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도시에 살다 보면 인구감소니 인구위기론 같은 말이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아침 출근시간의 교통지옥 속에 사는 사람들은 더더욱 실감나지 않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나 이웃나라 일본에 바로 그 심각한 문제를 다룬 기사들이 앞 다투어 나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특히 중앙공론 2014년 6월호 등에는 이러한 인구감소가 예견되는 시정촌(市町村, 우리의 시읍면) 523곳을 발표하여 일본사회를 공포로 몰아넣기도 했다. 홍수 같은 물난리가 아니라 인구가 빠져나가 도시가 폐허화 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일본은 이미 중소도시의 인구감소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그 대책을 위한 작업에 머리를 모으고 있다. 그러나 대책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 골칫거리다. 그러한 가운데 지역의 기업가를 응원하는 미디어인 Future League 지에 실린 이케다하야토 씨의 기고문이 눈길을 끈다. 이케다 씨는 오랜 기간 북적대는 동경에 살다가 은퇴 후 조용한 삶을 보내고자 동경에서 머나먼 고치현(高知)으로 이사했다. 이곳에 거주하면서 이케다 씨가 발견한 것은 자신이 정착한 마을의 쇠퇴보다도 대도시의 베드타운 도시를 걱정하고 있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5월 25일자 AFP 일본통신은 호주 멜보른 근교에서 희귀한 흰색 제비가 발견되었다고 보도했다. 이 통신은 조류전문가로 환경교육지도자인 밥윈터스 (Bob Winters) 씨가 어렵사리 흰색 제비를 찍는데 성공했다고 보도하면서 이는 선천성색소결필증 제비라고 했다. 순백색의 제비는 전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것으로 현지 언론은 2010년 영국에서 보고 된 것 외에 손에 꼽을 만큼 희귀종이라는 반응이다. 현대 조류학의 눈으로 보면 순백색 제비는 정상이 아닌 새지만 희귀성으로 보면 무척 귀한 존재이기도 하다. 호주에서 발견된 흰색 제비 이야기를 듣자니 고대 일본의 흰 꿩 이야기가 생각난다. 흰 꿩이 등장하여 나라의 연호를 백치(白雉, 하쿠치)라고 한 왕은 효덕왕(孝德天皇)이다. 서기 650년 2월 9일 나가토(長門, 지금의 야마구치현) 지방에서 국사(國司)인 쿠사카베가 흰 꿩을 잡아 효덕왕에게 바쳤다. 백치 연호를 쓴 기간은 4년 정도뿐이지만 조정에서는 쿠사카베가 오노야마에서 잡아 헌상한 휜 꿩을 보고 조정에 상서로운 일이 일어 날 것으로 생각하여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고 연호(일본에서는 원호라 함)를 백치라고 하였다. ▲ 효덕왕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서기 703년 5월 28일 종5위 신분의 신라대사 미노연정마려(美努連淨麻呂)와 학문승 의법(義法), 의기(義基), 자정(慈定), 정달(淨達) 등이 신라로부터 귀국했다. 이는 일본의 정사인 《속일본기》에 나오는 기록으로 일본의 승려들이 신라로 공부하러 떠났다가 돌아온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속일본기》에는 이 무렵 신라인은 물론 고구려, 백제인들과의 교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게 기록되어 있다. 물론 발해사신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나와 있다. 이 보다 앞서 1월 5일에는 신라에서 김복호(金福護, 신라관직 제8위)와 김효원(金孝元, 신라관직 제9위)등이 효소왕의 죽음을 알리러 왔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4월 4일에는 종5위인 고려(고구려) 약광(若光)에게 왕(王)이라는 호칭을 하사하였다라는 기록도 있다. 이 고구려의 약광왕을 모신 신사가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에 있는 고마진쟈(高麗神社)이다. 머나먼 2천 년 전 유구한 세월 동아시아에 일찍이 국가를 형성했던 고구려. 여러 나라들의 맹공을 저지하는 강국이면서도 예술과 문화 영지(英知)룰 남기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아름다운 나라. 먼 이국땅에서 넘어온 왕족 고구려왕 약광(高麗王 若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내일 모레 5월 15일은 교토의 3대 마츠리 가운데 하나인 아오이마츠리 날이다. 아오이마츠리(葵祭)는 고대 한반도와 관련이 있는 마츠리로 가모신사의 마츠리라해서 가모마츠리(賀茂祭)로도 불렸다. 아오이마츠리 유래는 ≪가모신사유래기≫에 따르면 6세기 무렵 긴메이왕 시절에 일본 전역에 풍수해가 심각하여 점쟁이에게 점을 쳤는데 가모대신(賀茂大神)이 노한 것으로 나와 그 노여움을 풀기 위한 제례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노여움을 풀기 위한 수단으로 제주(祭主)는 튼튼한 말을 골라 방울을 잔뜩 달고 기수 얼굴에 동물 가면을 씌워 가모신사 주변을 돌면서 성대한 제례(마츠리)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일본의 마츠리는 대부분이 고대에 기원을 둔 것으로 풍수재해 예방, 전염병 확산 금지, 국태민안, 풍작 등의 기원을 담고 있으며 아오이마츠리 역시 풍수재해 예방 기원으로 시작되었다. 1693년까지는 가모마츠리(賀茂祭)로 불리다가 아오이마츠리(葵茂祭)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아오이란 하트모양의 콩잎 같은 풀 잎사귀가 행렬에 참여하는 우마차 장식에 쓰였다고 해서 붙이게 된 이름으로 지금도 행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머리장식에 빠지지 않고 푸른 아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어제는 일본의 어린이날(고도모노히, 子供の日)이었다.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고 어린의 행복을 꾀함과 동시에 어머니에게 감사드리는 날의 취지로 1948년 제정된 이래 67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어린이날을 제정한 나라는 터키로 1920년 4월 23일이었고 이후 1925년 스위스제네바에서 6월 1일을 국제어린이 날 (International Children's Day)로 삼은 이래 1954년에는 유엔에서 11월 20일을 세계어린이 날(Universal Children's Day)로 정했다. 그러나 나라마다 어린이 날은 약간 씩 다르며 일본은 전통적으로 지내오던 단오날을 오늘의 어린이 날로 삼고 있다. 따라서 어린이 날을 탄고노셋쿠(端午の節句)라고도 하는데 원래 이날은 남자 아이들의 성장을 축하하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기원하는 풍습에 기인한다. 이날은 형형색색의 모형 잉어를 띄우는데 이를 고이노보리(こいのぼり)라고 한다. 예전에는 남자 아이가 있는 집안에서는 긴 장대에 모형잉어를 매달아 놓았지만 아파트 생활을 하는 현대는 아파트 베란다에 모형잉어를 장식하기도 한다. 왜 하필 모형 잉어인가? 중국 후한서(後漢書)에 보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거사 후, 당일자로 일본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은 즉각 호외를 발행했고 이튿날인 30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범인의 1인은 양복에 희끗희끗한 스프링코트를 입고 식대(式臺) 뒤에서 범인 2명이 동시에 1개씩 수류탄을 던졌고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할 때 부근에 있던 도시락 상자 중에 또 하나의 수류탄이 있음을 발견했다. 범인 중 2명은 수류탄 파편으로 자신도 부상을 입어 피투성이가 되고 중상을 입었다. 고 보도했다. 사건 직후 호외에서는 범인을 괴지나인(怪支那人)이라는 둥 갈팡질팡하던 일본 신문들이 5월 6일자 호외에서는 상해폭탄사건의 범인은 조선인 이라면서 군사당국이 5월 6일 오후 3시에 발표한 범인의 신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본적과 이름, 생년월일을 보도했다. 본적: 조선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9 현주소: 상해 불조계(佛租界) 파이롱로 도혹코구 30 윤봉길 명치 40년 5월 19일생 윤봉길은 4월 29일 오전 7시 45분 홍구공원에 들어가 관민합동의 축하회가 곧차 끝나려고 기미가요를 합창하고 있던 11시 40분 경 연단 후방의 군중 속에서 나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무라카미하루키(村上春樹, 66살) 씨의 일본은 중국과 한국에 지속적으로 사죄해야 한다.는 발언을 두고 중국의 4,500만 명이나 되는 트위터들이 하루키씨를 칭찬하는 글을 올렸다고 일본의 인터넷 언론, 사-치나(サ-チナ, searchina) 신문이 4월 21일자로 보도했다. 이 신문은 무라카미 씨가 일본은 중국과 한국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시 침략을 받은 국가에 대해서 이들 나라가 완전히 잊을 수는 없지만 충분히 사죄 받았으니 이제 되었다고 할 때 까지 반복해서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말을 전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를 칭찬하는 사-치나(サ-チナ, searchina) 4월 21일자 기사 또한 이 신문은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여러 번 오른 일본의 저명한 소설가인 무라카미하루키 씨의 발언에 대해 중국의 누리꾼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며 트윗에 올라 온 글을 소개했다. 역사를 존중하고 그것을 인정해줘서 고맙다 / 가장 사랑하는 일본의 소설가 중 한 명이다 / 일본에 모두 멍청이만 있는 게 아니다 / 무라카미 씨의 책을 사야겠다 / 그에게 노벨상을 주어야한다 / 그의 작품은 모두 멋지다. 하지만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사실을 사실로서 처리하면 문제는 간단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학살, 방화를 자인하게 되는 일이므로 제국주의 입장에 불이익을 초래한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간부들과 협의한 결과 (조선인의) 저항에 대한 살육 등을 인정하지 않기로 결의하고 밤 12시에 산회 하였다. 이는 1919년 4월 15일 화성 제암리교회 학살을 주도한 우츠노미야타로우 (宇都宮太郞,1861-1922)가 그의 일기에서 밝힌 내용이다. 우츠노미야는 당시 일본 육군에서 가장 잘나가는 3인방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선군사령관 육군참의관으로 조선에 건너와 있었다. 그는 15년간 일기를 썼는데 그의 일기는 2007년 《일본육군과 아시아정책(日本陸軍とアジア政策)》이란 3권짜리 책으로 일본에서 펴낸 바 있다. ▲ 제암리학살사건의 진압사령관 우츠노미야의 일기 《일본육군과 아시아정책(日本陸軍とアジア政策)》책 광고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화성 제암리교회 학살에 대해 사건 이틀 뒤인 4월 17일치 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수원, 진위, 안성 등지에서는 하세가와(長谷川)대위가 지휘하는 제1반(第1班)과 츠무라(津村)특무조장이 지휘하는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950~60년대에 미국유학을 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두뇌 유출된 한국학자들에 대한 보도가 지금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15세기 조선초에도 이런 두뇌 유출이 있었다. 불교나 도교 그림을 그리던 최고 수준의 승려화가들이 조선의 억불정책 아래 활동이 어려워지자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 당시에는 입국심사나 이민법 겉은 것은 없었다. 일본절에서는 조선의 승려화가들을 우대하여 받아들였으므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 되었다. 이들이 그린 그림들은 모두 일본미술사로 편입 되어 버렸다. 출가한 사람은 속가의 이름을 버리고 법명을 받는다. 이 때문에 그림에 서명된 이름만으로는 그가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이 어렵다. 이는 미술사학자인 코벨의 이야기다. 그는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에서 15세기 일본의 선묵화를 그린 사람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음을 그의 스승 후쿠이리키치 교수의 발표를 토대로 밝혔다. 그동안 일본 화단에서는 슈분(周文)이라는 일본 화가가 수묵화를 전부 그린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1925년 후쿠이 교수의 조선인 작품을 발표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동안 일본발음이 같은 슈분이라는 인물 가운데 조선인 슈분(秀文)이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한국의 장승은 돌이나 나무에 사람의 얼굴을 새겨서 마을 또는 절 어귀나 길가에 세워 잡귀와 나쁜 액운의 출입을 막거나 절의 경계를 표시하는 민간 신앙물이다. 이러한 장승을 마을에서는 수호신으로 믿기도 했다. 장승은 대부분 남녀로 쌍을 이루는데 남자를 가리키는 장승 기둥에는 천하대장군, 여자를 가리키는 기둥에는 지하여장군이라고 새기기도 한다. 그런데 일본에도 이러한 장승이 있다. 도조신(道祖神, 도소진)이 그것이다. 일본의 장승은 대부분 돌장승이 많으며 한국처럼 마을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교차로 등에 세우는데 이 장승을 마을신으로 받들고 나쁜 액운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거나 길 가는 나그네의 안전을 비는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 나가노현에 있는 석비 형상이 장승 도조신(道祖神) 일본의 장승은 조각을 하여 어떤 형태를 만들기 보다는 자연석 상태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더러는 석비 형상이나 5층탑 모양 또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도 있다. 이러한 장승은 전국에 널리 분포하고 있으나 흥미롭게도 이즈모신화(出雲神話)의 고향인 시마네현에는 장승이 거의 없다. 아마도 강력한 신앙인 이즈모신사(出雲神社)가 장승신앙을 허락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