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17살의 나이에 임금이 된 선조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올라왔지만, 그 자신 이미 70을 바라보던 퇴계 이황(1501~1570)은 임금에게 훌륭한 왕이 되어 선정을 펼 기본 조건을 다 말씀드린 뒤에 거듭 사직을 호소하다가 이듬해인 선조 2년(1569년) 음력 3월 4일 마침내 돌아가라는 허락을 받는다. 퇴계는 경복궁 사정전에서 임금에게 사직을 고하고 곧바로 도성을 나와서 한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시작하였다.
이튿날인 3월 5일에 지금의 금호동 근처 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널 때에 배 안에 많은 명사와 선비들이 함께했다. 그 가운데는 편지로 사단칠정론을 논하던 제자 기대승도 있었다. 정신적 스승을 보내는 기대승은 이런 시를 지어 작별을 아쉬워했다;
江漢滔滔萬古流 한강수 도도히 만고에 흐르는데
先生此去若爲留 선생의 이번 걸음 어찌하면 만류할꼬
沙邊拽纜遲徊處 백사장 가 닻줄 잡고 머뭇거리는 곳
不盡離膓萬斛愁 이별의 아픔에 만 섬의 시름 끝이 없어라
이에 선생이 기대승의 시의 운을 사용해서 답시를 짓는다.
列坐方舟盡勝流 배에 둘러앉은 사람 모두가 훌륭한 인물들
歸心終日爲牽留 돌아가려는 마음이 종일토록 붙들려 머물렀네
願將漢水添行硯 한강물 가져다 행인의 벼루에 담아
寫出臨分無限愁 이별의 무한한 시름 써 내리라
뱃전에서 이별을 아쉬워하는 많은 제자 선비들의 마음이 한강물에 담겨 있다면 그 물로 먹을 갈아 이별의 시름을 다 담아내겠다는 말이다. 퇴계의 귀향길은 그의 마지막 귀향이었다.
그 전에 수없이 암금의 부름을 받아 올라왔다가 내려가곤 했지만, 이 해의 귀향을 마지막으로 퇴계는 그다음 해에 세상을 뜨게 된다. 그러나 그 마지막 길은 한 시대의 선비로서 새로 등극한 임금의 선정을 위해 온갖 학식과 지혜와 경륜을 <성학십도>와 <무진육조소> 등에 담아 올린 뒤여서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고향에 내려가서는 학자로서의 길을 마침내 완성한다.
3년 전 도산서원과 선비문화수련원은 450년 전 퇴계 귀향의 의미를 우리들이 공부해보자는 의미에서 서울 경복궁에서 안동 도산서원까지 700리의 귀향길을 실제로 걸으면서 퇴계의 가르침을 생각하는 행사를 해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올해 3번째 행사가 마침 음력 3월 4일이던 지난 4월 4일 다시 시작됐다. 경복궁에서 그를 연구하고 따르는 이 시대의 학인들이 그 발길을 다시 따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름하여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그의 귀향길이 우리에게 무슨 길을 말해주는지를 같이 공부하고 따라가 보자는 마음에 필자도 4월 8일 아침 8시에 양평 국수역 앞에 섰다. 이곳에서부터 귀향길 5일 차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도포를 차려입고 갓을 쓴 선두 그룹과 일반 참여자들은 퇴계가 지은 도산십이곡을 노래로 만든 곡 중에 다섯 번째를 함께 부르고는 간단한 사전 운동과 함께 하루 24길로, 60리 안팎의 긴 길을 남한강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마침 날은 활짝 개고 봄의 싱그러운 내음이 산들바람에 실려 코를 찌른다. 걷는 분들은 이미 서울에서부터 60킬로를 넘게 걸어왔지만 피곤한 기색이 안 보인다.
길로 따지면 단순한 귀향길일 터이지만 그 길에는 퇴계의 정신을 이어받은 많은 선비의 면면과 역사와 가르침이 남이 있음을 이번에 처음으로 배우게 되었다. 양평읍 오빈리로 가는 길에 남한강 변에서는 즉석 강연이 펼쳐진다. 강 건너편에 있는 산 쪽에 천진암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진흥사업단장인 정순우 박사가 다산 정약용과 그 형제들의 천주교 서학 공부를 하다가 몰린 역사, 그 선배 격인 권철신이 천주교도로 몰려 끝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고 사후에 다시 능지처참을 당하는 엄혹한 사연 등등 당시 서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두고 펼쳐진 갈등과 젊은 지성들의 수난사를 정리해준다.
인문지리학을 연구하신 김덕현 님이 이 일대 산과 물이 이뤄낸 역사와 인물을 설명해준다. 귀향길 행렬의 기수를 맡은 이한방 님은 길을 걸으며 인문지리뿐 아니라 보학에 남다른 경지를 열어주신다. 인물들의 학맥, 혼맥을 짚어주며 당시 지식인들의 동향을 어제 일처럼 환하게 설명해준다.
조금 더 가니 ‘감호암’이란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실학자인 성호 이익(李瀷,1681~1763), 그 제자인 권철신(權哲身, 1736~1801)과 권일신(權日身, ?~1791) 형제가 이 근처에 살았고 다른 지식인들과 자주 이곳에서 학문적인 토론을 벌이던 곳이란다.
영조 39년인 1763년 스승 이익이 죽고 나자 권철신의 학문적 명망을 익히 알고 있는 많은 후학이 그의 문하로 모여들었다. 덕분에 감호의 권철신 집은 늘 선비들로 북적거렸다. 그 가운데는 정약전, 정약용 형제 등 이웃 마을의 젊은 학자들도 있었다.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권철신을 젊은 유학자들은 좋아했다. 그러나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여 보려는 신진들은 천주교를 사교로 보는 기존 정치인들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수난을 겪는다.
조금 더 가다 보니 강변에 큰 성당이 보인다. 양근성당이다. 이곳에서는 9명이 순교를 했기에 가톨릭성지로서 신자들이 많이 찾는다. 그러니까 남한강 물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이곳이 지성인들의 향연이 펼쳐지다가 역사의 아픔을 겪은 곳이었다.
일찍이 이곳에 살던 성호 이익은 퇴계의 사상을 집약한 《이자수어(李子粹語)》라는 책을 펴냈고, 그 제자인 권철신의 영향을 받은 다산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이란 명 독후감 겸 공부한 기록을 남겼다. 퇴계의 학문을 단순히 도학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당시 지식인들의 고민이었던 경세, 곧 현실에서 어떻게 좋은 사회를 이루는가 하는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아준 셈이다.
그렇게 본다면 퇴계가 지나간 이 길은 곧 그 뒤에 이어져 온 정신적인 유산까지 공부하는 셈이다. 그런 것을 함께 걸어가 주신 사계의 권위자들에게서 듣고 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의 귀향길은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밟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가 남긴 학문적인 유산과 정신적인 가르침까지도 같이 배우는 소중한 이동학습장인 셈이다.
우리들의 발길은 배개나루를 찾았다. 1569년 음력 3월 8일 퇴계는 한여울에서 출발하여 남한강을 따라가다가 배개나루(梨浦)에서 묵었다. 여기에 한여울, 또는 대탄(大灘)이라고도 하는 곳이 있는데, 남한강에서 가장 큰 여울이어서 이곳을 거슬러 올라갈 때는 선객들이 모두 배에서 내리고는 여러 배의 뱃사공들이 힘을 합쳐 온몸으로 끌어올렸다고 한다. 그 나루터는 이포대교가 만들어지면서 사라졌다.
오후에는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이포리에 있는 기천서원을 방문했다. 1580년(선조 13) 김안국(金安國)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여주에 세워진 서원이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자 1608년 현재의 자리에 재건되었다. 조선시대 명망이 높은 이언적, 홍인우, 이원익, 홍명하 등을 배향하였으며 그 뒤 다시 불에 탔다가 1871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는데 반세기 뒤 다시 복원되었다. 그 역사를 느끼고 배향된 분들께 절도 올렸다.
모재 김안국(金安國, 1478(성종 9)∼1543(중종 38)은 중종조의 대표적인 학자 겸 경세가였다. 일찍이 퇴계는 33살 때인 1533년에 고향으로 내려가다가 여주 이호촌에 물러나 있던 모재를 찾아뵌 적이 있다. 모재는 1517년에 경상감사로 내려가다 오랜 친구이며 퇴계의 숙부인 송재 이우를 찾아온 길에 17살의 퇴계와 22살인 온계 두 형제를 보고는 큰 격려를 해 준 일이 있다. 퇴계는 "모재(김안국)을 뵙고 나서 비로소 정인군자의 언론을 처음으로 들었다."라고 만년에 밝혔다. 퇴계에게 김안국은 자신을 키워준 정신적인 스승이자 학문적인 선배였던 것이다.
그런저런 공부를 하며 걸은 길이 이날 하루 동안에 23킬로, 근 6십 리 길이다. 다리도 아프고 특히 허리가 아프지만, 그 길을 걸어온 것이 자랑스럽다. 단순히 걷기만 했으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러나 뜻을 같이한 분들과 걸으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을 나누다 보니 이 육십 리가 아주 먼 길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날 밤 퇴계 연구에 평생을 바친 전 연세대 이광호 교수가 합류했다. 이튿날인 4월 9일 맑은 아침 공기를 마시며 다시 이포나루에 모인 우리는 퇴계의 시조 도산십이곡 가운데 6곡을 소리높여 불렀다.
춘풍에 화만산(花滿山)하고 추야(秋夜)에 월만대(月滿臺)라
사시(四時) 가흥(佳興)이 사람과 한가지라
하물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야 어느 끝이 있을꼬
그리고는 곧게 난 자전거 길을 따라 여주로 향한다. 한강변이 잘 다듬어 있어서 걷기에는 참으로 으뜸 코스다. 길옆으로는 온갖 꽃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제주도가 원산이라는 왕벚꽃도 많이 심겨 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강변의 넓은 평지에 자동차 공원이 생겨 차를 몰고 온 분들이 편안하게 차를 세우고 천막을 세워 거기서 아주 편한 휴식을 즐기더라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생활이 많이 바뀌었다고나 할까? 캠핑카들이 저리 많이 있구나. 어느새 우리들의 중요한 레저방법으로 일상화되고 있구나 하는 놀라움이 밀려왔다. 다시 12킬로를 더 걸어 여주에 도착한 필자는 이 행렬에서 빠져나왔다. 서울에서 다음날 일정이 있어서인 것이다. 그렇지만 귀향길은 계속 이어진다. 구간별로 전문학자분들이 합류해서 퇴계의 다양한 면모에 대해 도중강의를 해 준다.
4월 13일에 단양향교에 도착하고 그다음 날 죽령을 올라 그 옛날 퇴계가 중형이신 온계 이해와 만나고 헤어졌던 일을 추억하고 풍기관아, 영주 이산서원을 거쳐 17일에 안동의 도산서원에 이르는 긴 여정이다. 앞으로도 근 200킬로를 더 가야 한다. 그 길에서 많은 깨우침을 받고 싶지만, 세속의 일이 나의 발길을 돌리게 만든다. 내년에 다시 열리면 그때는 전 구간을 한번 도전해볼까?
퇴계보다 한 세대 다음 사람인 이순인(李純仁, 1533~1592)은 한강에서 퇴계를 송별하면서 이런 시를 남겼다.
漢水悠悠日夜流 한강물 밤낮으로 유유히 흐르는데
孤帆不爲客行留 외로운 돛배 나그네 행차 붙잡지 않네
鄕關漸近終南遠 고향은 가까워지지만 서울은 멀어지니
可是無愁還有愁 시름 없을 것 같은데 오히려 시름이 있구나
고향에 돌아가시면 당신은 우선 좋으시겠지만 늘 싸움이 많은 중앙정계의 풍파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뜻이니. 그때나 지금이나 바른 학문으로 바른 사람으로 머물기에는 세상이라는 곳은 험하고 바람이 많은 동네다. 그렇더라도 퇴계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을까?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