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안치환의 노래 가운데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가 있다. 노래 가사가 애정이 넘치고 사랑스럽다.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으음~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아래 줄임)
다정한 연인끼리의 애정행각과 환상의 세계를 그림으로 펼치듯 그 감정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라고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가사 내용에 꽃과 만난 적도, 꽃이 나라고 모습을 드러낸 적도, 꽃과 사람의 장단점을 대조하여 나타낸 근거도 없다. 하지만 어떤 발상에서인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다. 꽃의 우월성을 말하기 전에 꽃은 꽃일 뿐, 인간과는 별개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도 사람이 꽃을 들어 말함은 꽃이 그만큼 아름다운 것이고, 누구나 가까이하고 싶은 대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안치환의 노래와 비교되는 게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는 꽃을 의인화시켜 인간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서로의 존재 값어치를 인식시키고자 하는 절절한 욕구가 서려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도 꽃을 예시적 대상으로 삼았을 뿐, 꽃에 대한 어떤 특성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꽃이라고 불러줄 때 비로소 꽃이 된다는 것, 이것이 중요한 사실일 듯하다. 꽃은 자신이 꽃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보는 이가 꽃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그 꽃은 이름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어느 사람이든 자기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존재 값어치를 얻기 어렵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런가 하면, 진상준의 ‘호박꽃도 꽃이다’라는 노래가 있다. 노래 가사는 이러하다.
호박꽃도 꽃이다
코가 좀 못났으면 어때
눈이 좀 못났으면 어때
뚱뚱하면 뭐가 어때서
잘난 사람 잘난 대로
못난 사람 못난 대로
멋있게 사는 내가 최고지 (이래 줄임)
호박꽃을 못생긴 꽃이라는 단정하여 사람들과 빗대어 얼굴과 품격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호박꽃은 결코 못생긴 꽃이 아니다. 호박꽃이 얼마나 순박하고 복스러우며 부잣집 맏며느리같이 후덕하게 생긴 꽃인가. 호박꽃과 견줘 어찌 장미꽃, 수선화, 목단이 더 예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꽃들의 세계에서 꽃들끼리 서로 잘났고 못났다고 견주거나 차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이름 모를 들꽃이나 쓰레기 매립장 옆 둑에 핀 꽃을 두고 어찌 천박하다고 말하겠는가. 이 모두가 인간이 지어낸 분별과 차별의 소산일 뿐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분별과 차별은 도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추남ㆍ미남, 추녀ㆍ미녀로 구분시켜 극한 대립과 위화감을 고조시키고 있는 것 또한 인간의 수치를 그대로 보여주는 단서가 아닐까 싶다.
어찌 세상의 아름다움을 단순한 인간 능력과 편견의 잣대로 가늠할 수 있으랴. 먼 옛날부터 진행되어왔던 고질적인 성차별이었다. 신분의 차이에서도 기득권과 권력을 남용해 잔인하고 추악한 행동을 얼마나 많이 저질러 왔던가.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금수저ㆍ은수저ㆍ흙수저라는 희귀한 전염병이 어린이들에게까지 오염시키고 있다. 이런 의식에 대하여 모두가 남의 일인 듯 방관하고 있는 듯하다.
꽃들의 세계를 살펴보라. 그네들에게 어찌 서로 다투고 질투하거나, 음해하고 살상하는 일이 있는가. 그들은 걸림 없이 자유롭게 자기의 아름다움과 고유한 향기를 내 품어 벌, 나비 등 사람들에게까지 다양한 양식을 제공하고 즐거움과 행복을 선사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꽃의 아름다운 세계를 빌려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고, 꽃보다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써가며 꽃을 항상 곁에 가까이 두고자 한다.
그러니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될 수밖에 없다. 꽃을 닮아 다른 사람에게 꽃처럼 자비와 사랑을 베푼다고 한다면, 그나마 인간의 체면을 유지하는 길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인간의 아름다운 삶의 기준을 인간의 욕망에 설정할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 맞추어 순응해야 하고, 꽃처럼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만물의 세계에는 분별과 차별을 넘어선 진리의 세계가 존재한다. 불경에 이르기를.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라고 하였다. 모든 존재는 공(空)하여 생겨나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으며,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없다고 하였다.
진리의 세계는 공하기 때문에 인간뿐만 아니라 지상에 모든 존재가 각각의 개성과 삶의 값어치와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진리를 떠나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평등 속에서 ‘너다ㆍ나다’, ‘잘났다ㆍ못났다’, ‘귀하다ㆍ천하다’는 분별과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붓다뿐만 아니라 예수, 공자, 마호메트 등 여러 성인이 한결같이 부르짖었던 평등사상이었다.
하지만 그분들의 진실한 메아리가 바르게 전달되지 않고, 이 시대 삶 속에는 일부 사람들이 종교나 성인들의 사상을 변질 왜곡하여 부와 명성과 권력을 쟁취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더구나 그 세력들을 추종하고 따르는 이들 또한 올바른 진리의 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가식적 꽃을 진리의 꽃으로 알고 꽃을 찾고, 꽃에 비유하고, 꽃과 같이 살고 싶어 하고,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꽃은 자신이 아름답다고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꽃을 좋아한다. 아름다움에 취해 노래한다. 꽃을 꼭 잡아 붙들어 매 두고 싶어 한다. 꽃은 이같이 사람의 마음을 매혹하는 특별한 비결이 있는 것일까? 얼굴이 예뻐서, 젊은이들이 열렬히 사랑하는 모습에서, 잘 다듬어진 신부의 모습 때문일까. 아니다! 꽃처럼 아름답다는 것은 단순한 옷맵시나 외모를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꽃처럼 될 수 있는 비결은 없는 것일까? 있다. 다음 세 가지 예를 보라.
조선시대 정조 때의 일이다. 제주도에 김만덕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12살에 부모를 잃고 기생집에서 더부살이로 살다가 신분을 되찾아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여자 신분으로 장사를 시작하여 큰돈을 벌었다. 1795년 엄청난 태풍이 제주도를 휩쓸고 지나간 뒤 제주도는 쑥대밭이 되었는데, 그때 제주 사람들을 구해낸 사람이 김만덕이다. 그동안 벌어놓은 전 재산을 굶어 죽어가는 제주민들을 위해 아낌없이 다 내놓았다.
고흥 소록도라고 하면 누구도 가기를 꺼리는 소외된 땅에 한국인도 아닌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 마니안느 스퇴거(1934년 생)와 마가렛 피사렉(1935년 생)이 와서 40년을 넘게 독신으로 한센병(나병) 환자들을 돌보다가 2005년 본국으로 돌아갔다.
얼마 전, 서울에 사시는 박순덕(86) 할머니는 지난 5월 2일 고향인 전북 정읍시 칠보면을 방문해 경제적으로 어려워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에게 써달라며 성금 1억 5천만 원을 전달했다. 이날 기탁된 성금은 박 씨가 평생 폐지, 깡통 등을 수집해 알뜰히 모은 돈이었다.
이들은 누가 뭐래도 인간 꽃이다. 꽃은 자기가 꽃이라고 말을 하지 않듯, 꽃이 된 사람도 자신을 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곁에는 항상 은은한 향기가 피어나 세상을 아름답고 맑게 한다.
그 밖에도 어려움 속에서도 사회의 꽃이 되어 선행을 끊임없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꽃이 되어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꽃이 되지 못한 사람은 자기 곁에 꽃 같은 사람이 있을지라도 알아보지 못한다. 아집과 욕망에 취해 꽃처럼 아름답게 사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하물며 어찌 그들에게 꽃 같다고 하겠는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겠는가. 꽃 같다는 수식어는 누구나 쓸 수 있어도 누구나 꽃 같은 사람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산방 뜨락 담 모퉁이에 해당화가 환한 미소로 온 누리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건너편 산자락에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꽃 향기가 넘실넘실 바람에 실려 창 너머 좁은 서실을 가득 채워주고 있다. 풍요로운 꽃 에너지를 받아 어떤 꽃이 될까 사색해 본다. 꽃보다 아름답기를 바라기보다, 꽃처럼 아름답게 살기를 바란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듯, 꽃이 된다는 것도 마음먹기에 달려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