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중복이 지나고 입추도 지나고 다음 주초에 말복이 지나면 무더위도 제풀에 꺾을 것으로 기대를 하지만 요즈음 하루하루를 넘기기가 쉽지 않다. 장마가 간 것도 같고, 가지 않고 미련스럽게 한반도를 덮으면서 큰비를 내리기도 하고 그렇게 한 여름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 와중에 힘든 것은 우리들 서민이다. 서민이라고 하면, 당신이 무슨 서민이에요? 하고 필자에게 항의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전기요금이 무서워 에어컨을 마음대로 원하는 만큼 틀지 못하는 가정은 다 서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요즈음 여름 나기는 옛날 임금이나 황제도 못누리는 편안함과 사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그것은 얼음을 마음대로 쓰고 먹을 수 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웬만한 집 냉장고에 얼음을 만드는 장치가 달려 있으니 필요한 만큼 만들어 쓰면 되고 그게 아니면 마트에 가서 빙과류나 청량음료, 심지어는 주류도 얼음처럼 시원한 것을 선택해 먹거나 마실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럴 때 “우리 어릴 때는 말이야~~” 하고 말을 시작하는 것이 나이 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화법인데, 사실 우리 어릴 땐 얼음이 그렇게 쉽게 쓰거나 먹고 마실 상황은 아니었고, 그런 만큼 얼음은 늘 귀한 존재였다. 그때는 물론 지금처럼 각자의 가정에서 얼음을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공장에서 만든 큰 얼음덩어리를 트럭이나 자전거에 싣고 와서 잘라서 팔았고, 그때 톱으로 얼음을 썰 때의 그 하얀 가루를 좀 더 가까이에서 느껴보고자 자신도 모르게 발꿈치가 다가가는 그런 경험은 우리 나이 든 사람의 추억일 터이다.
얼음은 신이 준 선물 가운데 더위를 이길 가장 좋은 선물이지만 인공으로 만들 수 없어 우리나라를 비롯해 각국은 겨울에 언 얼음을 잘라 보관하다가 여름에 쓰고 했기에 임금이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미국에서는 19세기 초까지도 프레데릭 튜더(Frederic Tudor)란 사람이 보스턴 지방에서 얼음을 채취해 배에 싣고 쿠바를 비롯한 더운 나라에 얼음을 수출하는 얼음장사로 돈을 버는 등 천연얼음이 활용되었다.
사실 인류가 처음 얼음을 발명한 것은 1748년 영국의 과학자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1834년에 얼음을 만드는 제빙기로 발전했고 그 기술이 우리나라에는 1910년 이후에 전해져 일반인들도 얼음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역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뭐 그런 것보다도 요즘처럼 무더위에 더위를 피한다고 집 안에서 꼼짝을 않고 있으면서 시원한 얼음을 탄 수박냉채를 떠먹다가 문득 예전에 이 얼음을 채취하느라 서민들이 무척 고생했음을 알려주는 시를 하나 발견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싶어졌다. 조선조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이 쓴 ‘착빙행(鑿氷行 얼음 캐는 노래)’이란 시다.
季冬江漢氷始壯 동지섣달 한강 물 얼음 굳게 얼어붙자
千人萬人出江上 천 사람 만 사람이 강가로 나와서는
丁丁斧斤亂相斲 도끼 자귀 쩡쩡쩡 어지럽게 깎아내니
隱隱下侵馮夷國 물속 용궁까지 우르릉 소리 울리고
斲出層氷似雪山 깎아낸 두꺼운 얼음이 설산처럼 쌓이고
積陰凜凜逼人寒 차가운 음기는 뼛속까지 파고드는데
朝朝背負入凌陰 아침엔 얼음 져서 빙고(氷庫) 안으로 옮기고
夜夜椎鑿集江心 밤이면 망치 끌 들고 강 한복판에 모이누나
晝短夜長夜未休 낮은 짧고 밤이 긴데 쉬지도 못하고
勞歌相應在中洲 메기고 받는소리 강 가운데 퍼진다
短衣至骭足無屝 무릎이 드러난 짧은 옷, 짚신도 신지 않아
江上嚴風欲墮指 강 위의 매서운 바람에 손가락 떨어질 듯
이렇게 추운 겨울 강에 소집되어 얼음을 채취하는 작업을 하는 서민들이 참상을 묘사하고는 이어서 그 얼음들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분석한다.
高堂六月盛炎蒸 고루 거각 한여름 푹푹 찌는 무더위에
美人素手傳淸氷 미인의 흰 손바닥 맑은 얼음 쥐어주고
鸞刀擊碎四座徧 난도로 잘게 부숴 온 좌석에 나눠줄 제
空裏白日流素霰 느닷없이 맑은 날에 싸라기눈 흩날린다
滿堂歡樂不知暑 더위 모르고 즐기는 당에 가득 저 사람들
誰言鑿氷此勞苦 얼음 깨는 이 노고를 그 누가 말해주겠나
君不見道傍暍死民 그대 아니 보았느냐 길가에 더위 먹어 죽은 백성
多是江中鑿氷人 강 가운데 얼음 깨는 사람이 많던 것을
원 시에는 6월이라고 했는데 음력임을 생각하면 한여름을 게다. 그런 무더위에도 고대광실 정자 위에서는 잔치상이 벌어지고 그 자리에서 어여쁜 여인들, 아마도 기생들에게 얼음을 나눠주며 높은 분들이 희희낙락하는데, 그들이 얼음을 캘 때 서민들의 고생을 누가 생각도 해보는가? 한여름 더위 먹고 죽어가는 서민들이 바로 그 얼음을 캐던 사람들임을 그대들은 아는가 하고 묻는다.
아마도 조선시대 시 가운데 서민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해 고발한 드문 현실주의 문학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를 쓴 김창협은 22살인 숙종 8년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일찍부터 조정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주요 직책을 섭렵했으나 1689년 장희빈이 나은 왕자의 세자책봉문제로 빚어진 기사환국 때 부친인 김수항(金壽恒)이 사약을 받자 사직을 하고 경기도 포천에 은거하면서 나중에 부친이 신원이 되고 나라에서 그를 관직으로 수없이 불러도 조정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을 가르치며 일생을 보냈는데, 이런 서민들의 고통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발표함으로써 우리가 그 고통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조선시대에는, 겨울철 한강에 얼음이 얼면 그 얼음을 떠서 얼음 창고인 ‘빙고(氷庫)’에 보관했다고 하지 않던가? 얼음 창고는 ‘장빙고(藏氷庫)’이고 얼음을 떠서 옮기는 이들은 ‘빙부(氷夫)’라 하는데, 한강변 인근의 서민들이 부역으로 얼음을 깨고, 창고에 넣는 일을 했고 부족한 인력은 노비, 군인으로 보충했다고 한다. 지방에서는 승려들까지 얼음 부역에 동원됐다. 왕실과 양반 권문세가들이 여름 한 철에 누리는 시원한 얼음의 혜택을 위해서는 이렇게 한겨울 힘들게 추위에 동상이 걸려가며 얼음을 채취하고서도 먹고살기가 힘들어 한여름엔 죽어 나가는 서민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얼음들이 보관되던 곳이 동빙고, 서빙고라는 지명으로 남아있고, 그 자리는 이제 고층 아파트에 시민들이 한강변 조망을 즐기며 에어컨에다 냉장고의 얼음으로 이 여름을 잘 견디고 있다. 사실 서빙고 동빙고동에 사는 분들을 특별히 언급할 이유는 없다. 단지 예전에 그렇게 서민들이 고생하면서 채취한 얼음들을 보관하던 그 현장이란 뜻일 뿐이다.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특히나 서울에서는, 많은 사람이 에어컨과 냉장고로 여름 무더위를 많이 식히며 살고 있다. 그들이나 나나 이 여름 문득, 그 옛날 얼음을 잘라내기 위해 고생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염치없이 살고 있다. 꼭 그들만이 아니라 현대에도 무더위 속에서 싸우고, 더위에 지쳐도 삶을 위해 모든 고생과 고통을 참아야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이 여름 그 옛날 얼음 캐는 노래를 들으며 미안해하는 것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우리가 이런 옛사람들의 고생을 다시 접하면서 오늘날 미안함을 느낀다면, 이 여름 얼음창고가 아니더라도 고생하는 많은 사람이 있음을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우리는 꼭 여름만이 아니라 삶의 다른 계절, 다른 시간에 나 말고 삶 속에서 고생하는 분들, 세상이 힘들어 하직하려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활주변에서부터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 사회의 무더위를 식혀주는 사랑과 배려와 실천으로 이어지지는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