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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세종, 전의감ㆍ혜민서ㆍ동서활인원 등을 통해 환자 돌봐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行道] 함께 걷기 41]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역질(疫疾)에 대처하라

 

세종의 사맛 곧 커뮤니케이션에 대하여 살피고 있는데 지금 사회적으로 번지고 있는 ‘코로나 19’와 연관해 세종 시대에는 질병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보자.

 

커뮤니케이션의 종류

 

먼저 일반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이라 하면 ‘대상과 의미를 나누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해 신호를 보내고 그 의미를 공유하게 된다. 상대 곧 대상과 규모에 따라 몇 가지 구분이 가능하다.

 

 

위 표를 정리해보자. 조선 시대는 ‘개인 내’ 곧 혼자 있어도 자기가 스스로 대화를 하는 자기 수양이 강조되는 시대였고, 그다음으로 선비 사이의 교류 그리고 가족 사이의 화목을 강조하고 같은 뜻을 가진 서원 혹은 나쁜 의미의 정치적 동일체인 붕당의 커뮤니케이션 시대였다. 그러나 현대는 그 중심이 국가 내 여러 집단의 사맛 그리고 국제간의 교류로 이어져 있다. 개인이나 가족보다 집단 사맛에서 국가 내 그리고 국제간의 커뮤니케이션 비중이 훨씬 강조되어 있다.

 

이번 ‘코로나 19’도 중국 우한에서 출발한 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다시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는 형상이다. 뜻하지 않게 우리나라 국민이 이스라엘 등 여러 나라로부터 입국이 거절당하는 수모도 당하고 있다.

 

최근에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한 전염병으로는 2015년을 강타한 메르스가 있고, 그 이전에는 신종플루, 사스 등이 있었다. 최근의 전염병에 대한 대처는 사회적인 의식 곧 한 나라의 민도와 직결되어 있어 보인다. 한 사람의 이탈자가 바로 그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하는 일이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국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회 커뮤니케이션적인 연대의식이 없으면 이러한 유행성 질병은 멈춰질 수가 없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잘 사느냐 여부와는 다른 문제다. 우리나라의 국민성이나 사회 풍토로 보아 걱정스러운 면이 있는 것이다.

 

조선 시대의 돌림병(전염병, 역병)

 

그렇다면 조선 시대 특히 세종 시대에는 이러한 질병이 닥쳐왔을 때 어떻게 대처했는지 궁금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오늘날에도 ‘코로나 19’ 백신을 당장 만들지 못하고 유사 대응 처방으로 진료하고 있듯 세종시대에도 퇴치의 의술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나 의료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는지 세종 시정(時政)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우리나라 돌림병 최초 기록은 기원전 15년 백제 온조왕 4년부터 시작된다. 이런 돌림병은 조선 후기 이르러서 어느 시대보다 유행한다. (참고: blog.naver. com/sungjin 역사블로그)

 

조선후기, 돌림병이 유행한 빈도는 자주 일어났는데 17세기 중반~ 19세기 중반 돌림병의 유행은 조선 인구를 감소시키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1660년~1864년 약 200년이라는 기간에 사망자가 많이 발생한 돌림병만 하더라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79차례나 된다. 그 가운데 10만 명 이상 죽은 경우가 6차례이다. 심할 때는 50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기록되었으니 전체인구의 5%가 역병으로 죽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조선후기 돌림병으로는 콜레라, 두창, 성홍열, 장티푸스, 이질, 홍역 등이 유행했고, 가장 피해가 큰 것은 콜레라와 두창 2가지였다.

 

그러면 왜 이렇게 다른 시대보다 조선후기에 역병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을까?

 

첫째로 국제 교역의 확대를 들 수 있다. 천연두는 전 세계로 퍼지며 16세기쯤에 우리나라와 일본 등에 들어오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남미에도 퍼지게 되고 17~18세기 북미까지 퍼지게 되며 이후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된다. 질병사 연구에 따르면 18, 19세기 돌림병은 거의 전 세계에서 동시 발생했다고 한다. 19세기 콜레라로 런던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 조선도 이러한 세계역병유행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오염된 물로 인해 자주 걸리는 질병이 콜레라였다.

 

둘째로 사회변동도 돌림병이 도는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도시의 성장과 인구 밀집이 일어난 곳에 전염병이 유행하기 좋은 조건을 제공했다. 조선 후기가 되면서 인구 밀집도는 높아졌고, 위생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으니, 퍼지기 좋은 환경이었다.

 

셋째로 문화, 관습적 측면에서 원인이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목욕을 자주 하지 않았고 채소도 씻지 않고 그냥 먹기가 보통이었고 우물 가까운 곳에 뒷간이 있기도 했다. 곧, 오늘날과 같은 위생개념이 없었다. (참고: 지식몰)

 

세종 시대의 역질

 

그렇다면 세종 시대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실록을 통해 조선시대의 질병 기사를 보자.

 

한자로 ‘질병(疾病)’을 찾으면 1,887건이 나온다. 이 가운데 세종은 160건, 중종 125건, 선조 254건, 광해군중초본 208건, 현종개수 126건, 숙종 86건 등이 보인다.

 

‘질역(疾疫)은 모두 128건 가운데 세종 34건, 연산군일기 14건, 선조 20건이다. 하나 더 보자. ‘역질(疫疾)’을 찾으면 전체 32건 중 세종 14건, 연산군일기 5건, 중종 4건, 선조 4건 등이다.

 

조선 초기임에도 세종 때에는 관련 기사가 많다. 이에 대한 해석은 가) 세종 시대에 질병이 많았다거나 나) 정작 역병이 창궐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조선 후기부터인데 세종 조에 기사가 많다는 것은 세종의 관심이 컸다는 것이고 다) 다른 해석으로는 질병에 대한 용어가 새로운 용어로 바뀌어 가는 것일 수도 있다. 한 예로 ‘질역’에서 ‘역질(疫疾)’로 바꾸면 모두 350건 가운데 세종 10, 중종 37, 효종 23, 현종 47, 숙종 31, 영조 22, 정조 20건 등이다. 조선 후기에 갈수록 조선 초 ‘질역’이 ‘역질’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위의 분류로 추론해 보면 세종은 조선 초기임에도 사회적 질병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대처해 나간 임금임을 알 수 있다.

 

■ (권진이 최윤덕의 성 쌓기를 내년 가을로 미룰 것을 건의하다): ‘가을에 할 일을 봄철에 실시하면 백성이 전염병으로 많이 죽는다.’ 하였습니다. 만일 성을 쌓을 터가 결정되었다면 그 역사(役事)를 감독하는 것은 윤덕이 아니라도 될 수 있습니다. 옛적 임인년에 도성(都城)을 수축할 때에, 군인이 병으로 죽은 사람이 적었으나, 그들이 돌아갈 때 이르러 죽은 자가 길바닥에 서로 깔렸었습니다. (《세종실록》12/윤12/8)

 

계절에 따른 전염병을 조심하고자 했다. 세종의 전염병에 대한 대책은 다음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지방의 유행ㆍ전염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방문으로 써서 주지시키도록 하다) : 예조에 전지하기를, "지방의 질역(疾疫, 유행병, 전염병)을 구하고 치료하는 법은 《육전(六典)》에 실려 있으나, 수령이 그에 마음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치료하는 방법을 아직 다 알지 못하여, 앓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으니 진실로 가엾다 할 것이다. 널리 의원을 골라내려 보내서 도성 안과 지방의 집집이 알게 하여, 정성을 다하여 치료하면 사망에 이르지는 아니할 것이니, 나의 어여삐 뜻에 맞도록 하라." (《세종실록》 16/6/5)

 

■(무당을 성 밖에 모여 살게 하고, 부녀자의 내왕 등을 엄금하다) “어쩌다 병이 나면 피병(避病, 병을 피해 거처를 옮기는 일)한다고 청탁하고 무당의 집에 가서 의지하고 있으니, 심히 부녀자의 행실에 어긋납니다. 지금부터 엄금하여 만일 어기는 자가 있거든 그 가장(家長)과 무당의 집을 죄 주어 다스리고, 그것을 고하여 드러내지 않는 관령(管領, 도성 5부를 관할하는 직책)과 색장(色掌, 성 아레 10리를 관할하는 직책)을 모두 다 논죄하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13/7/17)

 

이에 따라 비과학적인 굿거리 등을 못 하게 했다.

 

세종 시대 의료 복지의 구현

 

 

이 가운데 세종 초기인 1년 2월 동서활인원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 (이조에서 동ㆍ서 활인원의 구성과 운영 방법에 대해 아뢰다) 이조에서 계하기를, "동ㆍ서 활인원(活人院)에 녹관을 두되, 동활인원은 제생원(濟生院)이, 서활인원은 혜민국(惠民局)이 구하고 치료하는 일을 갈라 맡되, 그 성적 여하에 대해서는 혜민ㆍ제생의 제조(提調)와 양원(兩院)의 차비 향상 별감(差備向上別監))ㆍ녹관(祿官)들이 고찰하여, 죽은 자 및 나은 자, 낫지 못한 자의 수효를 매월 말에 예조에 보고하여 서류를 갖추어 올리게 하며, 윗 조항에 대한 제조 이하의 성적 여하는 양원으로 하여금 안을 작성하게 하며, 제조는 대사헌이 검거하게 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하므로, 그에 따름과 동시에 양원에 녹관 각각 2명을 새로 두되, 모두 소속된 의사로 정하도록 명령하였다. (《세종실록》1/2/14)

 

세종은 우선 중앙 의료기관인 전의감과 왕실의 의료를 맡은 내의원, 그리고 일반 백성들을 의한 의료시설인 혜민서와 가난한 사람들과 무의탁 병자 및 전염병 환자를 돌보는 동서활인원등 네 곳의 의료시설들을 통해 환자들을 돕고자 했다.

 

이런 의료혜택은 감옥에 갇힌 죄수들에게도 돌아갔다. 세종은 혜민서와 침술 기관인 제생원, 동서활인원에서 일하는 의료진들이 교대로 내진해 죄수들이 더 나은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로 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인권존중을 세종은 약 600년 전에 실천하였던 것이다. 거기다 세종은 백성들이 받는 의료수준의 질을 높이고자 의원들의 경쟁을 부추겼다.

 

전염병이 몇 년마다 국제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개인이 나만의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일원이라는 사회 커뮤니케이션 정신이 더욱 필요한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