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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스스로 낮추고 사유하는 시간을 가진 세종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行道] 함께 걷기 38]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의 사맛[커뮤니케이션]의 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세종의 사유 습관과 스스로를 낮추어 백성의 삶을 실현하는 모습에 대하여 살펴보자.

 

나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세종에게서 볼 수 있는 마음의 하나는 먼저 자신을 지극히 낮은 곳으로 내려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분사회에서 신분은 절대적 구분이 되는데 심지어 자신을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비유한다. 이는 정신적으로 종교의 세계로 자신을 끌어내리는 일이다.

 

종교의 세계에는 신분이 없다. 스님은 다만 안내자일 뿐이지 계급이 아니다. 그런데 세종은 스스로를 ‘한 고깃덩어리’로 일컫는다. 낮은 한 백성으로 내려가 절실하게 불성[불교적인 마음]을 보인다. 유교 국가에서 불교가 어찌 가능할까 여길 수 있는데, 당시 조선은 유학을 국시로 하고 있었지만, 불교는 사회적 풍속에 따라 개인적으로 신봉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깃덩어리 : “이제 한 고깃덩어리가 되어 방안에 앉아서 환자(宦者)로 하여금 말을 전하니, 이것이 모두 웃음을 사는 일이다. 내가 부덕(不德)하기 때문에 경들로 하여금 진언(進言)하지 못하게 하였다. 경들이 또 나이 늙어서 이름을 낚고 녹을 가지는 것으로 말을 하니 내가 생각지 않은 말이다. 비록 젖내나는 아이라도 내게 말을 하면, 내가 ‘너는 명예를 원한다.’라고 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경들이겠는가.”(《세종실록》 30년7월23일)

 

위에서 세종은 ㉠나는 어리석고 고집이 있다. ㉡내가 부덕하다. 그래서 진언하지 못하게 했다. ㉢나는 명예를 원치 않는다. [釣名] ㉣ 칭찬을 원하지 않는다. ㉤“한 고깃덩어리[一塊肉]가 되어 방안에 앉아 있다.” 여기서 세종 이도는 ‘이름을 낚지 않는다.’라는 유교의 논리와 불교적인 표현인 ‘한 고깃덩어리’라는 용어를 함께 쓴다.

 

내용은 ‘나는 어리석고, 부덕하고 그래서 그토록 강조하던 진언을 막았고, 나는 칭찬을 원할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라고 한다. 사람이 이보다 더 낮게 자신을 낮출 수 있을까. 어느 면에서 초월의 경지에 들어가 있다. 그것은 마음이 원하는 ‘불교의 경지’다. 특히 ‘한 고깃덩어리[一塊肉]’에서 보듯 세종은 지금 개인 이도라는 이름을 유지하는 작은 한 백성으로 실재하고 있다. 평등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또한 불교의 다음 논리를 연상시킨다.

 

불가의 유식론에서는 서양 철학의 이분법 대신에 현상과 실제의 조화나, 양자를 초월할 수 있는 종합적인 사고를 요구한다. 그 결과 인간도 하늘의 섭리에 따르는 피조물이나 자연계를 지배할 권능이 있는 ‘유일자’라기보다 천지만물과 조화를 추구하는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다.

 

예컨대 ‘나’라는 존재는 육체, 물질과 관념이라는 이중구조 속에 있지 않고 오히려 양자의 통합체로서의 ‘몸’이다. 따라서 ‘몸’은 넋이 빠진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자아와 세계와의 교통방식이자 육신의 통합물이다. 이런 ‘몸’은 말뿐이 아니라 눈빛, 낯빛, 몸짓과 같은 비언어적 매개물을 통해 세계와 의사소통을 한다. (김정탁, 《禮와 藝》, 한울 아카데미, 2004)

 

세종은 저 아래로 내려가 스스로 돌아보는 사유가인 셈이다. 이런 생각하는 습관은 잦은 이어(移御)에서도 들어난다.

 

이어(移御)를 통해 스스로 백성의 생활을

 

 

세종은 임금이면서 스스로 한 사람의 백성이라는 나타남은 잦은 이어(移御)에서 찾을 수 있다. 이어는 궁이 아닌 사적인 공간에서의 몸의 자유를 통해 사유의 자유로움을 찾는 일이고 스스로 임금이 아닌 한 사람의 백성으로 내려가는 일이다.

 

세종은 임금의 자리에 있던 중 창덕궁 궁인 중 병자가 많아 중궁과 함께 경복궁(세종 3/5/7)으로 옮기고, 초기에는 상왕의 이어에 따른 문안 등 여러 이유로 창덕궁 - 수강궁 - 경복궁 - 락천정 - 연희궁 - 상림원 - 동궁 등으로 옮겨 다녔다.

 

민가로 나가는 첫 기록은 임금ㆍ중궁과 동궁이 임영대군 이구(소헌왕후 소생 4남)의 집으로 나간다.(《세종실록》 16/8/26) 이후 진양대군(소헌왕후의 차남 후일 세조. 진양은 진평, 함평, 진양, 수양 등으로 이름이 바뀐다)의 집(《세종실록》17/8/21), 광평대군(소헌왕후 소생 5남)의 집(《세종실록》21/6/24), 금성대군 이유(소헌왕후 소생 6남)의 집(《세종실록》 24/1/9), 수양대군(소헌왕후의 차남)의 집(《세종실록》 27/1/8), 효령대군의 집(《세종실록》 32/1/22), 심지어 반대에도 양녕의 집(《세종실록》 28/4/9)에도 간다.

 

그밖에 부마 연창군 안맹담의 집(《세종실록》23/9/6)에, 평양군의 집(《세종실록》28/12/15)에 가고, 후기에는 부지돈녕 김중렴의 집(《세종실록》 28/12/20)이나 세상을 뜨기 한 달 전쯤에는 전첨 이서의 집(《세종실록》32/윤1/7), 안숭선의 집(《세종실록》 32/윤 1/24)으로 이어하고 마지막은 영응대군의 집 동별궁에서 세종 32년(1450) 2월 17일 돌아가신다.

 

이렇듯 궁을 떠나 민가로 찾아다닌 까닭은 무엇일까. 추론이기는 하지만 몸의 자유를 통한 사유의 자유로움을 얻기 위한 것으로 풀이하고 싶다. 당시는 역병이 생기면 다른 곳으로 피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관습이었는데 세종 3년 5월에 궁인들이 병자가 많아 경복궁으로 옮겼듯, 세종은 아프다 생각하여 스스로 민가로 피신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특히 26년 이후 부쩍 이어의 횟수가 늘어나고 세종 26년에는 왕비만 광평대군의 집으로 가는 일(《세종실록》 26/11/26)도 있다. 이는 광평이 스무 살 나이로 천연두에 걸려 죽은 12월 7일 열흘 전인데 일반 사람은 병이 나면 피신하는데 어머니는 병자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몸이 아프면 거동이 제일 불편하다. 그리고 아픈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세종 24년 이전에는 1년에 한두 차례던 이어가 24년에는 두 차례, 26년 이후는 년 3~5차례로 늘어다. 이어는 질병 탓만은 아니다. 이는 25년 훈민정음 창제와 28년 반포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보인다. 온천에도 서책을 가져가는 세종이 자유로운 사유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했을 것은 당연하다. 정음은 천문처럼 수치로 계산하여 나오는 산물이 아니라 사유를 통한 체계의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면에서 세종의 신곡 작곡도 자유로움이 전제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후기에 이르러 가족의 여러 죽음을 맞아 인간과 병과 죽음에 대한 문제에 부닥쳐 불교에 빠져 있을 때 자유로운 명상의 시간은 궁중 안에서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다. 사적인 공간에서 몸과 생각의 자유로움을 가지고 싶은 욕구가 잦은 이어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아들의 집에서 그것도 다시 안채와 다른 별채로 지은 동별궁에서 조용히 있는 시간은 오로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때인 셈이다. 이 시간이 세종에게서는 창제의 시간이 되었다고 보인다. 이어는 세종이 한 사람의 백성이 되어 있고 또 사유가가 되고자 한 상황을 상징하고 있다.

 

이어 중에는 여러 백성의 한 사람으로 세종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이어’의 출현 빈도 중 많이 보이는 임금은 태종 44건, 세종 156건, 성종 106건, 광해군(중초본) 158건이다. 세종보다 이어의 횟수가 많은 임금은 광해군으로 158건(중초본)인데 즉위년 7월 15일 동궁으로 이어한데 이어 창덕궁 수리를 하는 도중 경운궁으로(광해군 3/12/20) 그리고 7년 4월 2일 창덕궁으로 돌아오고 이후 경덕궁 축성과 수리에 따른 ‘이어’가 대부분이다. 세종의 이어와는 그 내용이 전혀 다른 궁 수리에 따른 궁에서 궁으로의 이전이다.

 

세종이 몸은 아프고 훈민정음 창제 등 신하들과 상의하지 못하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어 한 바람 그리고 아픈 마음을 불당을 찾아 명상하는 습관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 낮추고 사유하는 시간을 가지며 백성의 한 사람으로 삶의 기쁨[生生之 樂]을 즐긴 것으로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