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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듣는 이야기

김귀남 여성독립운동가 외손녀로부터 받은 편지-1

졸업장 등 귀중한 유품 목포정명여중고에 기증 결정한 사위와의 대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지난 2월 28일 목요일, 필자는 한 여성독립운동가 후손으로부터 장문의 메일 편지 한 통을 받았다. 10년 동안 꼬박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후손으로부터 이렇게 긴 편지를 받은 적은 없던 터라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자신을 김귀남(金貴南, 다른 이름 김영애(金瑛愛, 1904.11.17. ~ 1990.1.13. 실제는 1901년생이고 호적에는 1904년으로 되어 있음) 지사의 외손녀인 문지연이라고 소개한 편지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느닷없는 메일로 놀라셨겠지만, 전부터 꼭 한번은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 동안 좀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문지연 씨의 사연은 이러했다. 필자가 쓴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5권)에 실린 외할머니(김귀남 지사)를 위한 헌시와 독립운동 기록을 지난해서야 알게 되었고 이 책을 계기로 수년 만에 외할머니의 유품들을 다시 챙겨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그동안 유품은 후손이 간직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외할머니의 각종 유품들을 집에서 보관하고 있었지만, 말이 보관이지 사실상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은 하루하루 현실을 살아가는 일상에만 집중해서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밖에 할머니의 유품들을 들여다 볼 시간이 없었는데 사실상 집안에 묵혀두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갑 안에서 점점 빛바래고 망가져가는 외할머니의 유품들을 정리하면서, 이렇게 간직한다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지 고민을 거듭하던 참에 외할머니(김귀남 지사)를 위한 헌시(獻詩)를 쓰고 외할머니의 독립운동을 세상에 알리고 있었던 이 선생님을 생각하니 감사함 이전에 죄송함과 부끄러움이 점점 커져왔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역사를 세상에 펼치고 영원히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정작 후손은 현실에 치여 일상을 살아가기 바쁘다는 핑계로, 그저 외할머니의 제사와 명절을 챙기고, 일 년에 한두 번 하는 성묘 정도로 기본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며 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버리는 우를 반복하고 있어서 부끄러웠습니다.”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가족들과의 협의 끝에 외할머니의 유품을 출신학교인 목포정명여자중고등학교(당시 정명여학교)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김귀남 지사의 외손녀 편지에 그만 눈물이 왈칵 솟았다. 아! 이런 후손 분이 계시는구나. 그러고 보니 5년 전 김귀남 지사에 대한 헌시(獻詩)와 그의 독립운동을 기록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동포들아 자유가 죽음보다 낫다

목숨을 구걸치 말고 만세 부르자

졸업장 뿌리치고 교문 밖 뛰쳐나온

열일곱 소녀

 

무안거리 가득 메운 피 끓는 심장소리

뉘라서 총칼 겁내 멈춰 서랴

 

항구의 봄바람

머지않아 불어오리니

삼천리 금수강산에 불어오리니

 

동무들아

유달산 높은 곳에 태극기 꽂자

 

그 깃발 겨레 얼 깊은 곳에

영원히 펄럭이리니.

 

-유달산 묏마루에 태극기 높이 꽂은 “김귀남” <서간도에 들꽃 피다> (5권) 수록-

 

 

 

외손녀의 이야기는 편지에서 계속 이어졌다.

 

“외할머니 김귀남 지사는 남편 서인식 사이에 서정규, 서혜경 자매를 낳았는데 아들은 20대에 요절하였고 한 점 혈육인 딸 가족과 살았습니다. 그러나 외할머니가 1990년에 돌아가시고 한 달 뒤에 암 투병 중이던 따님(필자에게 편지를 쓴 외손녀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셨지요.  천주교 신자였던 모녀(김귀남 지사와 딸 서혜경)는 경기도 광탄에 있는 '바다의 별 천주교 불광동 성당 공동 묘지'에  27년 간 함께 모셨다가 재작년 이장하는 과정에서 불광동 성당 유해봉안소와  전남 영암으로 유해를 나눠 모시게 되었습니다. " 라는 이야기를 했다.

 

 

유해를 불광동 성당 유해봉안소와 전남 영암 두군데에?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장문의 편지를 쓴 김귀남 지사의 외손녀인 문지연 씨에게 연락을 하여 지난 3월 8일 금요일 낮 2시 불광동 집에서 만났다. 이 집은 김귀남 지사가 90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던 집으로 집에는 사위 문영식(85세) 선생이 반갑게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뜸 유해에 관해서 물으니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김귀남 지사와 따님 서혜경 씨의 유해는 화장한 뼈 한 조각을 성당내 유해봉안소에 모시고 나머지 유해는 화장하여 사위 문영식 선생의 선산인 전남 영암에 모셨다는 것이었다.

 

“장모님(김귀남 지사)은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을 하신 분입니다. 국방의 의무도 없는 어린 중학생들이 나라를 되찾겠다고 독립운동을 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장모님은 매우 과묵하셔서 당신이 독립운동하신 것을 주변에 잘 알리지 않았습니다. 서훈에 관한 것도 친일 정권하에서는 서훈을 받고 싶지 않다고 하셔서 돌아가신 뒤에서야 서훈 신청을 해서 1995년(1990년 작고)에 대통령표창을 받게 되었지요.”

 

김귀남 지사의 사위인 문영식 선생은 과거 장모님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필자에게 보여주었다. 또한 김귀남 지사가 어린 시절 목포북교초등학교서부터 목포정명여학교(현 목포정명여자중고교)에서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루고 서울로 상경하여 배화여학교와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를 나온 인텔리였으며 돌아가시기 전까지 올곧은 철학으로 국가관이 투철한 분이었음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외손녀가 정성껏 내온 딸기와 차 한잔을 마시며 김귀남 지사의 사위인 문영식 선생과 대담이 이어졌다.

 

“장모님(김귀남 지사)은 서기 1901년 11월 17일(음력) 목포시 남교동 13번지에서 아버지 김윤언과 어머니 이윤옥 사이에서 일남 일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목포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정명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1년 11월 14일, 1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시위를 펼치다가 일경에 잡혀 징역형(6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지요.

 

만세시위로 정명여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서울로 올라와 사립학교인 배화여학교(4년제)에 편입하여 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일본 유학을 위해 다시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5년제)에 편입, 동교를 1년만에 졸업하고 일본 교토에 있는 동지사대학에 유학하였습니다. 이 무렵 오빠 김영식의 친구인 서인식(와세다대학 재학)과 자유 결혼하여 슬하에 서정규, 서혜경 두 남매를 두었습니다.

 

한편 남편인 서인식이 유학 중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김귀남 지사도 이에 동조하여 다시 항일 독립운동에 매진하였으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부모는 딸(김귀남 지사)의 안전을 위해 즉시 귀국시켜 가사에 종사케 하여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결국 청운의 꿈을 접어야 했지요. 그러나 서인식과의 결혼 의지는 확고하여 두 사람의 결혼은 뜻대로 성사되었습니다.

 

남편 서인식은 와세다대학 철학과에서 2년 수료 (이후 중퇴)후,  경성제대(현 서울대)에서 명예 철학교수로 재직 중 일경에 잡혀 중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5년 형기를 마친 뒤 석방되었습니다. 이후 1947~1948년 무렵 큰 형님을 뵙고자 고향인 함흥에 갔다가 남하하지 못하였습니다.”고 했다.

 

 

 

사위 문영식 선생의 장모님(김귀남 지사) 이야기는 구체적이고 자세했다. “장모님(김귀남 지사)은 천성이 온후하고 외유내강의 여성이었으며, 가톨릭 신앙생활에 몰두하였습니다. 평소에 성경, 신문, 소설 등 독서에 열중하였고 과묵하였으며,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아서 독립운동에 대한 숨은 얘기들을 많이 듣지 못하였지요. 그러나 불의에 대해서는 단호하였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권위주의 정권을 향한 비판은 언제 어디서든 거침없었지요.

 

사회활동은 일체 하지 않고 자녀 교육에 전념하였으나, 불행히도 큰아들 서정규(문태고 졸업)가 군입대 후 휴가 중 급사하여 충격을 받고 모녀가 함께 천주교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장모님은 남편 서인식과 함께 일경에 쫓겨 다녔고, 광복 후에는 남북 분단으로 이산가족이 되어서 어려운 생활을 하였지요. 어린 시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갔던  여성(장모님)이 항일운동, 대학 중퇴(타의에 의해), 이산의 아픔과 아들의 급사 등 비극적인 삶의 연속으로 좌절과 체념의 세월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신앙생활에 전념하면서 마침내 지난날의 모든 아픔과 상처를 극복하여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강한 의지를 지켜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년에는 딸ㆍ사위와 외손자들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 편히 여생을 보내다가 딸 서혜경의 중병설을 듣고 대성통곡 하신 지 사흘 만에 노환으로 작고하였지요. 향년 90세로 서기 1990년 1월 13일 13시 45분에 운명하였습니다.”고 장모님의 생을 말해주는 사이 필자도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일제강점기에 여학교와 일본유학(동지사대학 유학 기록은 확인 못한 상태)을 한 김귀남 지사는 풍부한 문학적 소양을 갖추었고, 독서와 음악 감상을 즐겼으며, 수예에 능하였다고 했다. 여학교 때의 졸업장과 상장, 졸업앨범과 관련된 학생시절의 유품과 손수 수놓은 수예품등은 지난해 목포정명여자중고등학교에 모두 기증했다.

 

필자는 목포정명여자중고등학교(중학교 박형종 교장, 고등학교 정종집 교장)에 기증된 김귀남 지사의 유품과 김귀남 지사가 영면하고 계신 영암  소재 무덤에 가기 위해 외손녀 문지연 씨와 문지연 씨의 작은 아버지 문홍식 선생과 함께 지난 4월 3일 아침 7시 40분, 서울역에서 목포행 KTX에 몸을 실었다.  

<제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