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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자전거 평화기행

오키나와, 아시아의 평화 허브로 다시 태어나길

[오키나와 자전거 평화기행 ⑥]

[우리문화신문=이규봉 교수] 


공항에 자전거 짐을 맡기고 숙소로 가다


 

이곳서 공항까지는 약 20킬로미터도 채 안 되었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등에 지고 공항에 도착하니 5시이다. 오늘의 주행은 130킬로미터나 되었다. 맡겼던 짐을 찾아 자전거를 포장한 후 다시 네 대의 자전거를 싼 짐을 보관소에 맡겼다. 공항에서 바로 모노레일을 타고 숙소가 있는 역까지 가는데 약 20분 걸렸다. 내일 다시 모노레일을 타고 와야 하므로 24시간 내 여러 번 탈 수 있는 승차권을 구입했다.

 

다음 날 8시에 숙소를 나와 모노레일을 타고 슈리성 공원에 갔다. 오키나와 전투로 모두 부서진 궁궐을 1992년에 복원하여 슈리성터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류큐왕국의 문화유산은 1609년 사쓰마군에 의해 약탈되었고 또 푼돈에 팔려 본토로 반출되었다. 그러한 문서는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 전투 후에는 미군들에 의해 대량으로 반출되기도 했다. 마치 일본에 합병된 조선의 모습이 생각나게 한다.


 

    

 

야만인이라며 오키나와인 한 쌍 전시, 1903년 오사카 박람회 인류관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치욕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1903년 오사카 박람회 인류관에 야만인이라며 오키나와인 한 쌍을 다른 민족들과 함께 전시한 것이다. 여기엔 조선인도 있었다고 한다. 마치 유럽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해 원주민을 잡아다 전시한 것처럼.

 

또한 오키나와 전투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 학살하고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저질러진 집단자결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는 역사를 왜곡해 일본군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미화시켜 오키나와 사람들, 특히 생존자나 희생자의 가족들의 억장을 무너지게 했다.

 

미국과 일본은 모두 오키나와 주민을 대화의 상대보다는 억누를 대상자로만 보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일본은 전 국토가 평등하게 기지 부담을 져야 함에도 실제로는 오키나와에 그 모든 부담을 떠 넘겼고 미국은 토지를 마음대로 징발했다.

 

오키나와의 평화운동은 바로 이러한 일본의 불평등 대우에 대한 반대이자 미국의 반식민지주의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볼 수 있다. 일본 헌법의 적용도 받지 못하고 군사기지와 공생하라는 것은 겨우 전쟁에서 살아남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겐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106류큐 자치공화국연방이름으로 독립선언


 

이러한 구조적인 오키나와 차별에 오키나와 민중이 투쟁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결국 오키나와는 일본과 미국 두 나라와 맞서 싸우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은 본토의 차별에 대한 저항으로 일부 주민들은 20106월에 류큐 자치공화국연방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오키나와가 분명 일본의 영토라면 똑같이 평화헌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미군기지가 축소되고 결과적으로 완전히 철수하여 오키나와가 예전 류큐왕국이 행했던 대로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동남아와 동북아시아를 잇는 평화 허브의 역할을 하기 바란다.

 

참고자료

다카라 구라요시, 류큐왕국,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08

아라사키 모리테루, 오키나와 현대사, 논형, 2008

개번 매코맥, 노리마쯔 사또꼬, 저항하는 섬 오끼나와, 창비, 2014

통일뉴스, <제주 4·3을 떠오르게 한 오키나와>, 2014.4.1.

한겨레 21, <성명서가 아니라 연구가 필요하다>, 2016. 2, 10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