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영국시인 T.S. 엘리엇의 표현이 다시 생각난다. 원뜻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적어도 겨울 동안 죽어있던 땅에서 봄기운을 받아 무언가 꿈틀거리고 나오는 그 상황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고, 그것을 잔인하다고 했다는 것인데 잔인하다는 뜻의 영어 단어 'Cruel'은 '잔혹한', '잔인한'이라는 뜻 말고도 '고통스러운', '괴로운'이란 뜻도 있는 것을 보면 사실 '잔인한 달'이라는 표현보다는 '고통스러운 달'이라 해석하는 것이 더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이달이 청명 한식이란 절기를 맞아 저세상으로 가신 분들을 묘소에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는 달이기에, 돌아가신 분들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생각하며 삶과 죽음과 그 후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기에 그렇다.
얼마 전 장인 장모님이 누워계신 근교 공원묘지를 찾았는데 입구에서 한 예술가의 추모공간을 접하게 되었다. 그분은 생전에 화가로서 금관문화훈장을 받는 등 공적을 인정받은 분인데 공원에서 가장 좋은 자리 상당히 넓은 면적에 예술적으로도 멋지게 조성해 놓았다. 묘지도 이제 매장의 의미보다도 추모의 성격이 더 살아나는 공간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추모공원은 과거에는 매장 위주였다가 얼마 전부터 화장 후 납골묘가 많이 생겨나고 있고. 그것도 단층으로 만들었다가 아무래도 공간의 한계 때문인듯 봉안벽 형식으로 해서 몇 단 높이의 수직 봉안벽을 만들어 놓아, 여기에 모신 분들도 많아지고 있다. 그런 것과 견주면 이 예술가의 묘역은 단독이고 면적도 넒다.
얼마 전부터 이 추모공원에는 음악 연에인들이 묻히기 시작해 지금은 연예인이나 예술가들의 사후 성지로 불린다.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난 유명한 영화제작자도 봉안벽에 모셔져 있다. 필자는 거기 참배하러 갔다가 독립된 묘비 앞이 아닌 큰 벽 앞에서 추모하려니 은근히 좁은 공간에 모신 유족들을 원망하는 생각도 하곤 했는데, 이참에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떻게 모셔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람이 묻히는 자리는 땅 한두 평이면 충분하다. 관이 들어가고 작으나마 봉분을 갖추면 전통적인 묘장이 완성되는 것이니까. 물론 그 정도로 만족하기 쉽지 않고 좀 있는 분들은 어떻게든 크고 멋지게 키우고 석물도 놓고 해서 여기 누워계신 분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 우리는 그런 분의 자손이라는 점을 세상에 과시하는 사례를 많이 보게 된다. 그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화장해서 유골을 대리석 함에 담아 이렇게 묻고 작은 비석에 하고 싶은 말을 새기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가장 최소한의 묘장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저런 식으로 묻힐 수 있다는 것도 아무나 하기 어렵고, 저것을 할 형편이 안 되면 더 멀리 나가서 납골묘 벽에 유골함 그대로 묻히는 것이 현실일 것이지만 늘어나는 묘지 생각을 하면 묘역을 크고 호화롭게 하는 것보다는 저렇게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그렇다고 해도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부모님이 아직 생존해 계시고 그분들의 뜻을 받아 매장으로 모실 생각인데 우리 차례가 되면 우리는, 나는 어떻게 이 세상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자식들에게는 어떻게 남겨주는 것이 좋은가 고민하게 된다. 매장을 중요시해 왔던 우리의 전통이 좁은 국토면적을 잠식한다는 비판에 따라 점차 화장으로 전환되고 묘지도 납골묘로 합쳐지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지만 근교 야산 쪽으로 가 보면 여전히 묘지는 늘어나고 있고, 또 새로 등장한 납골묘, 나아가서는 자연장이란 것도 형태만 다를 뿐 결국 대지를 차지하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묘지가 끝이 안 보이는 현실에서 나도 사후에 이런 묘지행렬에 동참하여야 하나? 국가 유공자를 모시는 현충원 같은 것도 서울과 대전 등 주요 묘역이 꽉 차서 제3 제4 묘역으로 계속 확장되고 있는데 이 문제는 또 어떻게 봐야 하는가도 고민이다. 결국 사후에 어떤 흔적을 지상에 남기는 것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조상을 모시는 일을 갑자기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요, 나의 사후 자식들이 부모를 생각하고 때때로 기대고 싶은 마음까지도 필요없다고 박절하게 잘라낼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그 말은 남은 삶을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사후 나는 어떻게 해야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고, 그것을 이달에는 다시 해보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또 몇십 년이 지나가면 우리들의 장례에 관한 인식이 바뀔까? 땅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자신의 사후를 처리할 수 있는 방식은 없을까? 중국의 지도자 떵샤오핑(鄧小平)의 유해는 중국 상공에서 뿌려졌다고 하는데 우리들에게는 그런 방식이 적용될 수는 없을까? 지금은 화장해도 아무 데나 뿌리거나 묻을 수 없다는데 환경문제를 떠나서 개인 개인의 유족들 뜻을 맞추어 이 땅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처리되는 방법이 있으면 어떨까?
사람이 생전에 업적을 쌓고 좋은 일을 해서 후세인들에게 기억되기 위해서는 무덤이라던가 비석이라던가 이런 것들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어느 집안이고 전통을 중요시하니 조상을 잘 모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톨스토이 같은 유명한 문인도 자신의 유언대로 고향 솦속의 한적한 오솔길 옆에 비석도 없이 묻혀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생전의 활동이나 업적이지 억지로 돌에 새기고 단을 만드는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굳이 자신이 묻힌 것을 후세에게 남기지 않고도 자손들에게 기억될 수 있고, 자연훼손이나 환경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자연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게 된다.
아침에 산책하는 북한산 둘레길 9구간에는 예로부터 수많은 묘지가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다 무너지고 흩어지고 옮겨져 가끔 깨어진 상석이나 비석 편이 묻혀있다가 드러나곤 한다. 무덤이라는 것이 긴 새월이 지나면 그렇게 흙으로 변하고 그것이 당연한데 우리는 당대에 대리석 등 석재를 동원해 거창하고 요란하게 만들어 자연순환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근래 묘지 문제 등으로 우리의 장묘문화를 바꾸어야 한다는 인식은 다들 조금씩 하는 것 같지만 정작 어떻게 바꾸는 것이 좋을까 하는 해결책은 나오지 않은 채 우리 나라 곳곳에는 개인이건 공원이건 묘지가 계속 뻗어가고 있을 것이다. 공원에 묻힌 분들은 언제까지 모셔야 하는 것인가? 그런 것도 중요한 현안이다. 이제 사는 문제만큼이나 이젠 돌아가는 방법, 그리고 그 뒤의 뒤처리까지도 이제 지혜를 모아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4월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어서 죽음의 달이 아니고 생명이 살아나는 달이긴 하는데, 한식과 청명 때 성묘하는 달이기에, 어쩔 수 없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는 달, 곧 사월(思月)임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그만큼 나도 그런 생각을 해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란 뜻이겠지만....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