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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계곡, 예가 바로 신선이네

평창강 따라 걷기 제2구간 – 계속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봉황정에 앉아 고구마를 먹으면서 시인마뇽이 한마디 했다. “어떤 신부님이 말하기를,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맞는 말이다. 멀리서 가는 길을 혼자 간다는 것은 매우 외롭고 지루할 것이다. 멀리 가려면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가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인원이 많을수록 좋은 것은 아니다. 둘이나 넷보다는 세 명이 가장 적당한 인원수다.

 

산행도 마찬가지이지만 단체로 여행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여행하다 보면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선택해야 하는데, 다수결로 결정해야 할 때가 생긴다. 이때 짝수로 의견이 갈리면 해결할 방법이 없다. 홀수이면 간단히 해결된다. 오늘은 4명이 걷지만, 다행하게도 다수결이 필요한 갈등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간식을 먹고서 봉황교를 건너 지방도로로 다시 돌아오자 봉화마을을 가리키는 커다란 봉황새 모양의 간판이 눈에 띈다. 봉황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길 동쪽에는 잘 지은 2층 건물인 ‘개수2리 다목적체험관’이 자리 잡고 있다. 체험관 뒤쪽으로 ‘개수리 보건소’가 보인다.

 

 

돌로 만든 봉황대 표시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봉황대라 불리는 이곳은 옛날에 어떤 사람이 묘자리를 보려고 이 근처의 땅을 팠는데 갑자기 봉황이 하늘로 솟아 날아갔다라고 해서 이 바위를 그때부터 봉황대라 불리게 되었으며 일설에는 그 높이가 너무 높아 봉황이 아니면 접근조차 못했다라고 해서 봉황대로 지어졌다는 등의 많은 전설이 깃든 곳이다."

 

그런데 《평창군 지명지》 316쪽에는 봉황대 설명이 다음과 같이 더욱 자세하게 나와 있다.

 

“마을의 지세가 둥지에 든 봉황의 모양이라 봉황대라고 불렸다는 설과 봉황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라고 해서 봉황대라고 불렸다는 설이 있다. 이 바위는 길조바위라고 하여 숭배한다. 6m가량의 절벽바위로 옛날에 어떤 사람이 묘자리를....” 그 뒤는는 안내판 기록과 같다.

 

 

봉황대 표시석 옆에는 장미산ㆍ덕수산 등산안내도가 서 있다. 두 산의 특징에 대하여 등산안내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차령산맥의 한 줄기로서 백두대간에 속한 오대산 두로봉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나온 가지 상에 있다. 산 아래로 남한강 최상류인 평창강이 흐르고 주위에 청태산, 금당산이 있다. 장미산은 산 모습이 노루꼬리처럼 생겼다 하여 생겨났으며, 덕수산은 사시장천(四時長天) 한자리에서 마을을 지키며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충성스럽고 덕스럽게 보여 덕수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장미산, 덕수산은 겉보기에는 밋밋한 산이지만 실제로 올라보면 자연의 보고라고 할 만큼 갖가지 기암괴석과 울창한 산림, 희귀한 동식물이 많고 때가 되면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아름다운 등산 코스 중 하나다.”

 

봉황교를 넘어 서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오른쪽 산허리에 봉황마을이 있다. 봉황마을 길은 더는 연결되지 않고 끊긴다. 능선으로 연결된 장미산(979m)과 덕수산(1003m)이 봉황마을을 빙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인마뇽과 석주와 함께 작년 10월 22일, 단풍철이 약간 지나서 두껍게 쌓인 낙엽을 밟으며 두 산을 등산한 적이 있다. 그날의 산행기를 시인마뇽이 자신의 블로그에 기록했다. 관심 있는 독자는 아래 주소에서 덕수산 산행기를 읽어 볼 수 있다. (덕수산 산행기 http://blog.daum.net/mk490/11770609)

 

지방도로를 따라서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왼편에 높이가 30m는 넘을 것 같은 절벽이 보인다. 절벽 끝은 삼각형의 꼭짓점처럼 뾰족한데 소나무 한 그루가 근사하게 자리잡고 있다. 바위에는 온통 이끼가 덮여 있다. 이끼는 대기오염의 지표식물이다. 이끼는 대기오염이 없는 청정한 지역에서만 자란다.

 

뾰족한 바위에는 틀림없이 이름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근사한 바위에 이름이 없다면 내가 이름을 하나 지어주고 싶다. (답사 후에 《평창군 지명지》를 찾아보니 이 바위를 선바우[立岩]라고 표기하고 있다. 봉황마을에 사는 오종근 선생에게 물어보니 동네 사람들은 장군바위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뾰족한 끝이 장군 투구처럼 생겨서 그렇게 부른단다.)

 

 

선바우를 조금 지나 길이 구부러지는 곳에서 갈림길이 나타난다. 왼쪽으로 난 지방도로를 따라가지 않고 오른쪽에 나은 작은 흙길로 접어들었다. 이 길은 사람이 잘 안 다니는 길인데, 내가 전에 한번 가본 적이 있다. 메타세콰이어가 많은 숲을 돌아서 200m쯤 걸으면 다시 포장도로로 나오게 되어 있다. 고즈넉한 흙길이어서 걷기에 매우 좋은 구간이다.

 

길 아래 오른쪽으로는 평창강이 흐른다. 강가에는 굵직한 돌들이 수없이 많은 돌밭이다. 돌밭은 꽤 넓고 내가 보기에도 잘생긴 돌들이 많이 보인다. 멋진 수석이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나중에 다시 와서 좋은 수석을 한번 찾아봐야겠다. 흙길 끝부분에서 주차도 할 수 있고 텐트도 칠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모래밭도 약간 보이고. 여름에는 아이들 데리고 와서 물놀이하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이곳을 개수리 사람들은 물구비라고 부른다고 한다. 개수초등학교 학생들이 소풍 가는 장소란다.

 

 

평창강과 나란히 지나가는 도로를 따라 계속 내려갔다. 평창강은 대표적인 사행천이다. 뱀처럼 구불구불 흐른다. 강에 바짝 붙어있는 금당계곡로도 구불구불 지나간다. 평창강 답사팀인 우리도 물소리를 들으며 덩달아 구불구불 걸어간다. 남도 지방에는 지금 매화꽃이 피었다는데, 여기 평창은 위도가 낮고 고도는 높아서 아직은 겨울 끝자락이다.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같은 침엽수들은 뾰족한 잎 뭉치로 줄기를 가리고 있다. 그러나 자작나무, 벚나무, 오리나무 같은 활엽수들은 잎이 모두 떨어져서 벌거벗은 줄기와 앙상한 가지를 부끄럼 없이 보여주고 있다. 땅속에서 동면하면서 봄을 기다리고 있는 꽃씨는 조금만 지나면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꽃 피는 봄에 다시 한번 금당계곡길을 걸어보고 싶다. 그때는 하늘과 산, 바위와 물, 그리고 새와 나무와 야생화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강 따라 조금 걷다 보니 왼편에 ‘정이 넘치는 개수리’라고 쓰인 돌 비석이 서 있다. 여기까지가 개수리이고 그 아래는 상안미리이다. 경계 표시 비석을 지나 한참 내려가자 오른편 강가에 아주 커다란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에는 ‘금당계곡’이라는 네 글자가 한글로 새겨져 있고, 아래쪽에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15km)’라고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석의 뒤쪽에는 김시철 선생이 쓴 ‘금당계곡’이라는 제목의 시가 새겨져 있다.

 

평창땅 좋다길래

바람 따라 이리 왔네.

 

이만 저만 세간먼지 찌들은 몸

며칠 좀 쉬었다가 갔으면 하네.

 

금당산 끼고 도는 철쭉꽃길 사오십리

개수구곡(介水口谷) 이끼 낀

태고적 바위산

종아리 들어낸 적송(赤松)들 유혹 또한 그러해

마음 비워놓고 그네들과 더불어

이 밤 한껏 취해볼 참이네.

 

바람 따라 찾아든 금당계곡

빈 가슴으로 맞이하는 밤맞이라

둥근 달도 물가에다 내걸고

못내 바람의 잔(盞)도 들이킬 것이네.

 

새벽을 쫑알대는 산새들 노래 속에

새날이 열리면

아무래도 나는 너를 못 잊어

좀 더 쉬었다가 갔으면 하네.

 

금당계곡,

예가 바로 신선이네.

 

<금당계곡>은 평창군 용평면 재산리에 사는 원로 시인 하서 김시철 선생이 2004년에 펴낸 10번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2005년 3월 18일 자 강원일보에서는 하서 선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나 1ㆍ4후퇴 때 월남, 부산에서 미군부대 검수원과 부두노동 등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김 씨는 부산시장에서 우연히 구입했던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인생을 바꿔놓은 계기였다고 회상했다. 또 미당(未堂)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귀촉도' 등은 김 씨로 하여금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하기에 충분했다.

 

1954년 잡지 《개척》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김시철 시인은 1956년 그의 첫 시집인 `林檎(임금)'을 내놓았다. 그에게 문인의 길을 열어준 김광석 선생의 권유로 그는 대중잡지가 아닌 문학잡지인 《자유문학》의 편집장을 맡게 됐다. 편집장직을 맡으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한 김 씨는 또 한 번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데, 염상섭 주요한 양주동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깊은 인연을 맺으며 한국 문단의 거장으로 점차 성장해갔다.

 

1980년대 내내 문인협회 부이사장직을 연임하고 1990년 국제PEN클럽 부회장에 이어 1994년 국제PEN클럽 회장직을 맡아 2번 연임하는 등 중앙문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며 문인들의 인권보호와 문학도 양성에 힘써왔다. 이렇듯 한국문학의 산증인으로 문단의 중추적 역할을 하며 자유문학 편집장, 문인협회 부이사장, 국제PEN클럽 회장 등을 지낸 당대 최고의 문학가가 이제는 스스로를 낮춘 촌로로 변신해 맘껏 강원도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강원일보 기사에서는 금당계곡의 입구를 알리는 비석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국 문단의 거장이었던 김시인의 공심산방(空心山房: 하서 선생의 재산리 집을 말함) 생활과 작품 활동에 감명을 받은 문인들은 너도 나도 공심산방을 방문하며 수려한 산세 등을 부러워하고 있다. 이중 몇몇은 평창에 공심산방과 같은 집을 짓기로 해 김시인이 이제는 평창을 홍보하고 강원도를 노래하는 진정한 강원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같은 김시인에게 고마움을 느낀 평창군 대화면 주민들은 금당계곡 입구에 높이 4m 폭 2.5m 무게 10여 톤의 대형 바위를 표석으로 세워 시 <금당계곡>을 새겨 넣기도 했다.”

 

오후 5시 45분에 금당계곡 비석에 도착하여 평창강 따라 걷기 제2구간을 마쳤다. 오늘 11km를 걷는데 4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