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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훈민정음 창제와 한글을 빛낸 사람들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行道] 함께 걷기 33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의 사맛[커뮤니케이션]의 길을 살펴보고 있는데 이번 글에서는 지난 10월 9일 한글날을 지나며 훈민정음(한글)을 빛낸 그간의 역사적 인물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현재 서울시 서울도서관에서는 《훈민정음》 해례본 간행 573돌을 기념하며 한글을 빛낸 인물 28명의 업적을 이달 말까지 전시하고 있다. 그곳에 전시된 사람을 중심으로 한글의 발전사를 알아보자. 훈민정음 이야기의 시작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에서 출발한다.

 

세종(1397~1450) :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서로 뜻이 통하지 않아’ 당시의 문자 즉 한문을 읽지 못하는 백성을 어여삐 여겨 우리 문자를 창제해 쉽게 편히 이용하게 하려한다는 뜻을 명확히 하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아래 ‘해례본’)에서는 인간이 소리를 내는 입술, 이, 혀, 목 등의 모양과 구조를 살펴 자음과 모음을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훈민정음을 만들기 이전부터 세종은 이두(吏讀)를 써서 중요한 법률 조문을 골라 백성에게 알리게 한다든가 몰라서 생활 속에서 입게 되는 억울한 피해를 줄여보려고 했다. 그리하여 중국의 음운 등을 연구해 1443년에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이어 정인지, 신숙주 등 젊은 학자들에게 《훈민정음》 해례본을 편찬하도록 했다. 그와 더불어 훈민정음을 사용해 만든 조선 건국 이야기인 《용비어천가》와 불교서사시인 《월인천강지곡》을 각각 1447년과 1449년에 펴내 새로운 문자의 뛰어남을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조선에 독자적인 문자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최만리 등 유학자들은 한자가 있으니 새로운 문자를 쓸 필요가 없다고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세종은 흔들리지 않았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쓴 8대 공신

 

새로운 문자의 원리를 밝힌 《훈민정음》 해례본을 쓴 8대 연구자는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을 들 수 있다.

 

* 정인지(1396~1478) : 해례본을 쓸 때 신하 대표로 창제의 배경과 목적 취지 등을 밝힌 마무리 글(정인지 서)을 썼다. 이후 최초의 훈민정음을 적용해 조선 건국의 배경을 쓴 《용비어천가》를 펴내는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 최항(1409~1474) : 집현전 학사로 해례본과 《용비어천가》를 짓는 일과 중국의 발음 사전 《운회》와 누에고치 생산 과정을 담은 《잠서》의 한글 번역에 큰 역할을 했다.

 

* 박팽년(1417~1456) : 집현전 학사 가운데 학문과 문장, 글씨 모두 뛰어나 ‘집대성’이라는 칭호와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해례본을 쓰고 《운회》를 한글로 번역했다.

 

* 신숙주(1417~1475) : 외국어 실력이 뛰어나 해례본 집필에서 핵심 역할을 맡아 성삼문과 함께 중국을 오가며 훈민정음 표기법을 연구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발음 표준서인 《동국정운》을 대표 저술했다.

 

* 성삼문(1418~ 1145) : 세종의 명을 받아 신숙주와 함께 중국을 여러 차례 오가며 음운을 연구하여 해례본 집필과 《동국정운》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 이개(1417~1456) : 해례본을 쓰고 《운회》를 한글로 번역하여 세종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 《동국정운》의 번역과 편찬 작업에도 참여했다.

 

* 이선로(? ~1453) : 해례본을 짓고 《운회》를 한글로 번역했다. 《동국정운》 편찬에 참여하고 언문청에서도 활동했다.

 

* 강희안(1417~1464) : 왕실 친척을 관리하는 돈녕부 주부로 시, 서예, 그림에도 능하여 해례본 쓰는 일에 뽑혔다. 《운회》 번역과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등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이밖에도 한글이 세상에 나오고 또 백성에게 뿌리를 내리게 한 여러 시대에 걸쳐 애쓴 공로자들이 있다.

 

 

한글 발전 공로자

 

* 문종(1414~1452) : 30년간 세자로 있으면서 아버지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와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학연의》에 한글로 토와 뜻을 달아 새 문자 한글을 활용한 교육을 실천했다.

 

* 정의 공주(1415?~1477) : 세종의 둘째 딸로 천문과 수리에 밝고 절대 음감을 지녀 세종의 훈민정음 연구에 도움을 많이 주었다. 특히 섬세한 소리 변화와 문자 관계에서 도움을 주었다.

 

* 신미대사(1403~ 1480) : 한글 보급의 숨은 공신이다. 세종이 불경 책을 펴내어 훈민정음을 보급할 때 큰 역할을 했다. 1446년 해례본이 나온 뒤 수양대군이 《석보상절》을 지을 때나 세종이 《월인천강지곡》을 지을 때 도움을 주고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참여했다.

 

* 세조(1417~1468) :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과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을 합해 《월인석보》를 펴내고, 관리를 뽑는 시험 과목에 훈민정음을 넣는 등 세종의 뜻을 이어 한글 보급에 앞장섰다.

 

훈민정음은 여러 시대를 거치며 조금씩 닦여져 왔다.

 

세종 시대 이후

 

* 최세진(1468~1542)은 1527년 훈몽자회를 펴내면서 한글 자음자와 모음자의 명칭을 정했다. 한글을 쉽고 빠르게 배울 수 있는 ‘가갸거겨 ...식’의 음절표의 틀을 마련했다.

 

* 허균 (1596~1618)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었다. 소설에 당시 백성들이 처한 현실과 민중의 갈망을 담고 양반들의 잘못된 행태를 비판했다.

 

이후에도 한글을 즐겨 쓴 왕실여성으로 인목왕후 김씨(1584~1632)가 있다. 조선 14대 임금인 선조의 계비(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이다.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에 한글 공문서를 내려 보내는 등 한글을 많이 사용하고 왕실 여성 가운데 가장 오래된 한글 편지를 남겼다.

 

그리고 숙종 시대에는 김만중(1637~ 1692)이 한글을 나랏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어머니를 위해 지은 《구운몽》과 숙종 임금의 잘못을 일깨우기 위해 쓴 《사씨남정기》같은 한글 소설을 남겼다.

 

실학시대에는 신경준(1712~1781)이 훈민정음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운해훈민정음》(지정서)을 펴낸 한글연구에 이바지했다. 정약종(1760~1801)은 한글 성경이 없던 시절 한자를 모르는 천주교 신도들을 위해 우리나라 최초로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를 펴냈다. 천주교를 통해 한글이 널리 퍼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세종 시대에는 민간에 퍼져 있던 불교를 통해 그리고 실학시대에는 천주교를 통해 다음 세대에는 기독교 성경을 통해 한글은 폭발적으로 확산된다.

 

특이한 사람으로는 조선 후기 한글 소설을 읽어주는 전기수가 있었고, 고종은 한글을 제1 공식문자로 선언한 임금이 되었다. 갑오경장(1894)이 일어난 격동기에도 한글 보급 정책을 실현했다.

 

근현대에 와서는 최초의 한글 교과서를 펴낸 헐버트(1863~1949)가 있고, ‘한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퍼뜨리고 최초의 국어사전인 《말모이》를 편찬한 주시경(1876~1914), 우리말 문법 체계를 완성한 최현배(1894~1970), 한글 기계화의 길을 연 의사 공병우(1906~1995)가 있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소중하게 간직해온 전형필(1906~1962)이 있다.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 피난 갈 때 이 책을 품속에 넣고 다녔다는 후일담이 있다.

 

역사적으로 훈민정음 한글을 창제하고 지키고 연구해온 여러 사람들의 노력을 생각하며 이제 한글이 세계로 뻗어나갈 차례다. 인터넷 시대를 맞아 한글자모를 통한 세계 언어의 중간 언어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에 하지 못하고 있는 과제도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