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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진정한 ‘백세청풍’

안중근 의사의 백세청풍 글씨에 담긴 절의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157]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중복을 지나니 이제 올 더위도 막바지로 접어든다. 다시 엄청 더운 날씨, 이런 상태는 찌는 더위인지 찌는 듯한 더위인지, 어느 표현이 더 정확한지 잘 모를 정도로 덥기는 덥다. 요사이 선풍기다 에어컨이 있으니 몸은 시원해질 수 있지만(우리 집은 아직 에어컨을 안 켰다. 그 비싼 에어컨 사 놓고 왜 안 쓰는지 이것도 고집의 하나겠지) 정신이 문제다. 더위에 탁 지쳐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 이럴 때 머리까지 식혀줄 시원한 바람은 없을까?

 

 

지난 초여름 다녀간 경북 예천 봉양면 삼강리 마을의 한 집에 걸린 글씨가 생각났다. 이름하여 ‘백세청풍(百世淸風)’이다. 삼강마을은 이름에서 보듯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의 세 물길이 만나는 곳, 이곳은 문경 새재와 예천 안동의 내륙지방, 그리고 상주로 이어지는 낙동강 유역사람과 물자들이 교차하는 곳이다.

 

이곳 나루에 주막마을이 조성돼 관광객들이 찾고 있거니와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을에 임진왜란 직후 정승을 지낸 약포(藥圃) 정탁(1526~1605)의 셋째 아들 청풍자(淸風子) 정윤목(1571∼1629)이 세운 삼강강당이 있다. 청풍자는 나이 19살 때 중국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간 길에 수양산에 있는 백이숙제의 사당을 지나다가 거기 비석에 있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글자에 감동해 그것을 실물 크기로 베껴 왔다고 한다.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 시원한 바람이 대대로 끊이지 않고 분다는 뜻일 텐데 길이 남을 맑은 기상을 말한다는 해석도 있다. 중국 상(商)나라(그동안 우리는 ‘은(殷)’이라고 했다.)의 전설적 형제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이들은 상나라 말엽 작은 제후의 나라 고죽국(孤竹國) 영주의 아들이었다. 영주인 아버지는 막내였던 숙제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숙제는 맏형인 백이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나라를 떠났고, 백이 역시 부친의 유언을 존중해 숙제를 왕위에 오르게 하고자 몸을 피했다. 고죽국은 할 수 없이 둘째 아들이 왕위를 잇도록 했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을 떠나 어진 제후로 이름 높던, 훗날 주나라 문왕이 되는 희창에게 몸을 의탁했다. 얼마 뒤 희창이 죽고 그를 이어받은 아들 희발(무왕)은 상나라 폭군 주왕(紂王)을 없애려 했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무왕을 찾아와 간언했다. “주나라는 상나라의 신하 국가이다. 어찌 신하가 임금을 주살하려는 것을 인(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에 무왕 희발은 크게 노하여 백이와 숙제를 죽이려 했으나, 강태공이 의로운 사람이라 말해 죽음을 면했다.

 

백이와 숙제는 상나라가 망한 뒤에도 상나라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다며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살았다. 이때 왕미자(王糜子)라는 사람이 수양산에 찾아와 “그대들은 주나라의 녹을 받을 수 없다더니 주나라의 산에 고사리를 먹는 일은 어찌 된 일인가?”며 책망했다. 이에 두 사람은 고사리마저 먹지 않았고, 마침내 굶어 죽고 말았다.

 

이후 백이와 숙제는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충절을 지킨 의인(義人)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고죽국 수양산에 이들의 삶을 기리는 사당을 지었고, 영원히 이어질 그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주자가 ‘백세청풍’이라는 글씨를 써주었다. 곧 이 글씨는 백이숙제가 굶어죽은 수양산(首陽山) 이제묘(夷齊廟)에 있는 글씨이다. 그러니 성리학을 열심히 공부한 조선의 선비들은 이 글씨를 좋아할 수밖에.

 

정윤목도 이 글을 좋아하여 자신의 호를 ‘청풍자(淸風子)’라 정하고 자신이 실물 크기로 베껴 온 글씨 '백세청풍' 편액을 삼강마을에 건립한 삼강강당에 건 뒤, 그 정신을 본받아 혼탁한 정치현실을 등지고 그곳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으로 일관했다. 서애(西崖) 류성룡(1542~1607)과 한강(寒岡) 정구(1543~1620)에게 학문을 배운 그는 특히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다. 그의 초서는 당대의 으뜸으로 통했다고 한다.​

 

청풍자가 글씨를 베껴 온 것이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얼마 전이었는데, 약 100년 채 못 지난 1687년(숙종 13년)에 수양산이란 같은 이름의 산이 있는 황해도 해주의 유생들이 사당을 세우고 백이와 숙제 두 사람을 제향하며 그 절의를 추모하였고 14년 뒤에 유생들의 소청으로 숙종이 ‘청성묘(淸聖廟)’라는 어필 편액을 하사했는데, 그 뒤 황해도 관찰사 이언정이 주자의 글씨 ‘백세청풍’을 얻어와 이번엔 돌에 새긴 뒤 사당 뜰에 세웠다고 한다.

 

여기뿐이 아니다. 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채미정(采薇亭) 편액, 충남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의 청풍서원(淸風書院)의 비석에 새겨진 글씨, 경남 함양군 지곡면의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 고택의 편액 등이 백세청풍이란 네 글자이고, 경북 안동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1538~1593) 종택(宗宅)에서는 불천위(不遷位) 제사 때 ‘백세청풍(百世淸風) 지주중류(砥柱中流)’란 탁본 병풍을 펴놓는단다. 또 병자호란 때 순절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의 옛 집터(서울 종로구 청운동) 바위에도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확인은 못 해보았다.

 

 

‘백세청풍’글씨가 우리나라에 건너오게 되는 과정에는 특별한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중국 수양산(首陽山) 이제묘(夷齊廟)에 있는 ‘백세청풍’ 글씨를 모사해 오는 도중,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오다가 큰 풍랑을 만났는데 배가 뒤집힐 듯하자 놀란 일행들은 중국 명필이 남의 나라로 건너가는 것을 천지신명이 방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모사한 네 자 가운데 마지막 자인 ‘풍’자를 잘라 물 위에 던졌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풍랑이 잠잠해져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다시 나머지 한 글자를 베껴 올 수도 없고 해서 ‘풍’자는 우리나라 명필의 것으로 채워 넣기로 했다. 그래서 앞의 석 자와 마지막 자는 필치가 다르다고 한다.

 

​이렇게 조선시대 전국 각지의 유생들이 백세청풍이란 글씨를 보며 백이숙제의 절의를 숭앙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 뒤 조선의 역사를 보면 그들의 뜻이 제대로 이 땅에서 구현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백세청풍이 되고자 했으나 숱한 당파의 정쟁으로 사회발전이 이뤄지지 않았고 기어코 나라를 잃어버리고 말지 않았던가?

 

백이 숙제가 따랐던 절의는 크게는 그들이 고죽국이란 나라가 망하더라도 충절을 지키겠다는 것으로 정치를 잘못해 나라가 망하면 백성들의 삶은 무너지는데 그래도 망한 나라에 충성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만일에 그런 식으로 백이숙제의 절의를 따른다면 우리가 일본에 국권을 뺏겼을 때 전국에서 그 전에 많은 분이 목숨으로 나라를 지키던가, 그것이 안 되면 나라를 잃은 뒤에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 했어야 하는데(나라를 잃은 뒤에 단식으로 순국한 분들이 전국에 적지 않지만) 우리는 무력하게 왜국의 치하에 살아야 했음에랴!

 

나라가 망한 다음에 백이와 숙제의 절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보다는 나라가 잘 유지되고 융성하게 하는 것이 데 온갖 지혜를 발휘하고 협력해야 하며, 어쩔 수 없이 나라가 망하는 상황이 되면 그것을 막고 시정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저 새로운 정권에 몸을 맡길 수 없다는 논리로 시대를 살아가는 자세가 이 백세청풍이란 말을 숭상하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으뜸가는 명리였기에 그것이 병자호란 이후 세상이 바뀐 데 대해 눈을 감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만을 내세우다 결국 나라가 기운 것이 아니겠는가? ​

 

그런 면에서 보면 안중근 의사야말로 우리 역사의 한줄기 청풍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자신의 몸을 던져 일본의 침략을 꾸짖고 동양 평화, 이웃 나라와의 공존의 도리를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남긴 백세청풍의 글씨에 담긴 힘찬 기백과 장한 의지가 중국에서 베껴 왔다는 주자의 백세청풍 글씨보다도 더 우리에게는 큰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맹자는 “백이(伯夷)의 청풍(淸⾵)을 들으면 완악한 사람은 청렴해지고, 나약한 사람은 뜻을 세운다"고 했다는데(《맹자(孟子)》 「만장-萬章 하-下」), 진정으로 뜻을 바로 세운 분은 안중근 의사이구나. 무덥다고 지친다고 조금씩 정신이 지쳐가는 이 중복 더위지절에, 여순 감옥에서 밀 없이 무더위를 이기고 동양평화를 역설하며 일본 순사들을 감복시킨 안중근 의사의 꼿꼿한 절의를 생각한다. 안중근 의사가 쓴 백세청풍 글씨에서 시원한 절의의 바람을 받는다. 그 정신을 조금이라도 이어받으면 이런 더위쯤이야 더위라고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