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아버지와 마지막 여행을 떠났던 한 아들의 사부곡이 펼쳐진다. 6.25전쟁이 터지고 제주도 모슬포훈련장에 징집되어 갔는데... 그렇게 시작된 아버지의 얘기는 시작되고, 아버지의 꿈과 한이 서린 삶의 파노라마는 그렇게 이어진다. 큰 울림이 아닌 잔잔한 아버지와 아들의 얘기를 들어볼까?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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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대정읍 모슬포...
해병 제91대대 정문을 들어서는 아버지의 눈에는 어른거리며 눈물이 맺혀있었다.
구순이 넘어 이제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는 걷기도 힘든 노구의 한 사내는,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어느 해 겨울, 난생처음 들어본 이름의 항구인 제주도 모슬포라는 곳에 숱한 당신 또래의 젊음들과 함께 내려졌다.
경상북도 영천군에서 북쪽으로 한참을 가다 보면, 마을 크기에 견줘 제법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신령면 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내 아버지는 태어나셨다. 아버지가 태어나신 그해 가을은 유난히도 새빨간 홍시가 온 동네를 뒤덮고 있었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는데, 언젠가 내가 그 동네를 찾았을 때, 정말이지 집집마다 감나무가 한두 그루씩은 심어있었다.
할머니는 시집와서 모두 열 남매를 낳으셨는데, 더러는 낳다가도 죽고, 크다가도 죽고, 그렇게 당신이 보낸 자식이 여섯, 그리고 열일곱 되던 해에 일본으로 근로정신대 갔다가 폐병 걸려 죽은 딸 하나까지... 내가 나이가 들어 생각하니 할머니가 그 타는 속을 가지고 어찌 모진 세월을 살아내셨나 싶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일찍이 독선생을 집에 불러다 한학을 공부하셨을 만큼 큰 어려움이 없이 살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단다. 하지만 공부에는 뜻도 없으셨고, 기술이나 장사를 배울 만큼 소질도 보이질 않으셨는지, 결혼해서는 결국 북해도 비행장 공사에 노역으로 가시게 되셨단다. 하지만 샌님이던 할아버지가 그런 험한 일에도 무슨 능력을 보이셨을까? 결국 다리를 심하게 다쳐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노름에 빠져 집안에 호밋자루가 썩는지 도낏자루가 썩는지 관심도 없이 살다가 어느 자식 하나에게도 제대로 부양받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그런 집구석에 시집오신 할머니의 친정은, 나름 지역에서는 양반소리를 듣던 파평윤문 집안에 고명딸로 태어나서,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살다가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왔으니, 위로는 포악스러운 성질로 세상 구박 다 하셨다는 시어머니에(물론 이것은 할머니의 증언이다.), 노름에 빠진 남편에, 나중에는 집도 절도 다 잃고 자식까지 일곱을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고는 한 많고, 모진 시간들을 살아내셨다 한다.
아버지는 이런 우울한 집안의 셋째로 태어나셨다.
위로는 누님 한 명과 형님 한 명, 이렇게 두 분이 계셨지만, 하나 있던 형님은 태어나서 얼마 있지 않아 돌아가시고, 누님마저 갓 스물 넘어 돌아가셨으니, 누구 하나 원하지 않았던 맏이의 삶을 운명처럼 받아들이셔야 했다. 아버지 나이 열 살 때부터 이미 이 껍데기만 가족인 집안의 가장이었다고 한다.
해방되고, 6.25가 터지고, 아버지는 동생들과 부모를 데리고 대구로 피난을 갔다가 징집이 되어 난생처음 배에 올라 바다를 건너 도착한 곳이 바로 이 제주도 남쪽 모슬포항이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