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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야기가 얽혀있는 ”임진노성전적비"의 실체는?

평창강 따라 걷기 6-4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생태마을 옆 산 쪽으로 길이 나 있다. 이 길은 매화마을 녹색길과 만나는데, 생태마을에서는 순례길이라고 부른다. 천주교 신자들이 생태마을에 2박3일로 피정(필자 주: 기독교의 수련회와 비슷한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 수련회)을 오면 순례길을 걷는 일정이 포함되어 있다. 한 사람이 겨우 갈 수 있는 좁은 산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매화마을 녹색길과 만난다. 매화마을 녹색길은 쉽게 말해서 응암리 매화마을에서 만든 둘레길이다.

 

 

포장된 길을 따라 동쪽으로 계속 내려가다가 왼쪽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오솔길을 따라 계속 가니 평창강 둑방길이 나타난다. 낮은 보와 작은 양수장 건물이 보인다. 둑방길을 따라 강 따라 계속 걸었다. 한적하고 물소리가 들리고 녹색 산이 보이는 좋은 산책길이 이어진다. 걷다 보니 오른쪽에 표시판이 나타난다.

 

 

밭 가운데 돌무더기가 쌓여있다고 하여 ‘뒤다미’라고 하는데, 쌓여있는 돌무더기는 한강변 중심 최남단에 있는 철기시대 무덤(무기단식 적석총)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설은 임진왜란 때 죽은 왜군의 무덤이라고 하여 이담(왜담)터라고도 한다.

 

조금 더 내려가니 강 건너에 높은 절벽이 나타난다. 약간 적색이 감도는 이 절벽이 절개암이다. 평창강의 이 부분을 적벽강이라고 부른다. 절벽 중간에 굴이 2개 있는데 응암굴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 권두문 군수가 응암굴로 피신하였다가 왜군에게 발각되어 전투를 벌이다가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권두문 군수가 응암굴로 피신하기 전에 평창읍의 진산인 노산에서 전투를 벌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자료에 따라 다르다. 사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매우 혼란스럽다.

 

 

나는 며칠 전에 사전 답사를 나왔을 때 평창읍의 진산인 노산에 올라가 성곽과 유적지를 살펴본 적이 있다. 정상 근처에 ‘임진노성전적비’가 세워져 있고, 그 아래에 ‘노성산성지’라는 비석이 1984년에 평창군수의 이름으로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을 읽어보면 임진왜란 당시 노산성에서 전투가 있었다.

 

 

 

평창문화원에서 2015년에 발행한 <평창군 지명지> (집필 책임: 장정룡) 168~169쪽에는 노산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권두문(權斗文) 군수의 난중일기인 호구록(虎口錄)과 지사함(智士涵) 의병장의 전투기록인 응암지(鷹巖誌), 1929년도에 발행된 <조선환여승람> 의 기록에 의하면 임진년(1592년) 3월에 평창군수로 부임한 권두문은 기존의 노산성을 중수하고 관속과 촌민 수백 명을 거느린 채 웅거하면서 동년 8월 7일 벽파령을 넘어 여만리 쪽으로 쳐들어온 왜군 모리길성부대 5,000여명과 돌을 굴리고 화살을 쏘며 치열하게 접전하였으나 맞서지 못하였다. 성이 무너지자 밤의 어두운 때를 이용하여 십 여리 떨어진 응암굴(鷹巖窟)로 피신하였다. 당시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이 수 백 명에 달했고 피가 물처럼 흘렀다고 하여 이곳 동편 구릉진 계곡을 가리켜 피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 산성은 2003년 1월 18일 강원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된 유형문화재이며 평창군의 정체성과 대표성을 지닌 상징적 산성이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수차례 증개축하였고 거란과 왜군이 침략하여 국난을 당했을 때 군민의 힘을 결집해 외침을 막아냈던 국토 수호의 현장이며 선조(先祖)의 한이 서려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강원도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생생한 전투 기록이 평창에 남아 전한다.”

 

위 자료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노산성 전투에서 수백 명이 죽었고, 피가 물처럼 흘렀다고 한다. 최근 2021년 3월에 평창문화원에서 발행한 <평창의 인문지리> 증보판 (글: 정원대 감수: 권혁진) 70쪽에는 <평창군 지명지>와는 다른 내용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기왕에 발간된 <태백항전사>(1986), 평창읍지(1986), 강원지방의 임진왜란사(1988) 등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평창에 진입한 후 당시 권두문 군수는 지역민들과 함께 평창 노산성에서 전투를 벌이다 성이 함락된 후 응암굴로 들어간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평창군수 권두문이 응암굴 전투에서 패전하여 왜군에게 포로로 잡혀 전전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경험을 적은 일기 <호구일록虎口日錄>에 의하면 그러한 내용은 전혀 없고 일본군이 평창으로 진격해오자 바로 응암굴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항전할 준비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지난 1982년 세운 ”임진노성전적비“와 1984년 평창군에서 기록한 내용은 적어도 사료적 근거는 없는 사항임. 출전: 임진왜란과 평창, 유재춘 강원대학교 교수”

 

나는 2020년 8월 14일(금) 오후에 평창군에서 주관하는 평창시민대학 역사기행 강연을 서울대학교 평창 캠퍼스에서 들었다. 당시 강사는 강원대 사학과 유재춘 교수이었는데, 그는 “노산성은 전투한 것 같지는 않고 수리한 흔적만 있다. 임진왜란 당시 평창군수 권두문이 쓴 <호구록>에 보면 노산성에서 전투했다는 기록이 없다”고 발언하는 것을 들은 바 있다.

 

내가 직접 조사해 보니 <호구록> 8월 7일자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러 군관(軍官)들이 모두 주먹을 쥐고 팔을 올리면서 큰 소리로 '응암(鷹岩) 하험굴(下險窟)은 난공불락의 요새이며 군기와 장비도 그만하면 비록 많은 적이 온다한들 겁낼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성주께서는 동촌(東村)으로 가시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하기에 나는 '내 뜻도 그러하다'하고 응암으로 가기로 하였다. 이날 밤을 타고 적 선발대가 정선으로부터 입군(入郡)하였다."

 

그러니까 <호구록>의 기록에 의하면, 왜군이 가까이 오자 권두문 군수는 참모회의를 열었다. 참모들은 응암굴로 피신하자고 주장하였고, 군수는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응암굴로 피신하였다. 노산에서 왜군과의 전투는 없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간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평창 노산성을 검색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80호. 둘레 517m, 높이 1.32m. 노성산(魯城山) 정상을 둘러싼 산성이다. 성 한가운데에서 샘이 솟았다고 하며, 성의 북쪽은 평창강의 측방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200m 높이의 절벽이 있어 천연의 요새를 이루었다. 조선 선조 때 김광복(金光福)이 축조하였으며, 1592년 군수로 부임한 권두문(權斗文)이 산성을 보수하고 왜군을 맞아 싸울 대비를 하였다. 왜군이 강릉.정선을 경유하여 평창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루목 이남에 있던 군민들을 모아 지금의 평창읍 응암리의 평창강 절벽 중턱에 있는 응암굴에서 왜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참고문헌-문화재청(www.cha.go.kr)”

 

그러면 노성산성지 비문은 왜 노산을 “왜적의 침입이 있었을 때 이 고장을 지키려는 조상들이 피흘려 싸운 곳”이라고 기록하였을까? 이에 대해 향토사학자인 정원대 선생은 “동학농민군 전투를 임진왜란 노산성 전투로 역사 왜곡한 것으로 사료된다”고 조심스럽게 주장하였다. 필자는 사학자가 아니고 평창강 답사객에 불과하지만 매우 혼란스럽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평창문화원 주관으로 적절한 조사와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오늘 답사의 종점은 임진왜란 이야기가 얽혀있는 응암굴 건너편 펜션이다. 곱게 핀 철쭉꽃이 펜션을 둘러싸고 있다. 종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이다. 오늘 아홉 명이 11km를 걷는데 5시간 45분 걸렸다.

 

 

은곡은 일이 생겨서 방림면 집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8명이서 펜션에서 일박하였다. 저녁 식사 후에 외딴 펜션에 소리꾼들이 모여서 막걸리를 마시며 소리북과 장구를 치고 소고를 두드리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