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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자전거 평화기행

조선 정벌에 협조 안 했다고 일본에 침략당해

[오키나와 자전거 평화기행 ③]

[우리문화신문=이규봉 교수]  호텔의 아침식사는 6시 반부터였다. 전면 유리창을 통해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식당에는 비수기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럼에도 큰 소리 내는 사람들 없이 조용하게 다양한 뷔페식의 아침을 즐기고 있다.

 

작은 부주의가 펑크를 내다

8시에 출발했다. 자전거를 맡긴 곳에 표를 주니 자전거를 내준다. 날씨가 흐린 것이 꼭 비가 올 것 같았다. 오늘 예정된 곳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나키진 성터(今歸仁城跡)다. 어제 타고 왔던 국도 58번을 타고 해안을 따라 계속 올라갔다. 차도로 달리다 인도로 올라서려 했다. 인도가 차도보다 약간 높아 가볍게 올라갈 수 있겠거니 하고 산악자전거 타던 습관으로 핸들바를 누르고 앞바퀴를 들었으나 넘어지고 말았다.

 

   
▲ 산악자전거 타던 버릇 탓에 펑크 나다.

 

   
▲ 거북이 모양을 한 섬이 눈앞에 있다.

아차! 내 자전거 앞바퀴에는 충격완화장치가 없지! 산악자전거는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 앞바퀴가 받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대부분 충격완화장치가 붙어있다. 그래서 핸들바를 양손으로 누르면 핸들바가 내려가고 다시 튀어나오는 그 반동을 이용해 앞바퀴를 충분히 들 수 있다. 그런데 내 자전거는 도로주행용이라 그것이 없었던 이다. 그 충격에 펑크가 났다.

 

젖은 몸을 따뜻한 국수로 달래다

나고시에 도착한 후 449번을 타고 왼쪽 해안가를 따라 돌았다. 11시 정도 되니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그 양은 많지 않지만 계속 오고 있으니 우비를 입어야 했다. 나카진성터는 산 중턱에 있었다. 처음으로 언덕다운 언덕을 약 2킬로미터 정도 올라갔다. 비가 옴에도 관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터는 매우 잘 보존되어 있었다.

나카진 성은 북부에 있던 지방 세력 호쿠잔의 본거지라고 한다. 호쿠잔 왕은 이 성을 거점으로 섬의 북부를 지배하고 중국과 무역을 했다. 그러나 1416년 주잔의 쇼하시에게 멸망당했다. 성벽은 아주 견고하게 잘 지어져 있다. 1962년 복원된 헤이로몬이라는 하나뿐인 좁은 문을 통해 올라가 보니 사방 모두 바라볼 수 있었다.

 

   
▲ 나키진 성터 안

 

   
▲ 나키진 성터 들머리

내리는 비로 성을 충분히 볼 여지가 없었다. 점심을 하려고 성터 휴게소로 들어갔으나 식당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도 국수집. 문은 열려있어 으슬으슬 춥다. 젖은 몸을 따뜻한 국수로 달랬다. 동남아처럼 오키나와 국수에도 꼭 고기가 들어간다.

 

산을 넘는 우둔한 결정!

계속 내리는 비로 일정이 바뀌었다. 원래는 해안을 계속 돌려고 했으나 비로 인해 숙소에 가는 것이 급했다. 다시 내려가 해안가를 돌아가는 것이 짧은 거리 일지 아니면 올라온 김에 산을 넘어 숙소로 바로 가는 길이 더 짧을지 망설이다 산길을 타기로 했다. 나중 알았지만 이 결정은 참으로 잘못됐다.

산으로 좀 올라오기는 했으나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여러 구비의 고개를 더 넘어야 했다. 그렇다고 거리가 더 짧은 것도 아니었다. 이럴 줄 미리 알았다면 해안으로 내려갈 걸 하는 후회가 오기도 한다. 인생 살다 보면 이익을 볼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는 당차게 그 손해를 받아들이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나고시에 있는 호텔에 도착하니 4시나 되었다. 오늘은 80킬로미터를 주행했다. 이 호텔에는 따로 자전거를 보관할 곳이 없어 로비에 신문지를 깔고 네 대를 벽에 걸쳐 놓았다. 방으로 가 보니 모든 등이 백열전등이 아닌 LED 등이다. 이런! 열이 하나도 안 난다. 무엇보다 신발이 젖었는데 아무래도 내일은 젖은 신발을 또 신어야 할 것 같다.

 

류큐왕국과 류큐 처분

류큐(琉球)는 약 1만 8천 년 전에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거쳐서 12세기에 농경사회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구스크(城砦) 시대를 이루었다. 구스크는 조금 높은 구릉 위에 있는 성과 요새를 뜻한다. 1322년에서 1429년에 이르러서는 북부에 호쿠잔(北山), 중부에 주잔(中山) 그리고 남부에 난잔(南山) 세 세력이 존재한 산잔(三山)시대를 이루었다.

명나라 건국 뒤 1372년에 파견된 사절단 덕에 류큐란 글자가 《명실록(明實錄)》에 처음으로 등장하면서 류큐왕국으로 알려졌다. 이후 1874년까지 500년에 걸쳐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조공 세계의 일원으로 중국과는 사대관계 그리고 조선과 일본과는 교린관계를 가지며 독립왕국을 유지했다.

류큐는 명나라에 조공하면서 획득한 상품으로 여러 나라와 중계무역을 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우리나라와는 1389년 주잔왕이 왜구에게 잡혀 온 고려인을 송환하면서 교류가 시작됐다.

1417년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보면 “류큐는 땅이 좁고 인구가 많아 바다에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하는 것으로 직업을 삼는다.”라 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도 400여 회 이상 나온다. 조선으로 가는 항로는 왜구가 활동하므로 규슈와 쓰시마를 매개로 한 간접무역 방식으로 우리나라와도 많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한다.

난잔의 장수 시쇼(思紹)가 1406년 주잔을 멸망시키고 주잔왕이 되어 제1쇼시(尙氏) 왕조를 세웠고, 그 아들 쇼하시(尙巴志)가 1416년 호쿠잔을 그리고 1429년 난잔을 멸망시키고 통일했다. 그 후 수도를 슈리성으로 옮겨 류큐왕국이 되었다. 중국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려는 류큐의 요청과 류큐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중국의 이해가 일치하여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걸쳐 23번의 책봉사를 보냈다고 한다.

 

   
▲ 세계문화유산에오른 슈리성

 

   
▲ 1992년 복원된 슈리성의 정전

 

1469년 쿠데타로 쇼엔(尙円)이 집권하면서 제2쇼씨 왕조가 시작되었다. 제3대 쇼신(尙眞)왕(1477~1526재위) 때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1609년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 계획에 협조 안 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사쓰마(蕯摩)가 침략해 반식민지로 삼았다. 국왕과 국정은 유지되었으나 주권은 빼앗겼고 총생산의 50%나 되는 공물을 바쳐야 했다. 이로부터 1874년까지는 사쓰마번의 지배를 받는 반독립왕국이 되었다.

류큐의 동남아 무역은 말라카에 이르러 세계적인 무역 네트워크에 연결되었으나 16세기 들어 유럽 세력이 진출하고 명나라가 쇠락하면서 중국 상인이 해외에 진출하고 일본 상인이 동남아시아에 직접 진출하는 등 중계무역의 지위를 잃고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1879년 일본은 류큐를 오키나와현으로 하고 왕을 유배시켜 류큐왕국은 멸망했다. 이와 같이 중국과 일본의 지배를 동시에 받고 있던 류큐를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킨 것을 류큐 처분이라 한다.

류큐왕국은 일본과 공통의 문화적 기반으로 출발했으나 독자적인 개성을 띄어 일본과 명확히 구별되며 아시아의 국제사회와 교류하면서 역사를 형성해 일본의 고유 영토는 아니었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면서 사실상 주권을 상실해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 일본의 한 지방으로 완전히 귀속되었다. 이로써 류큐왕국은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한 현으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