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2,500여 년 전 손무와 손빈은 《손자병법》이란 책을 완성합니다. 그 글에는 ‘무소불비 무소불과(無所不備 無所不寡)’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부족한 곳이 없도록 하려 한다면 부족하지 않은 곳이 없다."라는 말씀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모든 곳을 대비하면 모든 곳이 소홀해진다는 뜻입니다. 곧 한정된 군사를 모든 곳에 배치하면 각처마다 수가 적어져서 각개격파의 대상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운용상의 효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군사의 숫자는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나 군사가 많다고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집중이 중요합니다. 적이 올 가능성이 가장 큰 곳에 군사력을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소수의 군사로 대군을 이기려면 ‘무소불비 무소불과’를 해야 합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문제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도 없지요. 어쩌면 한 사람이 가지는 일생의 행복과 불행의 총량은 모두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책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는 삶은 누구에게도 오지 않는다." 세상엔 부유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며칠 있으면 설이구나. 어릴 때 설을 마냥 기다리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다들 먹는 것이 부실할 때여서 설이나 한가위 등 명절이 되면 큰 집이건 외갓집이건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 인사를 드리고는 곧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어 그날이 기다려졌다. 그런데 그런 달콤한 기억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할머니로부터 옛날이야기 듣는 것이었다. 특히 설에는 대부분 날씨가 추우니 미리 초저녁에 군불을 때어 뜨끈뜨끈해진 안방 아랫목에 넓은 이불을 펴고 그 안에 발을 집어넣어 무릎을 맞대고는 할머니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대충 간식도 먹고 나면 우리는 할머니 팔을 붙잡고 흔들며 옛날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른다. 곶감을 좋아하던 호랑이, 달순이 별순이 이야기 등 몇 번씩이나 들어서 줄거리를 다 알지만 들을 때마다 재미있었다. 친구들 만나보면 이야기 솜씨가 좋은 할머니들은 별별 이야기를 다 해주신다고 한다. 요즘 우리 손자 손녀가 딱 그때 내가 이야기를 들을 때 나이여서 손주들이 명절에 집에 오면 옛날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른다. 할아버지인 나는 말솜씨가 없어 할머니한테 미루면 집사람은 어떻게든 애들을 무릎 앞에 앉히고 이야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한국도로학회에서 《도로 이야기》라는 책을 냈습니다. 도로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이지요. 그러니 한 사람이 다 쓸 수는 없고 도로학회 회원들이 분담하여 썼습니다. 그 가운데는 같은 공군 장교 출신이라 저와 인연을 맺은 손원표 박사도 필진으로 참가하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저도 이 책을 보게 되었데, 다양한 이야기 가운데는 아무래도 제가 역사를 좋아하니 도로의 역사 부분에 눈길이 갑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지요? 로마의 첫 포장도로는 기원전 312년에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에쿠스 지휘하에 만들어졌네요. ‘아피아 가도’라는 말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이 길을 통하여 병력과 물자만 오간 것이 아닙니다. 이 길을 통하여 로마 문명이 전파되고, 로마제국 이후에도 로마 가도를 따라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오늘날 유럽 문명의 정체성이 유지된 것입니다. 한편 서양은 거리를 나타낼 때 ‘마일’을 쓰지 않습니까? 이게 로마의 도로에서 유래된 것이네요. 로마에서는 가까운 도시부터의 거리를 표시하기 위하여 로마 성인의 1,000 걸음 (약 1,480m)에 해당하는 지점마다 돌기둥을 세웠는데, 여기서 ‘마일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김란사! 언뜻 듣기에도 몹시 이국적인 이 이름은, ‘낸시(Nancy)’라는 세례명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김란사는 구한말 태어나 1919년 숨을 거둘 때까지, 조선 여성 교육과 독립운동에 아낌없이 헌신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화학당의 교사로 많은 여성을 깨우치고, 또 고종의 비밀문서를 갖고 파리강화회의로 향했던 중요한 업적에 견줘 오늘날 거의 아는 이가 없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애국지사이기도 하다. 아마 파리강화회의로 향하던 중 베이징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아까운 삶을 일찍 마쳤기 때문이리라. 이 책,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의 지은이 황동진은 서울교육박물관에서 학예연구사로 활동하는 그림작가다. 2017년 김란사 특별전을 기획하고, 전시가 끝나서도 김란사를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펴냈다. 김란사는 1872년, 평양의 한 유복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청나라에 오가며 무역한 덕분에 남부러운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에는 혼인을 10대 시절에 일찍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녀는 스물한 살에 경무청에서 일하던 하상기와 혼인했다. 여느 여성들과 다르게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 일을 적극적으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강원도 산골로 들어온 지 이제 세 해째를 맞는다. 깡촌의 강마을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때 서울로 간 나는 음악을 좇아 이십여 년의 서울살이를 접고 30대 시절에 그곳을 떠났었다. 몇몇 지방도시를 전전한 끝에 강릉에다 짐을 풀고 이십 년 가까이 살다가 다시 서울로 가서 십여 년을 또 살고 이곳으로 왔으니 고향에서 보낸 기간보다 타향살이 기간이 몇 곱절은 길다. 그런 까닭인지 고향보다는 타관에 대한 기억이 더 많고 특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서울에서의 추억이 가장 많이 새겨져 있다. 감수성이 한창인 청소년기를 보낸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향은 늘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청계천! 우리 가족은 이 개천가에서 첫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청계천은 지금의 광교 쪽 일부 구간을 뺀 나머지는 복개되기 전이었고 한국전쟁 직후 빈곤의 그림자가 꽤 많이 남아있었다. 동대문을 지나 하류 쪽으로 둑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도 무허가 판잣집들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늘어서 있었고, 창신동과 숭인동 일대는 서울의 대표적 판자촌이었다. 판잣집은 말이 집이지 그저 비, 바람이나 근근이 가리는 정도의 공간이라 치면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옛 어른들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지 않고서는 그 일에 대해서 의논하지 않는다" 사람은 남의 입을 통해서 사실을 인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의 주관이 아니라 남의 주관대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진실을 잘 알지 못하면서 떠벌리는 경우도 많지요. 임금을 섬길 때는 임금의 존경을 받아야지 임금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임금의 신뢰를 받는 게 중요하지, 임금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지요. 조석으로 가까이에서 임금을 모신다고 해서 존경받는 사람이 아니며, 시나 글을 잘하고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임금이 존경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도, 얼굴빛을 살펴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도 벼슬 버리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도, 차림새가 엄하지 못한 사람도, 권력자에게 이리저리 붙는 사람도 임금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경연에서 온화하게 말을 주고받고, 일을 처리할 때 비밀히 부탁하고, 임금이 마음속으로 믿고 의지하여 서신이 자주 오가고, 하사품이 자주 내려질지라도 그런 것을 총애나 영광으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 뭇사람들이 노여워하고 시기하게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플라스틱 오염(Plastic pollution)은 쓴 뒤 버려진 플라스틱이 생태계를 오염시키는 것을 말한다. 플라스틱이라는 말은 ‘빚어내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플라스티코스(plastikos)에서 유래하였다. 플라스틱의 과학적인 정의는 “열과 압력을 가해 성형할 수 있는 고분자 화합물”을 말한다. 우리가 매일 쓰는 비닐봉지, 페트병, 빗, 칫솔, 일회용 기저귀 등이 모두 플라스틱에 속한다. 플라스틱은 1930년대에 영국에서 등장하였는데, 가공하기 쉽고 가볍고 튼튼하고 전기를 통하지 않고 물에 녹지 않고 제조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에 현대인의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플라스틱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로서 현재 플라스틱은 유리, 나무, 철, 종이, 섬유 등을 대체하는 신물질로서 환영받고 있다. 자동차와 항공기에는 강철보다 75% 가볍고 강도는 10배나 되는 ‘탄소 섬유 강화 플라스틱’이 들어간다. 최첨단 기술 제품인 반도체, OLED, 디스플레이, 태양전지, 로봇, 인공혈관 등에도 플라스틱이 핵심 소재로 사용되어 한때는 ‘신의 선물’이라는 찬사까지 받을 정도였다. 플라스틱의 최대 약점은 미생물이 분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지금으로부터 꼭 400년 전인 1623년 3월 13일,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에 성공한 공신들은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평양으로 급파한다. 거기에는 7년동안 평안감사를 하고 있는 박엽이라는 장군이 있었다. 왕명을 받은 선전관 일행은 군사를 동원해 평안감영에 갑자기 들이닥친다. 그리고는 사정도 모르는 박엽을 불러내어 목을 벤다. 그 이후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이나 다른 기록들을 보면 박엽은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탐욕스럽고 포학하며 방자해서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새로 익랑(翼廊, 날개처럼 펼쳐진 회랑) 70여 칸을 지어 연달아 장방(長房)을 만들고, 도내의 명창 백여 명을 모아 날마다 함께 거처하며 밤낮으로 오락을 일삼았다. 늘상 음탕한 짓을 하되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사정없이 매를 때리고, 결미(結米, 조선 때 논밭의 결(結)에 따라 조세로 바치던 쌀)를 받아들이되 수를 배로 해서 독촉하여 조금이라도 어기거나 늦추는 일이 있으면 참혹한 형벌을 써서 죽이곤 했다. 도내의 이름난 기생을 모아서 날마다 한 곳에서 밤낮 즐기며 풍마(風馬) 놀음을 하니, 하루에 소용되는 곡식이 6, 70섬이었으며, 참혹하게 형을 가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요즘 산을 오르다 보면 가장 많이 보이는 짐승이 까마귀와 고양이입니다. 옛날에 토끼와 꿩이 많았던 것하고는 대조적이지요. 까마귀는 생김새와 울음소리, 식성 때문에 길조보다는 흉조로 알려진 새입니다. 그건 아마도 전쟁이 쓸고 간 계곡에 시신이 널브러져 있을 때 가장 먼저 달려드는 새가 까마귀이기 때문으로 추측합니다. 그리하여 전염병이 돌 때 까마귀가 울면 병이 널리 퍼진다고 하였고 길 떠날 때 까마귀가 울면 재수가 없다고 했지요. 또한, 귀에 매우 거슬리는 말을 할 때 ‘염병에 까마귀 소리를 듣지’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까마귀는 검습니다. 검은 것은 지저분하고 더럽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요. 어머니는 어쩌다가 씻지 않은 날이면 '까마귀가 아저씨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 세종 때 이직이라는 사람은 '까마귀 검다 하고'란 시조를 씁니다.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쏘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이는 체면문화로 겉치레하는 양반들을 꼬집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까마귀의 깃털은 그냥 까만 게 아니라 보라색과 녹색이 섞인 검은색을 띠고 있고 까마귀는 까치, 앵무새와 함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훈맹정음’. 척 보아도 그 뜻이 짐작이 간다. 바로 맹인을 위한 한글점자다. 눈이 보이는 이는 일상적으로 읽는 한글도 맹인에겐 큰 산이다. 점자를 통해 세상을 보는 그들에게 한글점자, ‘훈맹정음’의 존재는 세상을 밝히는 등대요, 촛불이다. 1926년, 이렇게 소중한 ‘훈맹정음’을 만드는 큰일을 해낸 이가 있으니, 바로 박두성이다. 지은이 최지혜는 박두성이 나고 자란 강화도 어느 산자락에서 바람숲그림책도서관을 운영하며 그림책 《훈맹정음 할아버지 박두성》을 썼다. 박두성은 강화도보다 더 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섬, ‘교동도’에서 1888년 가난한 농부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였던 박두성의 집안은 교동교회에 봉사하며 신실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 어릴 때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지만, 여덟 살부터는 강화도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했다. 졸업하고 나서는 얼마간 농사를 짓다가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선생님이 되었다. 처음엔 일반 초등학교에서 보통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그의 운명이 바뀐 것은 스물다섯 살이었던 1913년, 조선총독부 제생원에 속한 맹아학교 선생님이 되어 처음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