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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전함 67척을 육지로 옮긴 오스만군

터키 군부 주도의 쿠데타 뒤엔 민간이양하는 전통 있어
[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39]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보스포루스 해협과 성곽

 

역사적인 도시 이스탄불역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며칠 동안 쓸 교통카드를 53라리를 주고 샀다. 교통카드 하나로 지하철과 버스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지하철을 타고서 차량 내부를 살펴보니 우리나라 회사인 현대로템에서 만든 것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다. 지난 2005년에 이명박 서울 시장이 이스탄불을 방문했을 때에 서울의 교통시스템을 자랑하였고, 이스탄불 시장이 곧바로 서울의 통합 교통카드 제도를 도입하였다고 한다. 지하철에서 내려 로자 씨와 따님은 바로 숙소로 가고, 병산과 나는 시간 여유가 있어서 시내를 구경하고 저녁에 숙소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우리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걸어갔다. 군사 요충지인 보스포루스 해협은 흑해와 마르마라해(海)를 잇고,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매우 좁은 해협이다. 해협의 길이는 30km며, 폭은 가장 좁은 곳이 750m이다. 해협의 깊이는 36~120m 사이이다.

 

우리가 깃발 들고 해변길을 따라 걸어가자 해수욕을 하거나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우리를 쳐다본다. 우리가 손을 흔들자 그들도 손을 흔든다. 나는 과거에 이 해협을 지나갔을 수많은 군인과 상인들을 생각하면서 걸어갔다. 날씨는 덥지 않고 걷기에 쾌적하였다. 우리는 병산이 구글 지도에서 찾아낸 한국음식점 고려정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고려정은 바다 가까이에 있었는데, 김치가 맛있는 제대로 된 한국음식점이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성곽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소피아 성당 쪽으로 걸어갔다. 콘스탄티노플 성의 함락은 전쟁사에서 반드시 나오는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오스만튀르크의 황제 매흐매트 2세(술탄을 겸함. 당시 21살)는 수도인 에디르네를 출발하여 1453년 4월 5일 콘스탄티노플 성문에 도착했다. 술탄은 이슬람 전통에 따라 사신을 보내 비잔틴 황제(콘스탄티누스 11세)에게 유혈 충돌 없는 항복을 요구했다. 그 당시 공격하는 오스만 제국 정예군은 10만 명이었고 비잔틴 수비군은 7,000명에 불과했는데 비잔틴 황제는 항복을 거부했다. 오스만군은 대포를 쏘면서 공격을 개시했다. 해상에서는 오스만 함대가 안쪽의 금각만(golden horn)으로 진입을 시도했지만, 돌파가 어려웠다. 비잔틴군이 금각만 입구 바다를 쇠사슬로 가로질러 봉쇄했기 때문이다.

 

이때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창의적이고 기발한 방법이 등장한다. 오스만군은 밤에 전함 67척을 육지로 옮겼다. 기름을 친 둥근 통나무를 줄지어 배 밑에 깔고 배를 밀어서 언덕을 넘어 금각만 안쪽 바다로 함대를 진입시켰다. 배가 육지를 건넌 것이다! 육해군 합동으로 공격하자 5월 29일 성벽이 무너지면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다.

 

마지막 황제는 망토를 벗어 던지고 싸우던 중에 행적이 사라졌다. 아마도 시민들 사이에서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시민들이 황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시신을 어디에 묻었는지 알리지 않아서 마지막 황제의 행방은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고 한다.

 

 

점령된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군대의 전통에 따라 사흘 동안 약탈되었다. 오스만 병사들은 반항하는 사람은 죽이고 항복하는 사람은 노예로 붙잡았다. 당시 도시의 인구는 약 4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살해당한 사람은 약 4,000명이었다.

 

사흘째 되던 날 매흐매트 2세가 무질서를 바로잡았고, 이어서 시민의 생명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공표했다. 이슬람 황제는 도시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고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술탄은 이후 조세 제도를 확립하여 비잔틴 장인들과 무역상들의 이익을 보장해 주었고, 밀레트(주: 자치권을 가진 종교 공동체를 말함) 제도를 통해 종교와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해 주었다.

 

1,000년이 넘게 지속하면서 이슬람 세력이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아왔던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유럽에서는 교황을 중심으로 콘스탄티노플을 회복하기 위해 십자군을 다시 결성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의 콘스탄티노플 정교회에 대한 적대감과 유럽 각국의 내부 사정 때문에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비잔틴 제국의 학자들이 대거 서유럽으로 망명하여 르네상스의 씨앗을 제공하였다. 유럽 여러 나라는 동방의 과학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중세 시대를 끝내고 근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후 서양에서는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중심으로 대항해 시대를 열게 된다.

 

우리는 소피아 성당을 내일 일행과 함께 구경하기로 하고 그냥 지나쳤다. 우리는 전철을 타고 숙소를 찾아갔다. 보스포루스 해협이 바라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6층에 자리 잡은 숙소는 ‘랄랄라 게스트하우스’라고 쓰인 작은 간판이 붙어 있었다. 젊은 한국인 부부가 10년 이상 운영하는 숙소는 방이 비좁고 2층 침대가 있었으며 화장실이 하나여서 조금은 불편했다. 대신 아침을 한식으로 무료로 제공한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이스탄불은 유명한 관광도시이고 호텔은 매우 비싸서 이곳은 배낭족 청년들이 많이 이용하는 것 같았다.

 

잠자기 전에 손말틀(휴대폰)로 터키에 대해서 더 검색해 보니 흥미로운 사실이 나타났다. 터키는 총 74만5천 명의 병력을 유지하는데 항공기는 1,067대, 전차는 3,200대를 보유하고 있다. 터키는 북대서양 조약기구 (NATO) 국가 가운데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유지하고 있는 군사 강국이라고 한다. 세계 각국의 군사력을 비교 분석하는 미국의 GFP(Global Fire Power)에서 2018년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군사력이 강한 순위가 터키가 9위, 이집트가 12위, 이란이 13위로서 터키가 아랍 세계에서는 맹주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3년에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는 터키 공화국 창건의 바탕이 됐다. 아타튀르크가 만든 터키 헌법 제2조는 세속주의를 천명하고 있다. 터키 군부는 오랫동안 아타튀르크의 뜻과 헌법에 규정된 세속주의의 수호자임을 자부해왔다. 그래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세속주의를 침해한다고 판단되거나 정국 혼란이 이어지면 공화국의 수호자를 자부하는 군부가 나선다. 군부는 혼란을 수습하고 새 정부를 구성한 후에 평화적으로 민간 정부에 정권을 이양한다. 이러한 군부 주도 쿠데타는 1960년, 1971년, 1980년, 그리고 1997년에 일어났지만 모두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였다고 한다.

 

현재 대통령인 에르도안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지지하고 있어서 군부와 갈등 관계에 있다. 2016년 7월 15일 군부의 일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7월 16일 오전부터 터키 군중이 앙카라와 이스탄불 광장에 집결해 쿠데타를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에르도안 대통령과 친정부 세력이 반격하여 군부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앞으로 터키에서 이슬람주의가 강화될지 세속주의로 회귀할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