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지난주에는 홍성에서 개최된 역사인물축제 이야기와 <제13회 홍성 가무악 전국경연대회> 관련 이야기를 하였다. 홍성이 낳은 역사적인 인물, 6인을 선정하여 이들의 업적이나 나라사랑 정신을 영원히 기리자는 의미를 축제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이야기, 인물 6인은 고려의 명장 최영 장군을 비롯하여 성삼문, 김좌진, 한용운, 한성준, 이응로 화백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물들로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문(文)과 무(武), 그리고 예(藝)에서 장식했던 분들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역사인물 축제와 연계되어 열린 제13회 <전국 가무악전국대회>는 국악의 신진을 발굴하는 등용문으로 손색이 없는 대회로 평가된다는 이야기, 홍성을 찾은 관광객이나 지역 주민들에게 전통음악이나 전통춤에 대한 인식을 더욱 넓혀 주었었다는 이야기, 분야의 확대를 고려하기 바란다는 주문과 함께 100세 시대에 걸맞은 노인부를 반드기 신설해 주기를 바란다는 이야기, 앞으로 홍성의 역사인물축제와 병행되어 민관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대표적인 형태의 축제라는 점에서 상당부분 탄력을 받게 될 대회여서 기대가 모아진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오늘은 24절기의 열여덟째 “상강”입니다. “상강(霜降)”은 말 그대로 수증기가 땅 위에서 엉겨 서리가 내리는 때며, 온도가 더 낮아지면 첫 얼음이 얼기도 하지요. 벌써 하루해 길이는 노루꼬리처럼 뭉텅 짧아졌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면 하룻밤 새 들판 풍경은 완연히 다른데 된서리 한방에 푸르던 잎들이 수채색 물감으로 범벅을 만든 듯 누렇고 빨갛게 바뀌었지요. 옛 사람들의 말에 “한로불산냉(寒露不算冷),상강변료천(霜降變了天)”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한로 때엔 차가움을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상강 때엔 날씨가 급변한다.”는 뜻입니다. 이즈음 농가에서는 가을걷이로 한창 바쁘지요. 〈농가월령가〉에 보면 “들에는 조, 피더미, 집 근처 콩, 팥가리, 벼 타작 마친 후에 틈나거든 두드리세……”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가을걷이할 곡식들이 사방에 널려 있어 일손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빈다.", "가을 들판에는 대부인(大夫人) 마님이 나막신짝 들고 나선다."라는 말이 있는데, 쓸모없는 부지깽이도 요긴하고, 바쁘고 존귀하신 대부인까지 나서야 할 만큼 곡식 갈무리로 바쁨을 나타낸 말들이지요. 갑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고대 일본의 수도는 나라(奈良)였다. 그러다가 서기 794년 환무왕(桓武天皇)은 수도를 지금의 교토(京都)로 옮겼다. 올해로 교토 천도 1223년째다. 물론 지금의 수도는 도쿄(東京)지만 문화재라든가 역사성을 따진다면 다연 교토가 한수 위다. 마츠리(축제)만 보아도 그렇다. 교토의 3대마츠리라고 하면 그 전통성을 예전부터 인정받고 있지만 도쿄의 3대마츠리라는 말은 없는 것을 보면 일본에서 교토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교토의 3대 마츠리라고 하면 5월 15일의 아오이마츠리, 7월 17일의 기온마츠리, 10월 22일의 지다이마츠리를 꼽는다. 이 3대 마츠리는 일본인들도 몰려들지만 전세계 사람들이 일부러 이 마츠리를 보러 교토를 찾기에 호텔 등은 일찌감치 동이 날 정도다. 10월 22일 열리는 시대마츠리는 “헤이안천도로부터 1100년째를 기념하여 명치28(1895)년에 제신으로 헤이안신궁(平安神宮)이 조영되었으며 10월 22일부터 10월 24일에 걸쳐서 마츠리가 성대히 거행된다.” 이는 교토시관광협회(京都市光協)에서 시대마츠리(時代祭)의 유래에 대해 밝힌 글이다. 1895년부터 시작했으니 시대마츠리는 올해로 122년째를 맞이한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지난주에는 김세종제의 춘향가를 김수연에게 전수해 준 성우향 명창과 성우향에게 전해 준 정응민 사범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성우향은 국가지정 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친 명창으로 특히 제자들을 아끼는 마음이 남달랐다는 점, 판소리를 배우기 이전에 가곡과 시조를 배워서 긴 호흡이나 힘찬 발성, 소리의 역동성이 돋보이는 명창이었다는 점, 스승 정응민의 영향을 받아 바른 마음(正心), 정직한 소리(正音), 지나치지 않는 몸동작이나 연기를 강조했다는 점, 이러한 판소리 관(觀)은 정응민-성우향-김수연에게 이어졌기에 김수연은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소리꾼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말했다. LA문화원에서 기념 공연을 할 때나, 또는 라스베가스로 가는 사막 중간에 한국인 식당에서 김수연의 <흥타령>을 듣고 흥과 감동,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관광객이나 동포들이 많았다는 이야기 등도 덧붙였다. 전승계보가 뚜렷하고, 예술적 실연 능력에 있어서도 국내 최정상급 명창으로 인정받고 있는 김수연의 소리를 이제는 국가가 보호하고 지켜줄 시점이 되었다는 점을 관계자들에게 청원한다는 이야기 등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이시구로 가즈오(石黒 一雄, 64살)씨는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인이다. 아니 이시구로 씨는 일본인이지만 1983년 영국에 귀화했으니까 국적은 영국인이라고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이 확정 된 뒤 그는 “내 마음속에는 항상 일본이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나 사물을 보는 방법의 대부분에서 내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소감에서 밝혔듯이 자신을 영국인으로 여기기보다는 일본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28살 되던 해인 1982년, 영국에 주재하는 나가사키가 고향인 여성의 회상을 그린 처녀작 <여자들의 먼 여름(A Pale View of Hills)>을 발표하여 왕립문학협회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의 소설에 나가사키가 무대로 등장하는 것은 그가 5살 때 해양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영국에 건너간 것과 무관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처녀작의 무대가 나가사키인 것과 작가의 고향이 나가사키라는 일치감은 어쩌면 어린 시절 떠나온 고향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보이지 않게 내재해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동양인의 모습으로 낯선 환경에서 성장한 이시구로에게 있어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기억의 불확실성은 이후 그의 소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창극에 대한 이론과 비평이 당세의 독보적인 존재였다는 김세종 명창의 이야기를 하였다. <김세종제 춘향가의 미적(美的)접근>이라는 학술모임에서도 김세종제 춘향가의 전승과정이나 동편소리의 특징으로 통성이나 대마디 대장단, 기교보다는 통목을 쓰는 점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전의 춘향가와는 달리, 양반적 취향이 상당부분 가미되어 사설 내용이 우아해 졌고 섬세해 졌다는 이야기나 시창(詩唱)의 삽입이나 우조(羽調)가 강하게 포함되며 감정의 표출을 자제하는 미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김세종은 동편에 속한 대명창으로 신재효 문하에서 지침을 받아 문견이 고상하고, 문식(文識)이 넉넉하며 창극에 대한 이론과 비평이 당세 독보적인 존재였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특히 김세종은 사설의 이면(裏面)과 형용동작이 사설에 맞도록 적절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김세종의 춘향가 소리를 보존해 나가고 있는 모임을 현재 김수연이 이끌고 있는 것이다. 김세종제의 춘향가를 김수연에게 전수해 준 스승이 얼마 전 작고한 성우향 명창이다. 성우향은 국가지정 문화재 5호 판소리(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면서 많은 제자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현재 국악속풀이는 김수연이 이끄는 <김세종제 춘향가보존회> 발표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존회원들의 순서가 진행 중에 찬조 출연한 신영희 명창의 춘향가 중 박석치 대목이 이어졌다. 이 대목은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서 남원에 내려오던 중, 입구의 박석고개에 올라 좌우를 내려다보며 지난날 춘향과의 만남을 회상하는 대목으로 사설이 시(詩)적이다. “박석치 올라서서 좌우 산천을 둘러보니 산도 옛 보든 산이요, 물도 옛 보든 녹수로구나. <중략> 광한루야 잘 있으며 오작교도 무사트냐?” 신영희 명창은 근세 한국을 대표하던 김소희 명창의 수제자로 국가문화재 예능보유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 그는 판소리 북을 들고 대중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판소리를 널리 알리고 대중화 하는데, 일조를 한 명창으로 유명하다는 점, 그는 극장 무대가 크든, 작든 간에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통성으로 부르는 명창으로 또한 유명하다는 점을 얘기했다. 또 김수연의 강습생들이 부른 옥중(獄中)가, 쑥대머리 대목은 임방울(1905~1961)에 의해 유명해졌다는 점, 김수연의 큰 제자들이 남도민요로 끝을 맺었으나, 객석의 요구로 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경남 산청 출신의 홍호연(洪浩然)은 임진왜란 때 12살의 나이로 왜군에 납치되어 나고야 일대에 살면서 명필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진주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군, 관, 민 7만 명을 학살한 뒤 경남 내륙지역까지 진출했다. 그때 경남 산청에 살던 호연의 가족인 남양 홍 씨 일가는 마을 뒷산 동굴로 피신했다. 그러는 와중에 어린 소년은 가족들과 헤어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부대에 붙잡혀 일본 규수(九州) 사가(佐賀)에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그 뒤 12살의 어린 소년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홍호연은 나카노진우에몬(中野左衛門)에게 맡겨져 사무라이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하지만 조선에서부터 글공부를 하면서 익힌 붓글씨 솜씨는 사무라이들의 눈을 휘둥그레 만들었다. 어린 호연은 워낙 천재적인 소질도 있었던 데다가 목숨을 지켜내기 위한 피나는 노력으로 서예에 몰두한 끝에 ‘혹부리 체’라는 독자적인 서체를 이루면서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찬사를 받는다. 교토시의 초호지(頂法寺) 현판은 물론 사가시(佐賀市)의 신사(神社)등에 작품이 남아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서예가로 활약한 홍호연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서울 삼성동 소재 한국문화의 집(Kous)에서 열렸던 <김세종제 판소리보존회> 정례 발표회 이야기를 하였다. 김수연 명창을 비롯하여 제자들의 열연과 특별 출연자, 그리고 관객의 호응이 만들어낸 성공적인 발표회였다는 점, 판소리나 경기지방의 긴소리, 가곡이나 가사, 시조와 같은 장르의 노래들은 노랫말이나 사설의 이해가 감상의 성공요인이라는 점, 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부르는 단가(短歌)라는 노래는 짧고 간단한 노래로 긴 노래를 부르기 전, 목 상태를 점검하는 과정이라는 점를 얘기했다. 초앞 대목의 ‘기산영수 별건곤 소부 허유 놀고’에서, 기산(箕山)은 중국 하남성에 있는 높고 깊은 산 이름이고, 영수(潁水)는 그 근처에 있는 맑은 강, 이곳에 소부나 허유와 같은 선비들이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고 해서 별천지, 곧 별건곤(別乾坤)이라고 한다는 점, ‘허유’ 선비는 요임금으로부터 임금자리를 맡아 달라는 청탁을 받자,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며 영수강에 가서 귀를 씻었다고 하고, ‘소부’는 허유가 귀를 씻은 물이라고 소에게 먹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김수연의 수제자인 강경아의 ‘이별가’가 또한 청중들로부터 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비탈진 돌길로 높은 한산 나 홀로 올라가니(獨上寒山石逕斜) 흰 구름 피어나는 곳에 외딴 집 하나 있네(白雲生處有人家) 가던 길 멈추고 잠시 늦가을 단풍을 감상하니(定車坐愛楓林晩) 서릿발 단풍잎이 매화보다 붉구나(霜葉紅於二月花) 13살짜리 어린 소년은 당나라 두목(杜牧, 830~852)의 시를 줄줄 읊었다. 죽음에 앞서 이 시 한수로 목숨을 건진 소년의 이름은 여대남(余大男, 1580년~1659)이다. 여대남은 경상남도 하동 출신으로 보현암(普賢菴)에서 글공부를 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의 장수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에게 잡혀 죽을 뻔 하였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당시 여대남은 죽기 직전, 붓을 달라고 해서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를 달필로 써내려갔다. 이를 본 가토 기요마사는 이 소년의 비범함에 죽이려던 것을 중지하고 일본으로 데려가 자신의 스승인 일진(日眞) 스님에게 출가 시켜 승려의 길을 걷게 한다. 소년시절부터 영특했던 여대남은 일본 최고의 불교학당인 교토의 육조강원(六條講院)에서 공부 한 뒤 규엔지(久遠寺), 호린지(法輪寺) 등을 거쳐 1609년에 29살의 나이로 구마모토의 고찰인 혼묘지(本妙寺)의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