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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칠장사에 인목대비 한글공적비를 세워야

한글을 즐겨 쓴 왕실 여성들의 상징, 인목대비의 공로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세종 임금이 아무리 훌륭한 글자를 만들었어도 1894년 고종이 국문 칙령을 발표하기 전까지 주된 공식 문자는 한자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훈민정음도 공식문자였다는 것이다. 한자 다음의 비주류문자였지만. 국어교과서처럼 공식 문자가 아니었다고 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공식문자라는 증거는 무엇일까. 공식적이라는 것은 제도나 법으로 규정하거나 인정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강력한 증거는 공식 제도의 중심에 놓여 있는 왕실에서 만들고 나라에서 펴낸 《사서언해》와 같은 책에서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오늘날 헌법과 같은 조선 시대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에서 한글을 국가 공무원 시험이라 할 수 있는 과거 시험 과목으로 정했고 또한 삼강행실도와 같은 국가 윤리서를 한글로 옮겨 백성들에게 알리게 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라의 중심인 임금들은 모두 한글 문서를 나라 정책으로 활용했다.

 

“《삼강행실》(예의범절 규범서)을 언문(훈민정음, 한글)으로 번역하여 서울과 지방의 양반 집안의 어른, 어르신, 또는 서당의 스승들로 하여금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가르쳐 이해하게 하라. 만약 삼강행실 가르침에 능통하고 몸가짐과 행실이 뛰어난 자가 있으면 서울은 한성부가, 지방은 관찰사가 임금에게 보고하여 상을 준다.” - 《경국대전》

 

이밖에 더욱 실질적인 힘을 발휘한 것은 왕실 여성들이 공식 문서에서 한글을 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조선 시대 양반 사대부 남성들은 한문, 이두, 언문을 두루 사용할 줄 아는 다중언어주의자였다. 중인 남성들은 이두, 언문을 두루 사용하고 한문 사용이 가능했고, 평민이나 천민 남성들은 일부만이 언문만 사용가능했다.

 

그런데 지배층 여성들은 한글(언문)을 두루 썼고 한문 사용이 일부 가능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왕실 여성들이 공용문서에서 거의 다 한글만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비록 여성이었지만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여성들의 한글 사용은 여러 측면에서 한글 사용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성 사대부 관리들과의 소통에서 다음과 같은 원칙이 지켜졌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글말을 전달할 때는 반드시 한글을 사용했다. 남성이 여성에게 글말을 전달할 때도 반드시 한글을 사용했다. -김슬옹(2015). 《조선시대 언문의 제도적 사용 연구》. 한국문화사. 참조- 


결국 여성들은 한글만 쓴 것이다. 그래서 ‘암클’이란 말이 생겼지만 그 덕에 한글이 더욱 많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힘 있고 권위 있던 왕실 여성들이 공식 문서를 훈민정음으로 펴내 한글 문서가 더욱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런 왕실 여성 가운데 유달리 한글을 많이 사용하거나 권위 있게 사용한 이는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와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였다.

 

 인수대비는 《내훈》이라는 여성들을 위한 한글 표기 윤리서를 남겼지만 남성 관리들과의 소통에서 한글을 사용한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 바로 남성 관리들과의 소통에서 한글을 권위 있게 사용한 이는 인목대비였다.

 

1623년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이 된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인목대비는 국왕의 비서기관으로 핵심 권력 기관인 승정원에 한글 공문서를 내려 보냈기 때문이다.


 

헌부와 간원이 아뢰기를, “영창 대군은 어린 나이로 불행하게도 골육지변을 당하였으니, 자전의 그지없는 심정과 성상의 추도하는 심정은 참으로 이를 데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호를 내리는 일에 있어서는 예문에 근거가 없고 법례에 어긋나는 데가 있습니다. 영창 대군이 영특하고 아름다운 자질이 있기는 하였으나 어린 나이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선악을 징험할 수 없으니 어떻게 허례의 좋은 시호를 어린 나이의 죽음에 올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언문 편지를 승정원에서 내린 것은 상전(常典)에 방해로움이 있습니다. 이 길이 한번 열리면 뒤폐단이 이루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자전께 곡진히 품달하시어 내리신 명을 거두고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지 말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영창 대군이 나이는 어렸으나 이미 군에 봉해졌는데, 시호는 내리는 것이 어찌 나쁘겠는가. 번거로이 논하지 말라.”하였다.

(憲府 諫院俱啓曰: 永昌大君 髫齔之齡 不幸遭骨肉之變 其在慈殿罔極之情 聖上追悼之心 固冝靡所不至 而至於賜謚之事 無據於禮文 有乘於法例. 永昌 雖有英資美質 而稚年殞折 善惡無徵 何可以美謚虛號 追加於三尺之殤乎? 况諺書之下政院 有妨典常. 此路一開 後弊難言. 伏願聖明 委曲禀達於慈殿 還收成命 令該曹勿爲擧行. 答曰: 永昌大君 年雖幼稚, 旣已封君 賜謚何傷? 勿爲煩論). 《인조실록》 1년(1623) 윤 10월 7일

 

이때는 관청에서 쓰이는 행정 공문서는 한자로만 쓰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인데도 인목대비는 과감하게 한글로 된 공문서를 중요 관청에 내려 보냈다. 그 문서는 남아 있지 않고 실록 기록으로만 전한다. 그 공문 내용을 오늘날 글로 재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인목대비가 승정원 도승지에게,

 

“도승지는 들으시오.

어린 나이로 억울하게 죽은 영창대군(1606년~1614년)의 시호(죽은 뒤에 업적을 기려 내리는 이름)를 마련하여 내리도록 하시오.

 

경들도 알다시피 영창대군은 선왕(선조)의 적자로서 영특하기 이를 데 없는 왕자였소. 그런데도 극악무도한 자들이 한참 뛰어 놀 여덟 살의 그 어린 나이의 대군을 찜통방에서 불을 때 질식시켜죽게 하였으니 그 원을 풀어야 하지 않겠소. 이것은 사사로운 어미의 마음이 아니라 이 나라의 바탕을 바로잡는 중요한 일이니 서둘러 시행해야 할 것이오.“

 

이렇게 대비가 관청이나 남성 관리에게 공문서를 보내면 그 관청이나 남성 관리도 반드시 한글로 답변을 해야 했다. 이처럼 한글로 공식 문서가 오고 가면서 한글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경기도 안성에 있는 칠장사는 천 년 고찰로 인목대비가 크게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목대비가 하사한 한문 글씨가 남아 있기도 하다. 이런 곳에 한글 보급의 1등 공신인 왕실 여성들을 대표하여 인목대비 한글공적비를 세운다면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한중록》, 《인현왕후전》과 함께 3대 한글 궁중문학으로서 유명한 《계축일기(일명 서궁일기, 서궁록》도 어느 나인이 썼다고 하나 “홍기원(2004), 《인목대비의 서궁일기》. 민석원”와 같은 논저에서는 실제 인목대비가 주축이 돼서 만든 기록물이라 보고 있기도 하다. 설령 나인이 썼다 하더라도 인목대비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서술이고 보면 이또한 인목대비의 한글 공적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