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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열아홉 나이로 순국한 김용창 지사 추모제 열려

6월 11일 경기도 향남면 상두리 김용창 지사 선영에서

[한국문화신문 = 양인선 기자]

 열아홉 나이로 순국한 김용창 선열을 추모하며

                                이윤옥

 나라가 제대로 돌아갔으면
아홉 형제 맏이로
줄줄이 동생들 챙기며
부모님께 효도했을 청년 김용창

 식민지 땅에서 태어나
우편국 사환으로 뛰었지만
어찌 푸른 꿈까지 버렸을까?

 조선은 독립의 때가 곧 온다고
힘을 모으자 동포에게 외치던 몸
왜놈에 잡혀 모진 고문으로
옥중 순국하던 날

 산천초목도 울고
하늘도 울었어라

 금쪽같은 아들 앞세운 아버지
피 토하며 뒤따르고
홀몸으로 아홉 형제 거둔 어머니
휘어 틀린 허리 사이로
무심한 세월만 흘러

 모두가 떠난 상두리
고향 마을엔
오뉴월 고추잠자리 한 마리
저 혼자 맴도네.

   
▲ 열아홉의 나이로 순국의 길을 걸은 김용창 지사의 앳된 모습

 열아홉 청년 김용창(金容昶, 1926.8.3~1945.4.3)은 경기도 향남면 출신으로 푸른 꿈을 안고 열다섯의 나이로 상경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 열다섯 소년의 할 일이란 사환 뿐이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환을 거쳐 체신국 경성보험관리소 직원으로 근무하는 한편, 야간에는 덕수공립상업학교(德壽公立商業學校)에서 미래를 꿈꾸며 학업에 정진했다.

   
▲ 향남면 상두리 선영에 있는 김용창 지사 흉상

 그러던 중 1943년 6월부터 근무지에서의 조선인과 일본인 대우의 극심한 차별을 알게 되면서 청년 김용창은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과 민족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주경야독을 하며 역사공부에 매진하던 그는 1944년 4월 중순 무렵 같은 학교 친구인 김익설(金益卨)에게 조선총독의 민족차별정책을 비난하였으며, 5월에는 보험관리소 사무실에서 동료들을 대상으로 "미국·러시아·상해 방면에서 조선인이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조선이 독립하면 나는 일본인을 쫓아 버릴 작정이다. 이번 전쟁에 일본이 패한다 하더라도 조선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오히려 못 이기는 편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등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 김용창 애국지사께 향을 사르고 술잔을 올리는 모습

 뿐만 아니라 같은 해 5월 초순 보험관리소 판자벽에 연필로 "반도 2천 6백만 동포여. 자 일어서라! 조선 독립의 때가 왔다. 지금 와서 지원병이니 징병이니 하고 있다. 아아! 가련하도다"라고 써 붙이는 등 저항정신을 실천하다 그만 치안 방해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 일로 그는 1944년 12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4월 3일 옥중 순국하였다. 19살 건장한 청년이 얼마나 모진 고문을 했으면 옥중 순국을 당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9형제의 맏이였던 김용창 지사의 순국 이후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열흘 만에 숨졌고 어머니 혼자 올망졸망한 여덟 자식을 거두어야 했으니 그 비참한 삶의 여정은 고통의 연속이었으리란 생각이다.

     
   
▲ 광복 70주년 애국지사 김용창의 추모제를 마치고(6.11 향남면 상두리 선영)

 김용창 애국지사의 순국은 역사 속에 묻혀 있다가 1995년에서야 정부로부터 뒤늦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 되었다. 그간 후손이 없어 제사도 변변하게 못 지내오다가 최근에 마을 유지들과 광복회화성시지회(지회장 신창우)가 주축이 되어 추모제를 지내고 있으며 어제 6월 11일 오전 11시에 상두리 선영에 세워져 있는 그의 흉상 앞에서 40여명의 관계자들이 모여 추모제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당시 7살이던 김용창 지사의 동생 김용무(77살) 씨가 참석하여 70년전 꽃다운 나이로 숨진 형님의 고귀한 순국의 의미를 참석자들과 함께 새겼다.

 추모제에 참석한 기자는 넉 달 뒤에 맞이할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5년 4월 3일 애석하게 순국의 길을 걸은 열아홉 청년 김용창 애국지사를 생각하며 가슴이 메어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