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우리 부부가 결혼한지도 어언간 27년이란 시간이 지나왔다. 서로 아끼기도 하고 서로 다투기도 하면서 꿈같이 흘러간 세월, 지금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간 이국땅에서 겪었던 그 고난의 시간들이 우리 부부, 우리 가정으로 하여금 더욱 튼실한 하나로 되게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된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연들이 있다.
금방 결혼하여 우리는 자그마한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였다. 시집의 가정형편과 서로간 생활습관의 차이, 그리고 남편이 단위일과 친구들 만남으로 매일 술과 동무하다 보니 우리 사이에는 충돌이 그칠 줄 몰랐다. 집에는 화약냄새로 가득하였고 다투기를 밥 먹듯 하였다. 나는 출근하면서 혼자서 애를 돌보는 형편이라 늦게 돌아오는 남편이 야속하여 집문을 잠근 채로 열어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탕, 탕…” 아무리 두드려도 안 되는지라 술김에 화가 잔뜩 난 남편이 발로 문을 걷어찬 탓에 집문이 망가지기도 하였다.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법원의 문턱까지 가기도 하였다.
지루한 결혼생활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에서였던지 아니면 셋방살이를 면하고 남부럽지 않은 가정생활을 갈망해서였던지 병원에서 주원부주임 겸 의무과 과장직까지 맡아하며 잘 나가던 남편은 어느 날 직장을 버리고 일본에 갈 의향을 내비치었다. 처음에는 그 좋은 직업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까와 반대하였으나 돈 없이 이제 어떻게 애를 공부시킬 것이며 셋방살이는 또 어떻게 면할 것이냐 하는 남편의 말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때 넉넉한 살림형편이 아니다 보니 남편은 남들한테서 3전짜리 리자돈을 꿔가지고 떠났다.
남편이 떠나서 일 년 삼개월 후에 나도 딸애를 시댁에 맡기고 일본행에 나섰다. 우리 부부는 처음에 이께부끄로(池袋)에 집을 세맡았다. 저녁이면 남편은 곧장 처음 일본에 왔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군 하였다. 남편은 그 처음 일 년 간 공부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는데 집에 리자돈 보내고 학비까지 물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한번은 “콤비니(마트)”에 가서 물고기도안이 찍혀있는 통졸임을 보고 값싼 반찬으로 골랐는데… 후에 알고보니 “뻬또후도(宠物食物, 애완동물 먹이)”였단다. 그런데 남편은 그것도 모르고 근 반년동안이나 그 “개먹이”를 사서 먹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것이 맛이 기차게 있습데.”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는 남편의 말이었다. 아무렇지도 않듯이 하는 남편의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
남편의 고생은 이뿐이 아니었다. 일본에 도착한지 한주일도 안 되여 남편은 “아까바네(赤羽)”란 곳으로 일자리 찾으러 떠났다. 이집저집 다니면서 일자리를 구하였으나 금방 온지라 일본말도 잘 안되고 하여 가는 곳마다 퇴박을 맞았다. 온 하루를 헤매었으나 일자리는 고사하고 점심밥도 먹지 못했는지라 배에서는 “꼬르륵, 꼬르륵…” 소리만 나고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저녘 여섯시가 넘게 되자 남편은 지친 몸을 달래면서 숙소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상 전차를 타려고보니 그 차비가 인민페로 몇 십 원이나 되였다. 그래서 지도책을 펼쳐보니 숙소와 가까와 보였는지라 걸어갈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정작 걷고 보니 그 거리가 엄청나게 멀었다. 게다가 길마저 어긋나 경찰한테 물어보면서 겨우 숙소에 도착하였는데 때는 이미 새벽한시도 넘었다고 했다.
후에 남편은 “공부만 하여서는 돈을 벌수 없다.”고 하면서 중도에서 학업을 그만두고 자그마한 침구안마진료소를 임대했다. 나도 하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진료소의 청소를 한다든가, 재무관리를 한다든가, 찌라시(광고전단지)의 인쇄와 배포를 맡아한다든가 하면서 남편의 시중을 들었다. 한번은 임신한 몸으로 찌라시를 뿌리러 부자동네에 갔다. 그런데 나는 어느 집 우체통에 찌라시를 넣는 데만 정신 팔리다 보니 그 집 울안에 큰개가 있는 것을 미처 못 봤다.
문뜩 그 개가 사납게 덮치자 나는 넘어져 그만 배속의 아이가 락태되고 인공류산수술까지 받게 되였다. 내가 괴로워하자 곁에서 시중들던 남편은 나를 꼭 껴안아주면서 “너무 상심하지 마오. 하루 빨리 당신의 몸을 춰세우는 것이 우선이요…”라고 하면서 나를 달래 주었다. 이국땅에서의 그때 그 마음고생 몸고생을 지금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할 수 있으랴!
부모도 형제도 하나 없는 낯 설은 이국땅에서 부모님 그리움에 두고 온 자식생각에 눈물겨웠지만 그래도 그 고난의 나날이 있었기에 우리는 부부는 서로 배려할 줄 알게 되고 리해와 믿음이 더욱 깊어지게 되였다. 지금 딸 하나, 아들 하나에 남부럼 없이 오붓한 가정이 있게된것은 모두 그때 이국땅에서의 고생이 가져다준 것이다. 그 힘든 시간을 바치고 다시 찾은 우리 가정의 행복이 오늘날 꽃처럼 활짝 피여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고마움을 담아서 가만히 외워본다.
“여보,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