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길을 가는 사람을 붙들고 "당신은 왜 사나요?" 하고 묻는다면, 뜬금없는 질문에 누구나 질색하거나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것도 각본에 짜인 문답이라면 몰라도 갑작스럽게 던진 말 한마디, 각자의 삶에 중요한 핵심이긴 하지만 실로 깊고도 난해해서 쉽게 답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온갖 답이 나올 법도 하다. 예를 들면,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다.”
“잘 살고 잘 먹기 위해 산다.”
“죽지 못해 산다.
“소풍 가듯 산다.”
“애(자식)들 때문에 산다.”
“한 편의 연극처럼 즐기며 산다.”
“그저 물 흐르듯 바람같이 산다.”
“산다는 것이 대수냐, 되는대로 살면 되지”
“숨 쉬고 있으니까 산다, 숨 끊어지면 죽는 것이고.”
등등 무성한 답이 예상된다.
생각해 보면 “왜 사느냐?”에 대한 이렇다 할 정답이 없을 것 같고, “숨 쉬고 있으니까 산다.”라는 말에 제일 마음이 간다. 호홀지간(毫忽之間)이라고 했다. 누구나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모호한 상태에서 숨이 끊어지면 그날로 삶을 마감하는 것이 당연지사일 것이다.
늙어 자연사(自然死)하는 죽음이나 병들어 죽는 상황을 빼고, 요즘 텔레비전에서 뜨겁게 방영되고 있는 「한블리」를 한번 보자. 나이와 관계없이, 안전하게 인도로 길을 가는데도 난데없이 차가 인도로 돌진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본인이 아무리 안전운행을 잘한다고 하여도 상대방이 들이박아 교통사고로 비참하게 죽어 나가는 끔찍한 사고들을 실감 나게 보여주고 있다.
그밖에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사고나, 묻지 마 살인 등으로 유명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러기에 내가 이 순간 숨 쉬고 잘살고 있다고는 해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아무 탈 없이 오래오래 잘 살려고 해도 밤새 안녕이다. 그러기에 아침 인사가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란 말이 생겨났을 법하다. 그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그 자체만 가지고라도 얼마나 거룩하고 위대한 일인지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오늘은 어제 죽은 자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시간이지 않은가.
이렇듯 누구라도 한번 가면 못 오는 인생이기에 살아있을 때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여기에서 “한 번 왔다 가는 인생”이라고 하는데, 그보다 사람으로 태어나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거북이가 알을 약 3,000개쯤 낳는데 그중 아기거북으로 태어나는 숫자는 단, 1개라 하 고, 불가(佛家)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확률을 1/2억(정자의 수)이라고 했다."
이렇게 선택받기 어려운 사람의 몸인데, 각자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달리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도 요즘 들어 자기 몸을 학대하거나 극단적 판단으로 자살하는 행위들이 늘고 있으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 참담하기만 하다.
한편 죽음을 살펴보면, ‘세상에서 가장 평등하다’라고 했다. 그것은 가졌건 못 가졌건, 잘났건 못났건, 힘이 강하건 약하건, 예외 없이 언제 어느 때라고 할 수 없지만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어떤 권능자라 할지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특혜를 보장받을 수 없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여러 종교에서는 천당과 극락, 영생과 구원의 손길로 위로하지만, 누구도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없고, 사후의 세계를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여기에 다양한 설을 내놓고 있지만 이것 또한 허무한 죽음에 대한 방편(方便) 곧,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과 수단일 따름이며, 죽음이란 그대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설에 마음이 간다. 그 때문에 짧은 인생 어떻게 사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 소중한 나의 인생, 정말 잘 살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도 뭇사람들은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자기를 학대하고 자해(自害)를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모를 일이다. 그러기에 ‘왜 사는가’에 대한 물음이 우리 삶 속에 항상 부평초처럼 떠다닌다고 하겠다.
올 칠팔월에 며칠 간격으로 학교 교사들이 연쇄적으로 자살하였다. 서울 서초구 모 초등학교 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한 뒤 몇 달 되지도 않아, 지난 8월 경기도 용인고등학교에서 재직하던 교사가 정년을 불과 2년 앞두고 청계산 초입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 뒤를 이어 3명의 교사가 그렇게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죽음의 원인은 인권 침해와 갑질이라고 하는데, 해당 학교와 국가기관의 무성의한 대처가 문제라고 하지만, 과격한 학부모들의 갑질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이라고 했다.
이렇게 막다른 길에서 삶의 포기했던 교사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국가의 잘못된 관행이나, 조직의 허술함, 정의가 사라진 사회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또한 이것은 국민 모두 책임을 져야 할 공업(共業)이라고 하겠다.
이 밖에도 여러 사유로 자살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선진국일수록 자살률이 높다고 하니 기이한 현상이다. 문화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삶의 질도 엄청나게 높아졌는데 왜 날로 자살하는 자들이 많이 발생할까?. 그 가운데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다는 통계가 나왔다.
이렇게 세상을 그만두고 자살을 선택한 분들의 마음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냐만, 자살 동기는 구구절절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이란 말이 생겨났을 듯싶다.
붓다가 연등불(練燈佛, 석가가 과거세에 보살로 수행할 때.)일 적에 제석천(帝釋天, 도리천의 왕을 의미하는 수호신)에게 “제행무상諸行無常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였다. 제석천이 답하기를 “그대가 죽어봐야 그 뜻을 안다.”라고 하였다. 연등불은 그 즉시 수천 길 낭떠러지로 몸을 던졌다. 이를 본 제석천은 손을 뻗쳐 연등불을 받아 세우고 게송을 낭송하였다.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涅槃經》
'이 세상 모든 일은 항상이 없다.
이것이 바로 나고 죽는 생사의 법이다.
생(生)과 멸(滅)이 다 소멸하고 나면
그 소멸의 고요함이 즐거움(涅槃)이다.
「진리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또는 그 가르침을 널리 전하기 위해서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않고 공양하고 희생하는 일을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이라 한다. 또 말하기를,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불이(不二)‘라고 하고,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며, 진리를 깊이 깨닫고 나면 모든 것에 자유로워지는 것을 ’여여(如如)‘라고 한다. 여여를 산스크리트어로는 ’타타타‘라고 하는데 그 뜻은 원래 본연의 모습이라는 뜻으로 ’변하지 않는 마음‘을 뜻한다.
이처럼 생사와 삶의 문제는 단순하면서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혼자 살면 몰라도 문제는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보니 그럴 것이다. 내가 아무리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려 해도 주위 환경이 미치지 못하면 수렁에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행복한 끈을 놓지 않고 최상의 성취감을 누리고자 한다.
그러나 마음과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간사다. 그것은 개인들의 욕심은 현실적 입장보다 상대적 비교에서 오는 갈등에 더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불행의 원인을 주위 환경이라 하고, ‘내로남불로’ 곧 남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냉정하게 살펴보면 자기의 부족함을 덮을 수 없고 자기를 다스리지 못한 생각이 일으키는 번뇌와 망상, 갈등이라는 것을 헤아려야 할 것 같다.
한편 자기의 생각과 의지만으로 안 되는 것들도 있다. 그것은 인간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생존경쟁이다. 생존경쟁을 피해 초야에 묻어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쨌거나 다른 에너지를 보충하지 않고는 이 시대를 살아가기 힘들다. 또 하나 생존경쟁 속에는 약육강식이 포함되어 있다.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힌다는 뜻이다. 흔히 동물사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더 치열하다. 그 속에 살아남으려면 자신이 강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힘들다.
과거사를 보나, 현재를 지켜보더라도 전쟁으로 인하여 수많은 생명이 이슬처럼 사라져가고 있다. 또 불시에 급습하는 살상들도 보고 산다. 물론 사회적 법이 있고 보장이 있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 말고는 지켜줄 사람은 없다. 어느 때고 자기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할 수밖에 없다.
지구촌에 수많은 사람등은 각각 개성이 다르고 추구하는 길도 다르다. 그 다름 속에서 모두 행복하고 잘 살고자 한다. 그런데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는다. 속담에 “남이 장에 간다고 하니 두엄 지고 나선다.”라는 말처럼, 주위 흐름에 주체성 없이 남을 모방한 삶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무조건 잘 사면 그만이라는 개념만 앞세우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왜 사는가?”란 물음은 오늘날의 화두(話頭)일 수밖에 없다.
왜 사느냐의 자문자답은 자기만의 가치성과 목표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잘 산다는 것은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먼저 본인이 잘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가 없으면 이웃도 친구도 형제 부모도 나라도 없다. 내가 존재해야만 모든 것이 존재한다. 그 때문에 소중한 나를 위해 잘 살아야 할 것이다.
어느 절의 노스님이 외출을 하면서 절 마당 한가운데에 큰 원을 그려 놓고서
어린 동자에게 말을 했다.
“내가 아랫마을을 다녀올 것이니 이 원 안에서 이 선을 넘어서는 절대 안 된다.
만약 이 선을 넘어 밖으로 나오면 너를 이 절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러고 노승은 절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동자가 생각하기에 만약에 땡볕 아래 노승이 시키는 대로 서 있다간 목마르고 굶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동자는 궁리 끝에 빗자루를 들고 와서 동그라미 선을 깨끗이 지워버렸다.
그리고 점심을 배부르게 먹고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있는데 노승이 와서 잠을 깨웠다.
“내 이놈! 어찌하여 원안에서 나왔느냐.”고 묻자 동자는 태연하게
“스님, 원이 어디 있는데 원을 찾습니까.” 하고 대답했다.
우리가 지키고 사는 법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땅에 쏟아 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분명 우리 인간이 만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법에 웃고, 법에 울 수밖에 없다. 거기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법이 공평한 것도 아니다. 인간 세상은 자기들이 쳐놓은 그물에 자기들이 걸려 몸부림하고 죽어가는 경우가 많다.
언제까지 당신은 그물 속에 갇혀 살 것인가.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고 싶지 않은가.
대 자유를 꿈꾸거든, ‘왜 사는가?’의 화두를 풀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