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올해 겨울은 예년보다 춥고 눈도 제법 많이 내리고 있다. 지난주 금요일은 ‘대한’이었는데, 예전에는 소한 대한 추위가 별로 세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올해는 센 정도가 아니라 매섭고 그것이 설 연휴로 이어졌다. 모처럼 겨울 같은 겨울에 새해를 맞은 셈이다. 그렇게 추운 어느 날 서울 시내에 일이 있어서 나가 보니 다들 움츠리고 길을 걷는데, 헐벗은 가로수들 기둥들에서 무슨 알록달록한 색깔이 보인다. "어 이거 뭐지? "하고 가까이 가 보니 나무들이 털실로 된 천을 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 눈높이 정도니까 목도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조끼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허리나 어깨 정도의 높이에 꽃이 수 놓인 뜨개질 천들이 나무 기둥을 잘 감싸주고 있는 게 아닌가? 처음 볼 때는 기계로 뜬 것이겠거니 했는데 가까이 가서 만져보니 진짜 손으로 뜬 털실이다. 그리고 그 솜씨가 아주 뛰어나서, 작품마다 아주 아름답다. 은은한 초록 바탕에 매화꽃이 활짝 핀 것도 있고 노란 해바라기꽃 같은 것도 있다. 때로는 섬세하게 때로는 대담하게 진한 색조의 대비가 우울한 겨울의 거리에서 밝은색의 향연으로 눈을 확 끌어당긴다.
이 회색의 음산한 도시 겨울에 누가 이처럼 아름다운 꽃을 만들어 올렸을까? 궁금증에 나무를 한 바퀴 돌아보니 한쪽에 이름이 있다. '서울 소공동 주민센터'와 '서울정동협의체'라는 단체 이름이 보이고 이 털옷을 만든 분으로 보이는 이름도 붙어 있다. 소공동 주민센터는 이 일대를 관할하는 행정관청일 터이니, 정동 협의체라는 모임과 함께 이 일을 했다는 뜻일텐데, 정동협의체라는 것은 무슨 모임이나 단체인가?
알아보니 ‘서울정동협의체’는 정동 일대에 근거지를 둔 26개 정회원 단체와 8개 협력회원 단체가 참여해 2016년 출범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란다. 문화예술기관, 종교단체, 기업, 공익기관, 학교, 언론사, 주한 외국 대사관 등이 지역을 아름답게 만들고 가꾸어보자는 남다른 애착과 열정을 가지고 회원으로 참여한단다. 주민 참여로 지역도 아름답게 관리해보자고 사회적 협동조합도 출범시켰다고 한다. 과연 이 길거리 주민들은 남다르구나...
서울 중구 정동, 일반인에게 정동길로 널리 알려진 이곳은 대한문 옆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돈의문 옛터 인근에 있는 경향신문 사옥까지 이어진 길이다. 사실 이 길은 이름이 있는 길로 1999년에 서울시가 걷고 싶은 거리 1호로 지정했고 2006년 건설교통부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을 꼽으면서 최우수상을 이 길에다 주었다고 한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봄부터 여름, 가을까지 많은 사람이 찾는 길로서, 이문세의 노래 '광화문 연가'에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있어요..."하며 나오듯이 덕수궁 돌담을 끼고 많은 연인이 함께 걷고 그렇게 만남과 사랑, 때로는 이별의 아픔까지도 되새기는 것이 돌담 혹은 길바닥 포장돌마다에 맺혀있는 것을 우리는 안다.
뭐 그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뭇잎이 다 떨어져 쓸려간 뒤 황량해지면, 이 골목길을 따라 부는 칼바람이 귀와 볼때기를 때릴 때는 사람들의 낭만과 추억은 다 어디론가 날아가고 쓸쓸한 것이 사실인데, 이 겨울에 이런 아름다운 꽃들이 나무 등걸 위에 피어있다니, 이런 아름다운 꽃을 뜨게질로 만들어 올려주신 분들은 도대체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들일까?
그러고 보니 필자는 늘 그곳을 다니는 사람이 아니어서 잘 몰랐지만, 이 길에서 여러 기억할만한 일들이 가끔씩 일어나는 모양이다. 이 ‘서울 정동 사회적 협동조합’은 주민협의체가 주축이 되어 정동 역사재생 관련 공모사업 등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단다. 지난 가을에는 ‘정동야행(貞洞夜行)’이라고, 달빛 아래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을 걸으며 가을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행사가 3년 만에 다시 열렸고 정동길 바닥을 꽃카페트로 장식하는 시연행사도 가졌단다.
뭐, 겉으로 드러난 것도 좋지만 이런 길을 걸으면서 흐뭇해지는 것은 이곳 주민들의 마음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는 기쁨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자기 앞가림하기도 귀찮아하는 세상에서 자신들이 사는 동네를 이렇게 아름답게 꾸미는데 조용히 참여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 아닌가? 나무에 예쁜 방한 목도리를 떠서 둘러주고는, 거기에 자기 이름 하나 얹는 것으로 보람을 느끼는 분들이다.
예전에 영국 런던에 있을 때 동네에 가면 길옆 벤치들이 있는데 거기에 그 벤치를 기증한 주민들의 이름이 작은 명패로 붙어 있는 것을 볼 때의 감동과 같은 것이리라. 몇 년 전 가을에 은평 쪽 길거리 가로수에 구청 주도로 예쁜 시화(詩畵)들이 걸린 적이 있었지만, 이곳은 주민들이 스스로 참여한 것이기에 그 값어치가 남다르다고 하겠다. 이런 길을 걸으면 길옆 어느 찻집이라도 들어가 차 한잔하면서 음악을 들으며 이 길에 어떤 사람들이 지나가는가 보고 싶어질 것이다. 음악도 감미로운 '로망스' 같은 것을 골라 듣고 말이다.
삶이란 이렇게 서로 마음으로 만나고 나누고 교류하는 데서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남이 해주는 것을 기다리고, 관청이 안 해준다고 입이 나오고 하는 것보다도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다 함께 마음으로 합쳐 이뤄내는 일, 그것이 곧 삶의 성취이고 보람일 것이다. 흰 눈이 내리지 않아 아주 썰렁했던 지난주 어느 날 정동길을 걸으면서 느꼈던 그 훈훈한 마음이 이 겨우내 내 마음을 데워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삶의 꽃은 꽃을 심고 피우려는 사람들에게 필 것이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