 얻은 책입니다. 방신영은 음식 솜씨가 뛰어난 어머니에게 16살 때부터 음식을 배우고 조리법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13년부터 출판을 위한 집필을 시작하여 1917년 《만가필비 조선요리제법(萬家必備 朝鮮料理製法)》이라는 책을 펴낸 것이지요. 초판에는 어머니께 배운 전통 음식을 바탕으로 조선 요리와 외국 요리 만드는 법을 수록했습니다. 책에는 요리용어의 해석, 중량비교, 음식저장법 등이 실려 있고, 식품저장의 원리와 남은 음식, 상한 음식의 처리, 해독에 관한 내용은 물론 분량이 적지만 외국요리도 소개되었지요. 이 책은 구전으로 이어지던 우리 음식의 제조법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요리서로 재료의 분량을 계량화하여 소개하는 등 과학적이고 능률적으로 우리 전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