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사천시 사남면 우천3ㆍ1만세운동기념비건립추진단(단장 김갑성)은 9일 오전 11시 우천바리안마을 도농교류센터 앞 광장에서 유족과 시민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3ㆍ1만세운동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사남면 우천마을에서는 지금으로부터 97년 전인 1919년 기미년 당시 김관일, 김주봉, 김기범, 문종석, 문명표, 김수명, 김또정일, 김몽우, 김재상, 김덕우, 김장언, 곽성삼, 곽은삼, 곽의삼, 문득용, 문석포, 문장포 이상 열일곱 분의 청년들이 우천리 텃골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헌병에게 잡혀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운동을 펼친 바 있다. 이러한 독립운동 사실이 구전으로만 전해져 오다가 지난 1985년 사천현 여지승람 속간을 펴낼 때 사천문화원에서 우천마을의 만세운동 사실을 발견하고 역사적 사료를 찾아 검증작업을 거쳤으며 지난해 우천마을 주민들의 뜻을 모아 기념비 설립을 결의하고 시의 지원을 받아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사업추진을 맡은 김갑성 추진단장은 "만세운동이 있은 지 97년, 관련 자료를 발견한 지 31년 만에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비를 건립하게 되어 마음의 짐을 덜었다."며 "그분들의 의로운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신의철 동지에게 신동지! 증오와 편가름, 혼란과 부조리 없는 그 곳 – 모두가 평안(平安)허고 다같이 영원히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곳으로, 이 아귀다툼의 사바세계를 등지고 떠난 지 어언 십수 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러갔네그려! 그간, 신동지와 전후해서 이곳을 떠난 김권, 박승유, 이희화도 재회해서, 지난 어두웠던 시절 광복군으로서 중국 장시성 허커우 전(江西省 河口鎭)에서 태극기를 품에 안고 애국가를 부르며 (당시에는 영국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 곡으로 불러서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최수봉 [1894~1921] 선생은 1894년 경남 밀양의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향리의 개량서당을 다니면서 한문과 유교적 가르침을 익히고 신지식도 섭렵하였다. 그 후 김원봉과 함께 밀양공보를 다니던 중 단군이 일본 대화족(大和族) 시조의 아우라고 주장한 일본인 교사에게 항의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였다. 선생은 1910년 사립 동화(同和)학교에 편입하여 김대지 등 독립운동가의 가르침을 받으며 조국애와 항일의식을 키워갔다. 1912년 범어사가 운영하는 부산 명정학교와 1913년 기독교 계통의 평양 숭실학교를 다녔다. 1916년 평안도에서 광부와 우편배달부 생활을 한 후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인 봉천(오늘날 선양)과 안동(오늘날 단둥)을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하였다. 1920년 의열단이 제1차 국내 일제기관 총공격거사 계획을 세우고 폭탄을 밀반입하다 일제 경찰에 적발되어 여러 단원들이 체포되자 선생은 이종암 등과 식민통치의 폭압기구에 폭탄 투척 거사를 계획하였다. 1920년 12월 27일 월요일 아침 경찰서장이 연말연시 특별경계를 당부하는 훈시를 하던 틈을 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선생에 대한 재판은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튼튼한 어린이, 따뜻한 어린이, 똘똘한 어린이” 이는 제주 오라동(제주시 정실3길 57)에 있는 선덕어린이집의 원훈이다. 원훈 말고도 이곳에는 ‘바라는 상(교육철학)’이 반듯하게 적혀 걸려 있는데 “선덕어린이집에서 바라는 어린이상은 설립자이신 고수선 애국지사의 유지를 받들어 앞날의 우리민족의 기둥이 되도록 자라는 어린이 곧 한민족의 기본정신인 홍익인간으로 자라기를 바랍니다” 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어머니는 내 자식 남의 자식 구분 없이 사랑으로 아이들을 보살폈습니다. 저 역시 평생 아이들과 더불겠다는 생각으로 어린이집을 맡아 지금까지 이끌어 오고 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어릴 때 교육이 아주 중요하지요.” 선덕어린이집을 찾아간 기자에게 정원에서 딴 잘 익은 무화과 열매를 먹어보라고 권하며 김률근 원장(76살)은 그렇게 말했다. 김률근 원장의 어머니인 여성독립운동가 고수선(高守善, 1898-1989)애국지사는 일제강점기에 온몸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으며 한편으로는 경성의전을 졸업하여 한국인 여의사 1호가 된 수재였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선덕어린이집을 세워 평생을 어린이 교육에 헌신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겨울이 가까워진 11월 덕유산이 품은 산골짜기 죽림정사를 찾았다. 불교에서 죽림정사는 남다른 뜻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혹독한 동토의 땅에서 설산수도를 거쳐우주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뒤 그를 따르던 수도승단을 이끌고 제자들을 지도할 때에 수행자들은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멀지 않은 곳에있는 동굴과 같은 곳에 머물면서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아침에 일어나 마을 집들을 돌아서 커다란 밥그릇(바루)에탁발하여 받아온 음식으로 하루 한끼를 먹으면서 수행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부처님과 수행자들이 이런 열악한 시설에서 수도하는 것을 너무도 안타깝게 여긴 당시 마가다국의 돈 많은 갑부인수자타 장자는 그가 존경하는 부처님이 쾌적한 곳에머물면서 제자들을 지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환경이 좋은 곳에 최초의 절을 짓고자 하였다. 그는 전국을 뒤져 그런 곳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그가 택한 곳은 당시 왕의 아들이었던 기따태자가 소유하던 대나무가 숲에 사슴이 노니는 아름다운 동산이었다. 수자타는 땅주인인 기따태자를 찾아가 그 숲을 자신에게 팔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그 땅값으로 얼마를 주면 팔겠느냐고 물어보았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영국에서 구국외교를 펼친 이한응(李漢應, 1874~1905) 선생을 2016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선생은 1874년 경기도 용인에서 군수인 이경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근대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근대학문을 익혔으며, 1894년 과거시험인 성균관 진사에 합격한 후 한성부 주사에 임명되었다. 또한, 1899년에는 관립 영어학교 교관으로 후학을 지도하였다. 1901년 3월 민영돈이 주영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될 때 선생도 주영공사관 참서관으로 함께 영국에 파견되었다. 선생은 영국에서 교류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으면서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데 노력하였다. 선생은 러시아와 일본 간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한반도의 평화가 유럽의 세력균형과 연관된다는 매우 독특하고 창의적인 견해를 제시하며,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영국 외무부를 설득하였다. 또한, 당시 국제상황으로 보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 전후에 한국의 독립이 유지되기 더욱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고 1905년 3월 영국 외무대신에게 거중조정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독립운동사를 이제 막 공부하기 시작한 이지은입니다. 뛰어난 글솜씨를 지니지 못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들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들께 제 마음만은 꾹꾹 눌러 이 편지 속에 담아 글을 써내려가 봅니다. 제가 한국독립운동사를 공부하고자 마음먹은 이후로 항상 스스로에게 던져보곤 했던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당시의 선생님들께서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서 독립운동에 뛰어들 수 있으셨을까? 그 마음을 모두 다 헤아려보기엔 저는 한국인이라고 차별을 받아본 적도, 매일매일 폭압 속에서 살아본 적도, 나라를 빼앗겨본 적도 없었기에 쉽사리 짐작조차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저에게 선생님의 일기 속 한 구절은 머리를 울리고 마음을 뭉클하게 하였습니다. 아이의 이름 속에서 선생님들께서 갖은 고생 속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자, 다짐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아기의 이름은 ‘제시’라고 지었다. 집안의 돌림자가 ‘제’자인데 ‘제시’라는 이름이 생각났다. 영어이름이다.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태어난 아기, 그 아기가 자랐을 때는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서 당당하게 제 몫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의성 김 씨 김진린의 귀한 딸 시집와서 남편 이중업과 두 아들 동흠 중흠 사위마저 왜놈 칼 맞고 비명에 보낸 세월 쉰일곱 늘그막에 기미년 안동 예안 만세운동 나간 것이 무슨 그리 큰 죄런가 갖은 고문으로 두 눈 찔려 봉사 된 몸 두 번이나 끊으려 한 모진 목숨 11년 세월 그 누가 있어 한 맺힌 양가(兩家)의 한을 풀까“ 이 시는 이윤옥 시인이 쓴 김락(金洛, 1863~1929)지사에게 드리는 “독립운동가 3대 지켜 낸 어머니 김락”이라는 시 가운데 일부입니다. 김락 지사님! 저는 몇 해 전 안동에 있는 지사님 무덤을 찾아 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 지사님의 무덤은 안동독립운동기념관(현, 경북독립운동기념관)에서조차 확인할 수 없어 우여곡절 끝에 지사님의 친정집에서 김대락 지사님의 후손 김시중 어르신을 만나 겨우 찾아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덤을 찾아 가는 길은 변변한 표지판도 없어 풀숲을 헤치고 쓰러진 소나무 등걸을 치우며 간신히 찾을 수 있었지요. 당시 시아버님을 다룬 《향산 이만도》 책에는 김락 지사님 부부 무덤을 향산 이만도 시아버님과 아들의 무덤이 있는 봉화군 바드실 마을로 옮길 예정이라고 나와 다행이라고 생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무덥고 습기 많은 충칭 특유의 찜통더위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손가화원에서는 난데없이 어른들의 만세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습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대한민국이 해방된 날이지요. 귀국을 서두르는 우리에게 정든 친구 천진천, 천의, 짱다루, 구팡 등 친구들은 물론 그동안 해코지를 일삼던 애들까지 찾아와 이별을 아쉬워했습니다. 어디서 난 소문인지는 몰라도 차우센미(조선쌀)는 한 알이 달걀만해서 서너 알만 먹어도 배가 부르고, 맛도 좋다며 애들이 부러워했습니다.” 이는 독립운동가이자 1949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金尙德, 1891 ~ 1956) 선생의 아드님인 김정륙(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하 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이 충칭에서 해방을 맞았을 때의 소회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참말인줄 알고 귀국했다가 그만 첫날 실망했다고 회고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김정륙 부회장의 나이 8살 때 일이니 조국의 정보란 것이 얼마나 엉성했을까 싶다. 하지만 푸석푸석하고 바람에 날리는 쓰촨(四川) 쌀에 견주면 우리나라 쌀은 정말 찰지고 맛 좋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식량이 귀하던 시절 그것도 망명땅 중국에서의 쌀밥 한 그릇은 얼마나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 민족적인 성향이 짙은 '아리랑'을 만들어일약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았던 나운규 선생은 그 누구보다도 투철한 독립운동가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운규 선생은 함북 회령 출신으로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간도의 명동중학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함북 회령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일경의 수배를 받게 되자 연해주를 거쳐 북간도로 이동하였다. 3.1운동 이후 간도지역의 무장독립운동이 활발할 때 선생은 철도, 통신 등 일제의 기간시설 파괴 임무를 띤 도판부(圖判部)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였으며, 청산리 인근에서 독립군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철도 파괴 계획에 대한 비밀문서를 입수하고 선생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선생은 1921년 3월 보안법위반으로 2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회령에 머물던 선생은 1924년 1월 극단 예림회에 가입하여 연극배우로 활동하였다. 이후 부산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연구생으로 입사하였고, 윤백남의 백남프로덕션에서 '심청전'의 심봉사 역을 맡아 연기하였다. 이후 '흑과백', '장한몽', '농중조'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주목받게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