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종승 민속학자]
민속학자 양종승 박사가 공연참관과 면담조사를 통해 기록한 한국 무형유산 전승자들의 예술 생애를 <명인ㆍ명무 열전>으로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
평생 남북분단의 아픔을 안고서 세기의 무용가 최승희(1911-1967) 춤 정신을 이어왔던 한순옥 명무가 지난 2022년 2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속세에 젖은 현대인의 멍든 심신을 정화하고 흐릿한 정신을 달래주었던 예술가, 공허하고 허무한 내면세계를 자신의 기법으로 미적 세계를 기름지도록 극대화하며 윤택한 삶을 부추겼던 무용가 한순옥의 이름 석 자를 되새겨 본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며 서울특별시 무형유산 한량무 보유자 조흥동은 한순옥을 “평생 올곧은 예술가의 자세로서 예술뿐만 아니라 삶 모두를 깨끗함의 상징처럼 사셨던 무용가”라고 회상하였다. 국가무형유산 승무 보유자 채상묵 또한 한순옥은 “권위적이지 않은 진실한 무용가로서,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늘 해맑은 춤새로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줬던 깊이 있는 예술가”였다고 회고하였다.
한순옥의 담백한 춤 세계와 올곧았던 삶의 속내를 알 수 있게 하는 기억들이다. 미학적 자세를 앞세워 반듯한 춤을 추구하였던 무용가 한순옥이었다. 그래서 한순옥의 춤은 겉으로 보이는 기교보다는 얼이 가진 내면의 에너지를 예술적으로 표출하는 데 더욱 치중되곤 하였다. 그러하기에 한순옥은 평생의 춤 길목에서 기회나 타산 속에 들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걸음만을 고요히 걸어왔던 무용가로 기억된다.
고고하고 청청한 예도를 간직해 온 무용가였기에 그렇다. 신명을 돋우고 미의 가치관을 승화시켰던 한순옥의 춤은 20세기 한국 춤 줄기를 이어 온 환희의 예술로 남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렇게도 어루만지고자 했던 한 많은 대동강을 뒤로 한 채 머나먼 세상으로 떠난 한순옥의 춤은 기쁨과 슬픔의 시간 그 자체로 기록될 것이다.
한순옥(韓順玉)은 1932년 1월 13일 평양에서 아버지 한석권과 어머니 배정수 사이의 1남 4녀 가운데 셋째딸로 태어났다. 어려서의 꿈은 의사였지만 최승희 공연을 본 뒤 무용가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늘 춤추는 최승희의 매력적인 눈빛을 떠올리며 꿈을 키워 나갔다. 평양제일여중 졸업반 때 부모 몰래 이모의 도움만으로 면접과 실기시험을 거쳐 평양 대동강가에 있었던 최승희무용연구소에 입소하였다.
밤늦게까지 학습을 반복하며 춤 연습에 몰두하던 어느 날, 한순옥은 갑작스럽게 결원된 검무 공연단에 대타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순옥은 그때부터 스승으로부터 인정받는 제자로 기억되기에 이르렀다. 월사금을 내지 않고 오히려 장학금을 받으며 최승희 춤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최승희는 이내 제자 한순옥 등을 두드리며 자신의 뒤를 이어갈 재능있는 제자라며 격려하곤 하였다. 한순옥은 더욱더 열정을 갖고 최승희무용연구소 일원으로 스승의 춤을 익혀나갔다.
최승희가 한순옥을 아끼는 마음은 무용극 <춘향전>에서도 나타났다. 이도령 역에 최승희, 춘향 역에 안성희(최승희 딸), 사또 역에 김백봉으로 짜인 작품에 기생 역으로 한순옥이 들어간 것이다. 한순옥에게는 파격적인 배역이었다. 사또 잔칫상에 둘러앉아 암행어사에게 눈을 흘기며 술을 따르는 단순한 역할이었지만 스승 옆에 앉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한순옥은 최승희 문하에서 춤 학습은 물론이고 대외 공연에도 두루 참여하며 스승이 인정하는 제자로 성장해 나갔다.
당시 최승희무용연구소에는 규정화된 민족무용 기본이 있었다. 최승희 춤에서의 민족무용 기본은 30여 분으로 짜인 <굿거리–자진모리–타령-연풍대>였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의 춤이 학습되었는데, 기본을 마친 연구생은 창작 수업을 받았다. 최승희의 창작법은 독특했다. 작품에 임할 출연자 모두를 모아 두고 작품에 대한 줄거리 설명을 곁들이며 대목마다 춤동작을 설명하였다. 이것이 이렇고 저것이 저렇고 하며 하나하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출연자 모두가 창작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개개인에게 주어진 역할에 맞도록 동작과 내용 분석의 과제를 내주는 것이었다.
그런 뒤, 각자가 구상해 온 춤동작과 의미를 같이 모아 총체적으로 정립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해 나갔다. 큰 구상은 안무자 최승희가 하되, 각론에서는 과제를 맡은 각자의 배역에 따른 동작과 의미를 살려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하였다. 개개인의 독창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이 최승희 창작법이었다. 최승희의 민족무용기본과 자율성을 갖게 하는 창작법은 최승희무용연구소가 문을 닫을 때까지 실천되고 또한 응용되었다.
이 모든 춤의 응용은 애초 최승희가 창안한 민족무용 총람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것이 뒷날 입춤을 비롯한 부채춤, 탈춤, 수건춤, 소고춤, 칼춤 등의 무보와 그에 따른 춤사위와 장단 그리고 반주곡 등이 집약되어 1958년에 《조선민족무용기본》으로 발간되었다. 남한에서 펼쳐진 한순옥 춤 활동 역시도 최승희의 조선민족무용 기본서에 나온 춤 원리와 의미 그리고 내용과 형식을 적용하여 이루어졌고, 창작법 또한 그러한 원리를 기반에 두고 펼쳐진 것이다.
한순옥은 6.25 전쟁 때 고향에 단 한 명의 언니만을 남겨 두고 부모와 오빠 그리고 두 여동생과 함께 남하하였다. 이때부터 한순옥은 최승희의 예술적 업을 짊어지고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한순옥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때 중국을 오가며 무역을 하였기에 해방 뒤 이미 서울에 정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1년 중국인민지원군 개입으로 1.4후퇴가 펼쳐지면서 경남 밀양에 정착하였다. 1년 동안의 밀양 생활은 좌익으로 몰릴 것이 두려워 출신 성분의 정체를 숨겼다.
그러던 중, 한순옥은 밀양 무봉사(舞鳳寺)에서 열린 사월초파일 공연행사에 최승희 춤으로 참여하였다. 그곳에서 경북 군위 출신 현대무용가 김상규(1922~1989)를 만나 자신이 최승희 제자임을 밝혔다. 그러한 김상규와의 인연으로 한순옥은 현대무용 <악마와 소녀> 작품에서 여자 주역을 맡았다. 한순옥은 이미 평양에서 혹독한 춤 학습을 하였던지라 어떠한 장르의 춤이라도 소화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한순옥 춤을 본 김상규 눈에도 만족감이 감돌았다.
얼마 뒤, 한순옥은 김상규의 누나가 초청한 대구 시내의 검무 공연 기회도 얻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순옥은 송범(1926~2007)과도 인연을 갖게 되었다. 한순옥 검무를 본 송범 또한 자신이 1949년 안무한 무용극 <인도 연가>에 한순옥을 출연시켰다. 이때부터 한순옥은 송범의 여러 작품에 단골로 참여하며 춤 영역을 넓혔다.
한순옥은 밀양을 떠나 마산에서도 1년간 피란 생활을 이어갔다. 이 무렵, 일본 유학 시절 최승희 춤을 배운 김해랑(1915~1969)이 고향인 마산에 근거지를 두고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었다. 한순옥은 같은 최승희 춤을 이어받은 김해랑과의 예술적 교류가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둘의 예술적 정서도 비슷했다. 그러한 인연으로 한순옥은 김해랑무용연구소에서 조교 역할도 맡아 수행하였고, 김해랑의 제자 최현(1929-2002)과도 우정을 쌓았다.
얼마 뒤, 한순옥은 부산에 정착하였다. 당시 부산에는 전국에서 모인 많은 무용인이 집결하고 있었다. 한순옥은 그들과 함께 무용 활동의 기회를 넓혀갔다. 이때, 한순옥은 최승희의 음악적 동반자 박성옥(1908~1983)을 만났다. 박성옥은 아쟁, 철가야금 등으로 무용 곡을 연주하고 창작춤과 여성국극의 안무는 물론 춤 소도구 제작 등의 분야에서도 활동하던 이름난 명인이었다.
한순옥은 많은 국악인과 무용가 사이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박성옥과 동업으로 무용연구소를 내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러면서 한순옥은 박성옥을 통해 스승 최승희의 예술적 유산을 되새기곤 하였다. 자신의 예술세계를 표명하는 제1회 한순옥무용발표회도 열었다. 그러던 중, 한순옥은 박성옥과 연인 관계라는 헛소문에 휘말리게 되자 1955년 광복동에 한순옥무용연구소를 차려 독립하였다. 같은 해 연구생 확보를 위해 여름방학을 기해 무용강습회를 열기도 하였다.
한순옥은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면서도 승마를 배워 여가를 즐기곤 하였다. 25살 되던 해에는 지인 소개로 신문사 정치부 기자로 있던 4년 연상의 정준모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정보기관에서 한순옥을 연행해 갔다. “평양에서 언제 내려왔냐? 최승희 제자가 아니냐?”라며 추궁하였다. 당시는 최승희 이름을 입 밖에 내기라도 하면 체포되던 시절이었다.
연행해 간 수사기관에서는 한순옥을 사상범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였다. 수모를 겪고 있을 때 정준모가 힘을 썼다. 풀려난 한순옥은 정준모와 가까워졌고, 집요한 구애를 받아 혼인까지 하게 되었다. 3년 뒤 아들도 낳았다. 무용가의 길을 이해하겠다던 남편은 돌연 춤추는 것을 막았다. 결국, 4년 동안 별거한 뒤 남편은 아들과 재혼한 여자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난 아이 등 모두를 데리고 일본으로 떠나고 말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