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금당길을 따라 조금 더 걷자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면서 흙길이 나타난다. 흙길이 시작되는 지점의 왼쪽에는 조림한 것으로 보이는 자작나무 숲이 보인다. 잎은 모두 떨어졌지만, 자작나무는 나무껍질이 하얗고 갈라져서 종이처럼 벗겨지기 때문에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자작나무는 불에 탈 때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고 해서 자작나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흙길은 포장된 도로에 견주어 딱딱하지 않고 탄력이 있어서 걷기에 편하다. 길 양쪽으로는 이미 추수가 끝난 밭이 텅 비어있어 허허롭기만 하다. 흙길은 곧게 1km쯤 계속되었다.
흙길이 끝나자 오른쪽에 금당교 다리가 나타난다. 금당교 건너편에는 등매초교 폐교가 있다. 금당교 건너편 왼쪽에 보이는 다리는 등매교인데 그 아래로 면온천이 흘러 평창강에 합류한다. 그러니까 면온천은 평창강의 제1 지류가 된다. 금당계곡에서는 여름에 급류타기(래프팅)를 하는데, 나는 4~5년 전에 면온천 합류 지점에서 출발하는 급류타기를 난생처음으로 해본 경험이 있다.
약간 오르막인 금당길을 계속 걸어가니 거문ㆍ금당산 등산안내도가 나온다.
금당산 등산로는 모두 3개가 그려져 있는데, 2개는 금당산 서쪽에 있는 금당계곡에서 올라가는 코스이고 다른 한 개는 금당산의 동쪽에 있는 법장사에서 올라가는 코스이다. 높이 1,173m의 금당산을 오르려면 여기서 왼쪽 길로 올라가면 된다. 금당산의 남쪽에 있는 거문산은 금당산과 능선으로 연결되는데 산 높이가 금당산과 똑같이 1,173m다. 등산하는 사람은 금당산과 거문산을 함께 오르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등산이 목적이 아니므로 계속해서 직진했다.
조금 더 가니 금당사 가는 길을 알려주는 커다란 팻말이 서 있다. 여기서 왼쪽 길로 올라가면 금당사를 거쳐서 역시 금당산으로 올라갈 수가 있다. 나는 금당사를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절이라고 말하기가 쑥스러울 정도로 대웅전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초라한 절집이었다. 등산로 입구 왼쪽에 넓은 밭이 보인다. 그런데 웬일인지 김장배추와 양배추 그리고 무가 수확이 끝나지 않은 채 많이 남아 있다. 지금 수확하면 제대로 값을 못 받을 것이다.
봉평면은 며칠 전부터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는데 아직도 수확을 끝내지 못했다니, 배추밭 주인은 일손을 구하지 못했거나 혹은 무슨 사정이 있었나 보다. 젊었을 때 이러한 광경을 보면 나는 대뜸, “아직도 수확을 안 했다니, 게으른 농부이군!” 하면서 속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는 달라졌다. 이상하게 보이는 현상을 보면 대뜸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사연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어난 현상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하면서, 무슨 사연이 있을까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다. 그러다 보니 잘못된 판단은 줄일 수 있지만 신속하게 행동할 수가 없다. 생각이 많아지니 판단도 느려지고 행동도 느려진다.
승용차 1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시멘트 포장길이 계속 이어졌다. 집들이 많지 않고 차량 통행은 거의 없어서 걷기에 아주 좋은 길이었다. 약간 경사진 길을 내려가다 보니 왼쪽으로 금당산의 봉우리들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설악산의 멋진 봉우리를 옮겨다 놓은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금당길 오른쪽에서 길 따라 흘러가는 평창강의 모습 역시 그림처럼 아름답다. 손말틀(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지만, 현장에서 경험한 느낌과 분위기를 담을 수가 없었다.
낮 12시 30분에 길 오른편에 있는 이름 없는 정자에 도착했다. 정자에서 올려다보는 금당산과 내려다보는 평창강이 잘 어울렸다. 나중에 북을 가져와서 판소리 사철가를 한 곡 부르면 딱 어울릴 그런 장소이다. 답사길 시점에서 출발한 지 2시간 20분이 지났다. 점심 먹을 시간이다. 배낭을 내려놓고 김밥과 시금자떡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오후 1시 10분에 다시 출발했다. 간간이 길가에 펜션이나 농가가 나타나지만, 한적한 금당길은 걷기에 매우 편안했다. 오늘의 답사길 끝부분에 가니 과수원이 나타난다. 잎이 달리고 꽃이 피어 있으면 무슨 과일나무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나무는 푸른 잎사귀를 모두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벌거벗은 줄기 모습만 보여준다. 나무줄기만 보고서는 무슨 나무인지 내 실력으로는 구별할 수가 없다. <겨울나무 쉽게 찾기>라는 책을 쓴 윤주복이라는 나무 전문가는 줄기만 보고서도 424종의 나무 이름을 알아낸다. 나도 그 책을 사두었는데 읽지는 않았다. 이제부터라도 겨울나무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산으로 막혀서 길이 끊어지는 곳 왼쪽에 작은 집이 하나 보인다. 오늘 걷는 길의 종점이다. 시계를 보니 낮 1시 40분이다. 아침 10시 10분에 출발했으니, 거리는 6km를 걸었고 시간으로는 3시간 30분이 지났다. 점심시간 40분을 빼면 6km를 걷는데 2시간 50분이 걸렸으니 대략 1시간에 2km를 걸은 셈이다.
이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되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시간이 덜 걸릴 것이다. 돌아가는 길에서는 모든 것을 반대 방향에서 보게 된다. 같은 장소를 지나도 바라보는 방향이 반대이니 조금은 느낌이 다르다. 문득 세 줄짜리 짧은 시가 생각났다.
그 꽃
- 고은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짧지만 강한 울림을 주는 시다. 같은 장소에 꽃이 있는데, 왜 올라갈 때는 보지 못했을까?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겠지만 내가 해석하기로는 마음의 상태가 달랐기 때문이다. 올라갈 때는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목표가 뚜렷하다. 아무래도 조급해지기 쉽다. 오르막길이기 때문에 힘이 들어서 주변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러나 정상을 찍고 내려가는 길은 마음이 편하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기게 된다. 그러면, 못 보던 꽃을 볼 수가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젊은 시절은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가는 시절이다. 주변을 둘러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러나 은퇴하고 나면 주변을 바라볼 여유가 생긴다. 그러면 젊었을 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된다. 산에 가면 들꽃이 아름답게 보이고, 강에 가면 물소리가 다정하게 들린다.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돌아오는 길은 시간상으로 한낮이어서 오전에 견주어 기온이 더 높아진 것을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흡사 봄날처럼 공기가 훈훈하고 기분이 상쾌했다. 친구들과의 대화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별별 주제를 다 끄집어내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끝없이 이어간다. 몸과 마음이 행복한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흘러간다.
돌아오는 중간에 세 사람이 셀카 사진을 찍었다. 왼쪽이 석주, 중앙이 시인마뇽, 그리고 오른쪽이 필자다. 나의 인터넷 필명이 무심거사(無心居士)이고 친구들은 나를 무심이라고 부른다.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 시간은 저녁 4시였다. 오늘 평창강 제1 구간 6km를 왕복으로 걷는데 5시간 50분 걸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