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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한국과 터키가 형제의 나라인 까닭

[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37]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한국공원은 매우 넓고 잘 가꾸어져 있었다. 무궁화 나무 줄기에 무궁화꽃이 만발하고 있었고 화단에는 키가 작은 금잔화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커다란 터기 국기와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4층탑 앞에 한국전에서 죽은 희생자의 명단이 기다랗게 새겨져 있었다. 참전비 앞쪽에 한국 참전의 내용이 간략하게 정리되어 검은 돌에 새겨져 있었다.

 

 

 

 

한국공원 관리소에는 ‘터키참전용사협회’라는 단체에서 만든 유인물이 비치되어 있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터키어와 한글로 기록되어 있었다.

 

“...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치러진 한국전에서 21,212명의 터키군 병력이 참전하였으며 종전 이후에도 1954년부터 1971년까지 터키 정부는 한국에 터키군 병력을 계속 파병하여 UN군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이렇게 한국에서 임무를 수행했던 터키군은 총 56,536명이며 전사자는 총 892명입니다. 한국전에서 터키군은 중공군과 수차례 전투를 벌였으며 그때마다 중공군을 격파하였습니다. 이 전투 중에 아래 4개 전투는 한국전의 흐름을 바꿔놓은 중요한 전투였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북한 청천강 유역의 군우리 전투 (1950년 11월 26일~30일)

*용인 지역의 금양장리 전투 (1951년 1월 25일)

*수도 서울 방어 전투 (1951년)

*38선 일대 철원지역 베가스 전투 (1953년 5월 28일~29일)

 

금양장리 전투는 중공군과 맞서 싸운 UN군이 최초로 승리한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 정부가 터키 여단에 ‘최고 부대 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우리 터키군 병사들의 대부분은 자원하여 참전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조국을 위해 싸우듯이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우리 터키 국민들은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진정한 영웅으로 여기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터키의 어느 곳을 방문하시든지 자랑스런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만나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터키군은 한국인들을 정말 사랑하였습니다. 전쟁터에서 굶주린 한국인들을 위해 본인들도 부족한데도 먹을 것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위해 수원 지역에서 ‘앙카라 학교’를 지어 고아들을 보살피고 교육했으며 이 학교는 약 10년 간 지속되었습니다. 한국전에서 싸웠던 우리 참전 용사들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자유와 평화를 쟁취하고 훌륭한 나라를 만드는 데 미약하나마 자신들이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매우 감격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보지 못하였는데, 터키군의 용맹과 우정을 그린 한국 영화 ‘아일라: 전쟁의 딸’이 2018년 6월에 상영되어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이 영화는 6.25 참전 병사였던 술래이만이 5살인 한국인 고아를 보살피다가 헤어져 2010년 60년 만에 서울에서 재회한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라고 한다.

 

6.25 전쟁 당시 절대적인 사상자 수는 미군이 가장 많았다. 그러나 파병 인원 대비 사상자 비율이 가장 높았던 참전군은 터키군이었고, 가장 피해가 적었던 것은 필리핀군이었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영어가 자유로운 필리핀군은 미군의 항공 지원을 가장 많이 받았는데, 영어 소통이 잘 안 되었던 터키군은 항공 지원을 못 받고 가장 악전고투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다른 까닭으로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전사자는 알라의 오른쪽에 가서 앉는다는 사생관(死生觀)을 가졌기 때문에 터키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터키 사람들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부른다. 이처럼 한국과 터키가 돈독한 관계에 있게 된 배경에는 6.25 참전 이후에도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1999년 8월에 터키 서부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1만8천 명이 죽고 20만 명의 이재민이 생기는 엄청난 재난이 발생했다. 이때 한국에서 민간인 중심으로 터키를 돕자는 모금 운동을 벌였는데, 40일 동안 23억 원이 모금되었다. 당시 터키 방송국 STV는 한국에서 펼쳐지는 모금 운동을 일주일 동안 다큐멘터리로 촬영한 뒤, 50분 동안 터키 전역에 방송하였다. 이 방송을 본 터키 국민은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둘째는 2002년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우리나라 국민이 터키를 응원한 것이다. 그 당시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다”라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을 통하여 전파되었다. 또한, 터키 유학생들이 터키인들의 한국 사랑을 소개하면서 터키에 대한 한국 국민의 관심이 증폭되어 경기장에서 터키팀을 열렬히 응원하였다. 한국과 터키의 3, 4위전이 열리던 대구 경기장에 자기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터키인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때 터키팀이 3:2로 이겨서 월드컵 축구 3위를 차지하였다.)

 

 

서울 여의도에는 앙카라 공원이 있는데, 이것은 1971년 서울시와 앙카라시가 자매결연을 맺은 것을 기념해서 만든 공원이다. 1974년에 건립된 터키군 참전 기념비는 경기도 용인시, 영동고속도로 마성 나들목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부산광역시의 UN 묘지에는 터키군 462구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국제 정치 측면에서 살펴보면, 터키는 6.25 전쟁 참전 공로를 인정받아 나토(NATO) 회원국이 되었고 미국의 원조를 받으면서 소련의 위협에서 벗어나 경제발전의 기틀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통하여 자국의 실리를 추구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와 터키의 관계는 현재까지도 매우 돈독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구려가 강성하여 중국의 북동쪽을 지배하던 때 몽고 지방에 돌궐(突厥: 투르크의 중국 한자 표기)제국이 등장한다. 돌궐은 6세기에 중앙아시아로 영토를 넓히면서 고구려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중국 수나라 양제는 607년에 우연히 돌궐과 접촉하는 고구려 사신을 발견하고 돌궐과 고구려 사이에 모종의 밀약을 걱정한다. 결국, 수양제는 10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나 실패한다.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박물관의 벽화에 등장하는 고구려 사신은 돌궐과 고구려와의 동맹관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후 돌궐 제국이 멸망하면서 일부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는데 셀주크 투르크가 나중에 오스만 투르크를 거쳐서 터키가 된다.

 

 

터키의 언어는 우랄알타이어에 속해서 한국어와 어순이 비슷하고 우리말과 비슷한 단어가 많다. 또한, 터키 동부 지방 일부 주민들에게서 몽고반점이 발견되며, 문화적으로도 어른을 존경하고 가족애를 중요시하는 전통이 강하다.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한국과 터키가 형제의 나라라는 것은 근거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