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세태는 요랬다 조랬다 하고
이내 몸은 고통과 번민이 많네
높은 사람 앞에서 배우가 되어
가면을 쓴 채 억지로 우네
조선 후기의 역관 시인 이언진(1740~1766)이 쓴 호동거실 연작시 가운데 31째 시입니다. 시에서 높은 사람 앞에서 자기 감정을 숨기고 그저 “예! 예!”만 연발해야 하는 신분 낮은 사람의 비애가 확 느껴지지요? 이언진은 역관으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는 중인에 불과했으니, 양반들 앞에서 그런 비애를 더 느꼈을 것입니다. 마지막 연 ‘가면을 쓴 채 억지로 우네’에서는 속으로는 눈물이 터지려고 하지만, 광대로서 사람들을 웃겨야 하는 ‘피에로의 눈물’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호동거실(衚衕居室)은 170수의 연작시입니다. 호동(衚衕)은 주로 가난한 하층민이 사는 골목길을 뜻합니다. 연작시 제목에서 짐작하듯이 호동거실에 나오는 시에는 하층민의 비애와 눈물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언진이 바로 이러한 동네에 살면서 하층민의 삶의 애환과 아픔을 생생히 목격하고 자기의 아픔으로 체득하면서 이러한 시가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시대 역관은 중인이지만 전문직으로 어느 정도 재산적 여유가 있기에 굳이 호동에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언진은 호동에 살면서 민초들의 삶을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언지 평전 《나는 골목길 부처다》를 쓴 박희병 교수는 이언진은 이 시집을 통해 신분 해방과 인간 평등의 실현을 추구하고 있으며, 세습적 권력과 지위, 모든 억압과 지배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고까지 얘기합니다. 또 하나의 시를 볼까요?
콧구멍 치들고 주인 뒤를 졸졸 따르니
종이라 불리고 하인이라 불리지
천한 이름 뒤집어쓰고도 고치려 않으니
정말 노예군 정말 노예야
보통 종들은 신분제 사회에서 자신의 운명을 숙명이라 생각하고 그에 적응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1연에서 보듯이 콧구멍 치들고 주인 뒤를 졸졸 따릅니다. 이언진은 이게 못마땅하여 4연에서 ‘정말 노예군 정말 노예야’하며 혀를 찹니다. 이거~ 집권자가 보면 이언진을 고려 시대 만적처럼 위험한 인물로 볼 것 같은데요.
이언진은 27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언진을 잘 모르는 사람은 요절한 이언진과 그의 시를 연결시켜 ‘뭔가 반역의 꿈을 꾸다가 처형당한 것이 아닐까?’ 하며 속단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이언진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1759년 역과에 합격하여 역관으로 사신단을 수행하였습니다. 이언진은 1763년 조선통신사의 역관으로 일본에 갔을 때 시인으로 필명을 날렸습니다. 이언진보다 한 세대 뒤의 문인 김조순이 일본에서의 이언진에 대한 일화를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언진이 당도하자 뭇 일본인들은 5백 개의 부채를 가져와 거기에 오언 율시를 써달라고 하였다. 이언진은 즉시 먹을 서너 말을 갈도록 하여 한편으로는 시를 읊조리고 한편으로는 글씨를 썼다. 그리하여 금세 부채 5백 개에 5백 수의 시를 써 주었다. (가운데 줄임)
5백 개의 부채를 가지고 와 청하기를, “이번에는 당신의 기억력을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가운데 줄임) 붓을 쥔 손가락 사이에 슥슥 가을비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곧 붓을 던지고는 옷깃을 단정히 하고 앉았다. 해가 저물기 전에 천 개의 부채에 시를 적고, 5백 수의 율시를 짓고, 자기가 지은 시를 하나도 착오 없이 외자, 일본인들은 경탄하여 혀를 내두르면서 신으로 여겼다. 이에 이언진의 이름이 일시에 유명해졌다.
좀 과장이 있어 보이지만, 그만큼 이언진이 천재 시인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언진은 이렇게 일본에서 자신의 정수를 다 빼내어 활동하여서인지 일본에 있을 때부터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귀국한 뒤 3년 동안 앓다가 숨을 거둡니다. 천재 시인이 너무 빨리 세상을 떴군요. 이언진은 자기 삶이 얼마 안 남은 것을 알자, 그동안 자기가 지은 시 원고를 불사릅니다. 이때 모두 불살라졌다면 우리는 천재시인 이언진의 작품을 못 볼 뻔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아내가 이를 발견하고 불더미에서 원고 일부를 건져냅니다.
《열하일기》로 유명한 연암 박지원은 이언진과 같은 시대의 사람입니다. 박지원은 당시 집권층인 노론의 양반인데다가 《열하일기》로 이미 필명을 날리고 있어, 이언진은 자기 작품을 봐달라며 박지원에게도 자기가 쓴 글 일부를 보냅니다. 그러나 이언진의 기대와 달리 박지원은 이언진의 작품에 혹평합니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부르짖는 박지원에게 이언진의 글은 법고((法古)는 없이 그저 창신(創新)만 주장하는 것으로 비친 것이지요. 실망한 이언진은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떴으니, 박지원의 혹평도 이언진의 죽음에 작은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박지원은 이언진의 진가를 못 알아보았지만, 박지원의 지기 이덕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덕무는 벗 윤가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언진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우리들은 평소 옛날의 기이한 글들은 빠뜨리지 않고 찾고 있으면서 도리어 현재의 훌륭한 글을 찾아서 스승이나 벗으로 삼을 줄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눈썹이 눈앞에 있으되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우상의 시편은 해박하지만 넘치지 않고, 그윽하고 기이하지만 괴벽하지 않으며, 묘오(妙悟)하지만 공허하지 않으며, 마름질했으되 단점이 없습니다. 또 그 글씨도 힘차고 빼어납니다. (...) 확실히 비범한 사람입니다.
‘우상’은 이언진의 자(字, 사람의 본이름 외에 부르는 이름)입니다. 자신의 지기 이덕무가 이렇게 이언진을 높이 평가하니, 박지원도 이언진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이언진에 대한 전기 《우상전(虞裳傳)》을 지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박지원이 이언진 살아생전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위대한 두 문인이 손을 맞잡는 그런 장면이 나왔으면 더 좋았을 것을... 마지막으로 이언진의 스승 이용휴가 이언진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쓴 만시(挽詩) 일부를 인용하며, 이언진의 호동거실의 일부 시를 본 소감을 마칩니다.
옛날에 그대 처음 찾아왔을 때
광채가 종이 밖을 뚫고 나왔지!
초고를 펼쳐 읽기도 전에
보배가 그 속에 든 줄 알았네
그 사람은 간담이 박처럼 크고
그 사람은 안목이 달처럼 밝았지
그 사람 팔에는 귀신이 있고
그 사람 붓에는 혀 달렸더랬지.
다른 사람은 자식으로 제 몸을 전하나
우상은 그렇게 하지 않았네
자손은 어느 땐가 다함이 있지만
이름은 영원토록 다함이 없네
이언진의 시와 삶 그리고 스승 이용휴의 만시는 박희병 교수의 이어진 평전 《나는 골목길 부처다》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