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억대 전 재산 처분 후 만주서 항일 독립운동 임정 국무령 역임 "나라를 찾기전까지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이장말라…" 유언 남겨 아들은 일제 변절강요에 '수치' 자결…가문 풍비박산 후손들 고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이장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긴 안동 유림의 거목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대통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1858~1932) 선생이 태어난 경북 안동의 임청각(보물 제182호)을 찾아 간 날은 5월 중순인데도 30도에 육박하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그런데 임청각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입구)가 왜 이리 복잡할까? 낙동강을 따라 난 육사로에서 법흥교와 맞닿은 법흥6거리를 지나자 왼쪽으로 ‘임청각’이란 안내판이 보이지만 철도길이 놓여 있어 쉽게 접근할 길을 찾지 못해 전화 통화 뒤에서야 겨우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임청각, 일제의 흉계에 의해 훼손되다 그 까닭을 확인하니 일제강점기 일제의 흉계에 의한 결과물이었다. 일제는 중앙선 철도를 놓으면서 항일투사의 집을 아예 없애려 했다. 그러나 여론이 좋지 않자 집 몇 채를 허물고 마당으로 철길을 내버린 것이다. 철길이란 보
논밭 나눠주고 세금 내 준 '위선최락(爲善最樂)' 실천 소작인들이 세워 준 철비(鐵碑) 공덕비 나눔의 삶 상징 일제 땐 사숙(私塾) '대흥사', 625후엔 숱한 인재배출 산실 ▲ 선정훈 종택의 종부 김정옥 여사 [그린경제=김영조 문화전문기자]아유, 자그마치 집이 134칸이나 된데.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에 사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굴까? 충북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154에 있는 선정훈 종택을 보고 하는 말들이다. 사람들은 그저 그 크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 종가 사람들의 큰 가슴은 보지 못한다. 그 큰 가슴을 가늠해보려고 선정훈 종가를 찾은 것은 5월 초의 화창한 봄날이었다. 명산 속리산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오다 작은 섬을 만든 이곳에 집을 지은 선정훈 종택. 흔히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물을 피해서 짓는다 했던가? 그러나 이 선정훈 종가는 물이 돌아 흐르는 섬 위에 지어졌다. 미리 연락한 덕에 종부 김정옥 여사(61)는 단아한 한복 차림으로 기자를 맞는다. 안채 대청에는 오래된 집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형용할 수 없는 그윽한 향기가 느껴졌는데 활짝 열어 놓은 대청문 너머에는 푸른 잔디가 깔린 널찍한 안뜰이 시야에 들어 왔다. ▲
▲ 9대 종부로 운조루를 지키고 있는 이길순 할머니 [그린경제=김영조 문화전문기자]굴뚝을 섬돌 밑으로 내어라. 그래서 밥 짓는 연기가 멀리서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쌀이 없어 밥을 지을 수 없는 사람에겐 밥 짓는 연기만 보여도 속상할 수 있느니. 위는 양식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 말로 구례 운조루(전남 구례군 토지면 운조루길 59 (오미리))를 지은 문화 류씨 류이주(1726~1797) 선생이 235년 전에 한 말이다. 굴뚝은 원래 불을 땔 때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만든 구조물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연기가 잘 빠져나가도록 하늘을 올려다보게 굴뚝을 만드는 게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굴뚝을 섬돌 밑으로 가게 하라니 이 무슨 말이던가? 요즘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기는커녕 어떻게든 가난한 이들의 쌀 한 톨까지 빼앗으려 안달한다. 재벌기업이 골목상권까지 모조리 휩쓸어 사회문제로까지 부각되어 결국은 나라에서 나서게까지 되었다. 이런 세태에 우리는 운조루 정신을 되새겨봄직하다. ▲ 섬돌 밑을 기게 한 운조루만의 굴뚝 ▲ 아무나 퍼갈 수 있게 한 타인능해 쌀뒤주 굴뚝뿐만이 아니다. 운조루에는 아주 희귀한 쌀뒤주가 있는 데 他人能解(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